39화
“루퀼렘이 퍽이나 저를 받아 주겠네요, 씨시!”
줄리에타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루퀼렘은 애초에 그녀의 선택지에서부터 없었던 거다.
루퀼렘이 비센티움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리아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퀼렘 사람들이 비센티움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건 아니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비센티움인을 받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줄리에타가 루퀼렘인을 너무 인정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뚱해졌다.
이리아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비센티움인이라 해도 분명 받아 줄 거예요.”
“그걸 씨시가 어떻게 아나요?”
“그냥 제 촉이에요.”
줄리에타가 조금 묘한 눈빛으로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리아는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미소 짓다가, 첫 총성이 들려오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탕-.
진동에 누구보다 예민한 숲속의 새들은 일제히 푸드덕 날아올랐다. 인간의 유희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무척이나 절박한 날갯짓들이었다.
이리아는 날아가는 새들이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늘을 응시했다.
‘그래도 저들은 위협을 피해 다른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갈 수 있구나…….’
처음부터 새로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만일 그랬다면, 자유를 향한 이 끔찍한 갈망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여신은 왜 내게 두 날개가 아닌, 두 다리를 주었는가.
총소리가 이어지고 새들이 더 많이 날아오를수록, 이리아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 숲에서 죽어 가는 동물들을 지킬 수 없어 원통했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처럼 날지 못해 비참했다.
급기야, 어젯밤 덱스터와 나누었던 대화까지 귓가에서 감돌기 시작했다. 이리아의 심장은 어김없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안 돼, 이리아 아델리어. 정신 차려.’
두 손바닥에서부터 식은땀이 쏟은 듯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이리아가 조용히 심호흡했다.
그녀는 마주 보고 함께 굳어 버린 얼굴의 줄리에타에게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주고선, 부드럽게 속삭였다.
“줄리에타는 분명 자유를 찾아 원하는 인생을 살게 될 거예요.”
나와는 다르게.
이어 줄리에타가 무어라 대답했지만, 이어지는 총성 탓에 들을 수 없었다. 입 모양을 읽은 바로는 괜찮냐고 물은 듯했다.
괜찮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반드시 괜찮아야만 한다.
거친 총성이 울려 퍼지는 내내, 이리아는 진짜 자유를 찾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의 그녀는 숨김없이 하얀 머리카락을 드러내고선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고 있었다.
널찍한 바닷가의 모래 위에 제 발자국을 새겨 넣고, 아기자기한 풍차들과 푸른 하늘을 구경하며 지난 인생을 편하게 되돌아본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 신선한 물을 떠다 주고, 콘라드가 그랬듯이 대충 모아 둔 싸구려 엽서들을 그에게 보내 본다.
주어진 사냥 시간은 약 100분.
이리아의 긴 상상이 끝났을 땐, 쉼 없이 울리던 총성도 끝나 있었다.
이리아는 겨우 인간들의 유희로 인해 목숨을 잃어버린 수많은 동물에게 깊은 애도를 표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카즈웰 4세 때문에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사냥터에서 나올 때까지 이를 악물고 정자세를 유지했다.
숲으로 들어갔던 사냥꾼들은 하나둘씩 천천히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은 동물 사체들을 질질 끌고 나왔는데, 피비린내를 맡지 않기 위해 이리아는 힘껏 숨을 참아야 했다.
사냥꾼들은 잡은 동물들이 많을 시엔 자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속상한 낌새를 내보였다. 그들의 표정에서부터 결과가 드러났다.
기다리고 싶지 않음에도 기다리게 된다. 찾고 싶지 않음에도 찾게 된다.
피비린내로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이리아의 두 눈은 덱스터를 찾아 사람들 틈을 헤맸다.
덱스터는 한참 후에야 퀸터와 함께 숲에서 나왔다. 내심 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덱스터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놀랐다.
그리고 그건, 이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어느덧 반쯤 일어난 이리아는 흔들리는 눈망울로 저 멀리 걸어 나오는 덱스터를 응시했다.
무언가 홀가분한 얼굴을 한 그는, 다른 사냥꾼들과 달리 잡은 동물이 한 마리도 없었다. 단 한 마리의 작은 토끼조차도 잡지 않았다.
무려 세 번이나 사냥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었던 남자다. 그런 남자가 하루아침에 변해 스스로 우승을 포기하는 광경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카즈웰 4세마저도, 두 손이 텅 빈 덱스터를 향해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덱스터는 이리아에게 보라는 듯 삐딱한 웃음을 흘렸다. 이리아는 그런 그에게서 아주 긴 시간 눈을 떼지 못했다.
이리아가 아는 바에 따르면 덱스터는 사냥을 굉장히 즐겨 했다. 그는 약혼을 하기 전까지 비둘기를 날려 총으로 쏘는 행위를 하나의 취미생활로 삼았으며, 총기류를 종류별로 수집할 정도로 사냥에 대한 애정도가 깊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동물을 단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니. 그것도 비센티움의 가장 큰 사냥 대회에서.
