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침대가 푹 꺼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리아는 등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덱스터의 숨소리를 세다가, 몸을 한껏 웅크리며 질문했다.
“하워드 공, 제가 공이랑 결혼한 후엔…… 아, 아이를 꼭 낳아야 하겠죠? 귀족이랑 결혼을 한 여인들은 대부분 아이를 낳으니까…….”
“당신한테 아이를 강요할 생각 따윈 없어. 아이를 가지기 싫다면, 가지지 않아도 돼.”
이리아가 부르기 전까지 소파에서 자던 중이었던지, 덱스터의 목소리는 한껏 메말라 있었다.
그가 나직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저택은 루인에게 물려줄까? 지금도 꾀가 많은 아이니, 분명 훗날 저택 사람들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거야.”
“저…… 전 지금 심각해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워드 공.”
“알아. 나도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니야.”
덱스터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덱스터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러잖아도 메말랐던 목소리는 급기야 듣는 사람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갈라져 흘러나왔다.
“사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나야.”
순간, 제 두 귀를 의심한 이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 말았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니. 덱스터 하워드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제국의 공작이었다. 아이를 가지지 않는 건 곧 가문의 대를 끊어 버리겠다는 뜻과 같은데, 이리아의 상식으로는 그의 발언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덱스터는 일그러진 그녀의 미간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야기했다.
“내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원치 않아도 권력 싸움에 휘말리게 돼. 카즈웰은 내 아이들이 커 가는 과정을 절대로 손 놓고 보고 있지 않을 거야. 그는 제 둘째 아들이 다음 황태자가 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니까.”
덱스터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이리아의 두 녹빛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나와의 결혼을 애초에 바라지 않았잖아. 그런 당신한테 내가 감히 어떻게 아이를 요구하겠어?”
키 차이가 크게 나는 탓에 이리아는 언제나 덱스터를 올려다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침대에 함께 누워 있으니, 눈높이가 같았다.
맨정신으로는 처음으로 덱스터와 같은 눈높이를 가지게 된 이리아는 왜인지 그가 루 아휜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속상할 때 왼쪽 눈을 살짝 일그러뜨리는 모습도, 처연하게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도 루 아휜과 참 비슷하다.
“난 이미 권력 때문에 부모님과 인생을 잃었어. 내 피를 물려받은 아이들까지 잃게 된다면, 그때는 분명 전부 무너져 버릴 테지…….”
덱스터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그는 호롱불의 심지가 다 타 버릴 때까지 눈을 감고 있다가, 호롱불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오자마자 차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바로 앞에 누워 있는 이리아의 얼굴 윤곽이 창밖의 희미한 달빛에 비치었다. 그건 덱스터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리아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의 콧날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 지금껏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방 안에는 희미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를 응시했었다.
이리아는 저 스스로 덱스터의 품 안에 몸을 던졌었고, 덱스터는 그런 이리아에게 깊은 입맞춤을 해 주었었다. 그는 심지어 이리아의 위에 올라타 허벅지를 어루만지기까지 했다.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커다랗게 뜨인 녹빛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대체 무슨 기억이지? 내가 덱스터 하워드와 이렇게 누웠던 적이 있었던가……?’
당황한 이리아가 허둥거리기 시작할 찰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이윽고, 낮은 속삭임이 어두운 방 안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항상 나만 모든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군. 당신은 언제나 두꺼운 껍질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
덱스터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난 알아,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가진 이 두 눈빛은, 주로 전쟁터에서 이웃 나라의 첩자들이 보였던 눈빛이거든.”
……어? 이리아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순간적으로 숨통이 턱 막혀 버린 이리아는 어둠 속에서조차 덱스터를 마주할 수 없었다. 얼굴을 미치도록 숨기고 싶은데, 뺨을 감싸고 있는 손 때문에 움직이기가 불가능했다.
쿵쿵. 거대한 심장 소리가 그녀의 두 귓가를 아득하게 메웠다.
함께 누워 있는 덱스터가 혹시라도 튀어 오르는 심장을 알아차릴까, 이리아는 이불을 제 가슴 위로 힘껏 끌어모았다.
들킬 거야.
결국엔, 덱스터 하워드에게 전부 들키고 말 거야.
이리아가 천당과 지옥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덱스터는 가만히 그녀의 뺨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일그러지는 이리아의 눈 아래를 스치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나는 내 어머니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녀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어. 그 10년의 세월 내내, 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머니를 홀로 기다렸었지.”
덱스터의 손이 스르르 뺨을 떠났다. 이리아는 비로소 그녀가 자유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팔목이 잡히고 말았다.
“어떤 거짓말인지 상관없어. 설령 첩자라 해도 좋아.”
뜨겁고 커다란 손은 팔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 강하게 깍지를 껴 왔다.
“난 기다리는 것 하나는 잘하기에, 당신이 그 두꺼운 껍질을 찢고 나오기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거야.”
