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109)

38화

차라리 발끝까지 완전히 가리는 드레스를 입을걸.

이리아는 부디 다른 이들이 파르르 떨리는 다리를 알아차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우즈웰 클로티어가 배정해 준 하녀들이 그녀를 안내했다.

이리아는 덱스터와 약혼을 하긴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성을 바꾸지는 않았기 때문에 귀족의 신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즈웰 클로티어의 배려로 귀족들과 함께 대회장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난 차라리 뒷자리가 좋은데…….’

이리아가 뒤를 흘끔거렸다. 그곳에는 어두운 머리를 가진 비센티움인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대부분이 평민이었지만, 간혹 졸부 집안도 있는 듯했다.

사실 사냥 대회에서는 사람이 다치는 사고도 파다하게 일어났다. 심하면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고의 발생률이 높든 낮든, 매년 열리는 사냥 대회의 참가자는 언제나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귀족이 우승을 하면 명성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황실의 눈에 들 수 있다. 실제로 비센티움의 13대 여제의 두 번째 남편은 사냥 대회를 우승하여 자작에 신분이었음에도 부마가 되는 영광을 누렸었다.

평민들은 주로 상금을 타기 위해서나 정치권 데뷔를 위하여 대회에 참가한다.

황실에서 개회하는 연례 행사인 만큼, 대회의 상금은 어마어마하다. 언젠가 들은 바에 의하면 보통의 직장인이 10년을 열심히 일해도 채 못 벌 돈을 한 번에 뿌린다고.

돈이 목적이 아닌 이들은 대부분 정치권 데뷔를 원하는데, 사냥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전국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노린다고 한다. 지명도가 높을수록 정치권에 데뷔하기 쉬우니,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생각보다 너무 잘 보이는데 어떡하지? 정말로 덱스터 하워드의 말대로 눈을 감고 있어야 할까……?’

이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입 속이 쩍쩍 메말라 마실 음료를 찾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이리아는 그자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옆자리에 앉은 이는 이리아가 무척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줄리에타?”

“오랜만이에요, 씨시. 이런 곳에서 다 만나네요.”

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대체 왜 줄리에타가 이곳에 있는 거지?

순간, 혼란에 빠진 이리아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댔다.

줄리에타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선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이리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를 보고, 뒤늦게 요한이 해 주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요한의 아버지는 루퀼렘 방면 국경 총사령관이고, 어머니는 엘로이스 가문의 일원이다. 줄리에타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가문의 혈통이니, 카즈웰 4세의 사냥 대회 초대장을 받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차 싶었던 이리아가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부채 위로 드러난 줄리에타의 갈색 눈이 더 가느다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녀가 꽃들이 유화로 그려져 있는 부채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남동생은 안 왔어요. 아버지를 따라 루퀼렘 국경에서 근무를 서고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이리아가 멋쩍게 목덜미를 문지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를 이성적으로 좋아한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덱스터와 약혼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왜인지 너무나도 창피했다.

잊고 있던 요한을 떠올리니, 그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가 생각나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리아가 다급히 주제를 돌렸다.

“주, 줄리에타가 이런 옷을 입은 모습은 처음 봐요.”

“씨시가 보았을 땐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잘 어울리긴 하는데…… 약간 익숙하지가 않네요.”

“그럴 만도 하죠. 우리는 항상 누더기만 입고 다녔잖아요?”

이리아는 줄리에타를 따라 장난스레 킥킥대다가, 주변인의 시선을 느끼고선 황급히 점잖은 척했다.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줄리에타는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들을 대회장까지 대동해 왔다. 줄리에타가 바로 옆에 서 있는 하녀에게 귀엣말하자, 하녀는 어디에선가 럼주를 가져와 따라 주었다.

술을 분명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마시게 되는구나. 혹시 또 취해 버릴까 싶어, 이리아는 최대한 조금씩 럼주를 홀짝였다.

그런데 문득, 그런 그녀의 시야 안쪽으로 카즈웰 4세의 모습이 들어왔다.

맞은편 저 멀리에 앉아 있는 카즈웰 4세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로 이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만나자, 이리아는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왜…… 왜 쳐다보는 거지?’

이리아는 콜록거리면서도 계속 카즈웰 4세를 살폈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이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리아가 또다시 베일을 쓰지 않은 걸 후회하기 시작할 찰나, 카즈웰 4세는 드디어 시선을 거두었다.

사레가 심하게 걸린 탓에 기침이 잦아드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이리아가 무안하게 입 주변을 정리할 동안, 줄리에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년부터는 절 볼 수 없을 거예요, 씨시. 올해 겨울엔 성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갈 예정이거든요.”

“……네?”

이리아는 진심으로 놀랐다. 다시 사레가 걸려 추태를 부리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귀족의 영애가 성을 버린다는 건 가문에서 영원히 제명당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이리아가 다급히 제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 성을 버린다고요? 이유가 뭔데요?”

“아버지께서 원치 않은 남자와의 결혼을 강요해서요.”

아. 이리아의 잇새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줄리에타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자마자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게 포장해서 이사라고 했지만, 사실 가출과 다름없어요. 결혼을 피해 하는 가출.”

이리아는 이미 자유를 찾아 가출을 했고, 줄리에타는 곧 결혼을 피해 가출을 할 예정이다.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집을 나간다는 건 똑같았다.