덱스터가 대회를 스스로 기권한 건 귀족과 평민 상관없이 모두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이리아는 그녀의 뒤편에서 계속해서 덱스터를 언급하는 대중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덱스터가 변했다고 하며, 그가 새로 맞은 ‘약혼녀’를 들먹거렸다. 혹시 소문과 달리 약혼녀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해 그녀를 창피하게 하려는 속셈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 이리아의 속이 찌르르 쓰려졌다. 구체적인 내용은 틀렸지만, 덱스터가 ‘약혼녀’로 인해 사냥감을 잡지 않은 건 맞기 때문이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오랜 취미생활도 한 번에 관둘 만큼 날 그 정도로 사…… 사랑하는 걸까…….’
너무 깊다. 덱스터가 가진 마음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이리아는 초조해지기만 했다.
그가 동물을 잡지 않은 건 여신을 섬기는 루퀼렘의 대마법사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기뻤지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입장에서는 싫었다. 대마법사로서 하면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이리아는 내심 덱스터가 작은 토끼 한 마리라도 잡아 왔었기를 바랬다.
이번 대회의 승리는 제국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온 어느 청년이 거머쥐었다. 그는 일전의 덱스터처럼 불곰의 목을 손도끼로 후려치지는 않았지만, 대신 거대한 늑대 우두머리를 총으로 쏴 잡았다. 늑대 외에도, 그가 잡아 온 맹수들은 꽤 많았다.
주변에서 ‘쟤는 인생 폈다.’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청년이 받을 상금의 양을 계산하며, 그가 죽인 동물들의 수를 셌다.
이리아만은 차마 싸늘하게 식어 버린 사체들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카즈웰 4세가 신경 쓰여 아예 사냥터에서부터 시선을 뗄 수도 없다.
동물들을 볼 바에는 차라리 덱스터를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이리아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쟁터에서도, 지금도 덱스터는 여전히 눈에 띄는 남자였다. 신장이 하나같이 거대한 비센티움의 사냥꾼들 사이서도 그의 검은 머리는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동물을 잡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원래 사냥에 관심이 많던 사람이니 적어도 대회의 우승자는 살피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전혀 달리, 덱스터는 우승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회의 우승자가 누구든, 그는 급히 입 속에 무언가를 잔뜩 욱여넣는 중이었다. 처음엔 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박하잎이었다.
장내가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줄리에타를 포함한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고아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 틈에 꼈다가 드레스가 구겨질까 싶어 그런 듯했다.
괜히 카즈웰 4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이리아도 그들을 따라 가만히 의자에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우승자가 나온 이후에는 대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리아는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너무나도 지쳐 침실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다. 침실에서는 현재로서 가장 힘든 덱스터를 상대해야 할 게 뻔했으나, 그곳엔 적어도 카즈웰 4세가 없었다.
우즈웰 클로티어는 성 내부 연회장에 거대한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우즈웰 클로티어의 눈도장을 찍어 놓아서 나쁠 건 없는 데다 카즈웰 4세도 있었기에 초대받은 귀족 대부분은 식사에 참여했지만, 간혹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귀부인들은 빠지기도 했다.
이 자리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구나. 이리아는 하인을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한 귀부인의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덱스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덱스터였다. 하지만 그는 오늘따라 참 이상하리만치 곁을 내주지 않았다. 이리아가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뒤로 물러났다.
유난히 더 독한 박하 냄새 끝에는 덱스터가 있었다.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이리아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다른 이들의 몸에서 밴 피비린내를 확인했다.
보는 눈들이 있었기에 밝은 척을 했지만, 이리아는 확실히 기운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녀가 코끝이 아릴 정도로 시원한 박하 향을 맡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하워드 공.”
“아직 해도 다 저물지 않았는데. 이렇게나 일찍?”
“어차피 전 저녁 식사도 못 하잖아요.”
“아…… 이런.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녜요.”
저녁은 사냥한 동물들로 만든 요리가 나온다. 온통 고기 요리일 게 뻔한데, 이리아가 식사를 할 리가 만무했다.
덱스터는 우즈웰 클로티어에게 양해를 구한 후, 괜찮다는 이리아를 손수 침실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는 이리아를 바래다주는 와중에도 철저히 거리를 유지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가 쪽쪽 빨리는 느낌이다.
이리아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어 힘겹게 욕실로 들어갔다. 이른 저녁이었기에 하녀들은 없었다.
저택에서는 언제나 로샨이나 덱스터가 함께였으니 이리아는 오랜만에 완벽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문을 단단히 닫은 후에, 나무와 대리석으로 장식된 거울 앞에 섰다.
새빨갰던 머리카락 끄트머리서부터 서서히 색이 빠져 갔다. 진한 녹빛의 눈동자는 루퀼렘인 특유의 황금빛으로 변하고, 피부는 분필 가루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창백해졌다.
이리아는 가만히 ‘진짜’ 그녀의 모습을 응시했다. 피부가 새하얘졌기 때문일까, 거울 속 이리아 아델리어는 시체라고 오해할 정도로 몰골이 엉망이었다. 깨지기 일보 직전인 도자기 인형 같았다.
살이 빠진 것도 훨씬 크게 티가 났다. 루퀼렘에서 살았을 때 살이 빠지는 건 당연히 상상도 못 했을뿐더러, 전쟁터에서도 이토록 마르진 않았었다.
이리아는 제 앙상한 목덜미가 너무나도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일 저택으로 돌아가면 카즈웰 4세는 한참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줄리에타처럼, 총성이 들려오자마자 날아올랐던 새들처럼 어디론가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건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리아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힘내라는 뜻으로나마 작게 웃어 보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