이리아의 손바닥에선 언제나 그랬듯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지만, 덱스터도 언제나 그랬듯 그녀를 놓지 않았다.
여전히, 이리아의 두 귓가에는 심장 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뛰는지,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고통은 결국 티가 나는 법이다.
덱스터는 어둠 속에서 잔뜩 일그러진 이리아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깍지 낀 두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리아의 손목 안쪽, 거칠게 뛰는 맥박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이어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속삭였지만, 두 귀를 메운 심장 소리 때문에 들을 수 없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손을 놓아주자마자 이불 안쪽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꼭꼭 숨겨 버렸다.
‘그냥, 그냥 이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박동하는 심장 때문에 작은 흉부가 쓰라릴 지경이었다. 이리아는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리고선, 두 손으로 심장 박동이 울리는 귀를 힘껏 막았다.
다가올 미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웠다.
***
이리아는 반쯤 혼절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 눈을 붙이지 못한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니, 덱스터는 옆자리에 없었다. 아마 사냥에 나갈 준비를 위해 먼저 나간 듯싶었다.
이리아는 어젯밤 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잠을 많이 잤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깨져 버릴 듯이 피곤했다. 지치고 힘들어 죽을 것만 같다.
내가 첩자의 눈을 하고 있다니. 두꺼운 껍질을 찢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니.
‘덱스터 하워드에게 비밀을 밝힐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비밀을 밝히면 분명 죽을 텐데, 밝힐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날은 세상이 멸망해도 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이리아는 빤히 알고 있었다.
“아, 아하하…….”
이젠 한숨보다도 실소가 먼저 터져 나왔다.
힘없이 웃던 이리아는 하녀들이 들어올 때까지, 침대에 굳어 버린 밀랍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하녀들은 귀찮게 그녀를 깨우지 않아도 되어 좋다는 표정들이었다. 이리아는 문득 로샨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하녀의 손길들이 이끄는 대로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전날과 달리 그녀는 상대적으로 편한 개나리색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 길이는 발목이 보일 정도였고, 코르셋도 차지 않으니 어제보다 살 만했다.
귀족들은 성 복도를 가로지르는 이리아에게 간단하게 아침 인사를 해 왔다. 짧은 기간에 너무나도 많은 귀족을 만난 바람에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이리아는 최대한 정성을 담아 대답해 주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우즈웰 클로티어의 성을 지은 후 뒤편에 사냥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애초에 사냥터가 있었고, 사냥을 즐겨 했던 우즈웰 클로티어의 남편이 별장 겸 그 위에 성을 지었다.
‘성을 나서면 곧바로 사냥터니 따로 시간을 내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참 좋구나.’
이리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착잡한 마음을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발걸음은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멈추었다.
멀리서부터 무척이나 익숙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과 그만큼 까만 눈동자. 덱스터 하워드와 상당히 닮은 외모.
황태자, 카즈웰 4세였다.
‘아……안 돼.’
이리아가 다급히 숨을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러나 주변에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이 상황에서 도망을 간다면, 눈치가 없는 사람까지도 무언가 이상하다며 그녀를 의심할 것만 같다.
이리아는 결국, 다가오는 카즈웰 4세를 그대로 맞이하고 말았다.
그녀는 여타 다른 귀족들처럼 벽으로 비켜선 후 카즈웰을 향해 허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카즈웰은 단박에 이리아를 알아보았다. 그가 어김없이 새빨간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인사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네, 힐데어 양.”
이리아가 더욱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제발 빨리 지나가라는 그녀의 마음과 다르게, 카즈웰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제(大帝) 던햄 공이 아니야. 눈을 마주쳤다고 하여 함부로 신하들의 목을 베지 않네.”
이리아의 두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카즈웰의 다음 문장은 듣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얼굴을 보여 봐라.”
대체 왜 베일을 쓰고 오지 않았을까. 이리아는 침대맡에 베일을 놓고 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카즈웰 4세는 어렸을 적의 낙마 사고로 왼쪽 다리가 좋지 못해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승마복이나 사냥복이 아닌, 비교적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카즈웰은 긴장한 낌새가 가득한 이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꼴깍. 이리아가 침을 다섯 번쯤 삼켰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워드 공이 혹여 그대에게 대회의 우승을 약속했던가?”
“어…… 야, 약속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사냥 실력이 워낙 뛰어나시니 분명 좋은 성적을 거두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렇군. 부디 좋은 시간 보내게.”
특별하게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닌가 보다. 카즈웰은 이리아를 마지막으로 한번 가볍게 훑은 후, 유유히 떠나갔다.
하. 이리아의 숨통이 트였다.
그녀는 카즈웰 4세의 뒷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카즈웰이 자신을 다시 돌아볼까 염려되었지만, 주변인들의 시선 때문에 급하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