줄리에타로부터 강한 동질감이 느껴지며, 이리아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앞길을 축복해 주었다.

진심 어린 축복이었다.

부디 나와 달리, 줄리에타는 진정한 자유를 찾기를. 용감한 사람이니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헤쳐 나가리라.

“안 말리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절 뜯어말리던데.”

“저도 집에서 도망쳐 나왔잖아요, 줄리에타. 벌써 잊었어요……?”

“아, 맞다. 그랬었죠.”

나란히 앉은 두 여자의 어깨가 동시에 들썩였다. 둘은 멀리서 덱스터가 등장할 때까지, 지금껏 하지 못했던 자잘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승마복이나 사냥복을 고수했지만, 덱스터만은 군단장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나왔다. 값비싼 제복을 입은 모습에서부터 옷이 손상돼도 상관없다는 경제적 여유와 사냥에 대한 자신감이 풍겨 오고 있었다.

그는 퀸터의 등 위에 안장을 올리다 말고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카즈웰 4세 못지않게, 덱스터의 시선 또한 강렬했다.

이리아는 어젯밤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자마자 황급히 손아귀의 술잔을 놓았다. 또다시 사레가 들려 추태를 부리는 꼴만은 면하기 위해서였다.

덱스터는 이리아에게서 시선을 떼기 무섭게 퀸터의 등 위에 훌쩍 올라탔다. 퀸터에 오른 데다가 제복 망토까지 두르니, 그의 거대한 풍채가 훨씬 도드라졌다.

쿵쿵. 덱스터를 오래 바라볼수록, 이리아의 심장은 더욱 거세게 박동했다.

이리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덱스터가 사냥터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흘러가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줄리에타도 마찬가지로 덱스터를 보고 있었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들리고 덱스터와 퀸터가 숲속으로 사라지자마자, 그녀가 질문했다.

“그건 그렇고, 하워드 공께서는 잘해 주시나요?”

“어……. 그, 그냥 그럭저럭 꽤…….”

“살이 많이 빠진 걸 보면 그다지 잘해 주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줄리에타가 이리아의 손등을 살포시 쓸어내렸다. 손까지도 살이 빠져, 그러잖아도 두드러졌던 손등뼈는 이제 그 구조가 전부 보일 정도였다.

이리 티가 날 줄 알았다면, 장갑을 끼고 올 걸 그랬나 보다.

이리아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앙상한 손등을 가렸다.

“요한도 제 약혼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럼요, 이 바닥에서 쫙 퍼진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죠. 하워드 공을 향해 욕을 한 바가지 하다가 나중에는 체념하던데요? 이미 차인 놈이 뭘 어쩌겠나요, 받아들여야지!”

세상 모든 남매는 미운 정으로 함께 산다더니, 요한과 줄리에타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줄리에타는 요한이 실연당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분 좋은 듯해 보였다.

총성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참가자들이 사냥감을 찾아 헤매고 있는 듯싶었다.

이리아는 부디 동물들이 총탄을 피해 멀리 도망가길 바라며, 줄리에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줄리에타는 내년에 어느 나라로 갈 계획이세요?”

“아직 정확히 정하지는 않았는데, 아즈웬국을 고려하고 있어요. 이건 씨시에게만 말해 주는 거지만 사실 저, 마법을 배우고 싶거든요.”

“……네?”

이리아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방금, 비센티움인의 입에서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줄리에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리아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듯했다. 그녀는 이리아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출 때도 태연하게 럼주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하, 하지만 비센티움인은 선천적으로 마법 사용이 불가능하잖아요?”

“당연히 이론적으로만 배우겠다는 뜻이죠. 마법의 발동 이론과 의학에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마법을 배워서 아직 부족한 제 의술을 조금이라도 더 단련시키는 게 목적이에요.”

아. 이리아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에타는 과거에도 의술에 관심이 많았으니, 마법 이론에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년 전, 대륙에서 핍박받던 마법사들은 대마법사 엘드리지를 따라 이주하여 루퀼렘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엘드리지를 따랐던 건 아니었다.

이미 결혼을 하여 정착했던 마법사들은 엘드리지를 따르지 않았고, 루퀼렘 외부에서 자녀를 낳았다. 그들이 낳은 자손들은 마법사와 일반인의 혼혈이 대다수였고, 그 자손들이 결혼을 거듭하는 동안 마법사의 피는 점점 옅어졌다.

마법사의 피가 옅어진 결과로 결국, 루퀼렘 외부에 남은 마법사들의 후손은 선천적으로 마법 사용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마법사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남아 있었기에, 마법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 후손들은 현재 작은 도시국가를 이루어 함께 생활하는 중이다. 콘라드가 편지를 보낸 장소이자 줄리에타가 언급한 아즈웬국이 바로 이 도시국가이며, 정식 명칭은 ‘아즈웬 독립 시국’이다.

아즈웬국은 확실히 마법 분야의 이론이 풍부한 나라였다. 하지만 양과 질은 다른 법이었고, 질적인 측면으로 따지자면 루퀼렘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마법학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이리아는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줄리에타. 마법을 배우시려면 아즈웬국보다는 차라리 루퀼렘에 가는 게 더 나을 텐데요.”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