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109)

36화

비센티움의 귀족 대부분은 덱스터의 인생사를 알았다.

황태자의 사촌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전쟁터로 도망쳤던 소년. 모두가 실패했다고 믿었던 그 소년은 군단장과 공작이 되어 귀족 사회에 돌아왔다.

당연히 사람들은 덱스터를 주목했고, 그의 인생사를 일일이 파헤쳤었다.

사실, 덱스터의 나이인 스물여덟은 비센티움에서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든 덱스터가 결혼을 서두를 것이라 생각했던 몇몇 귀족들은 그에게 청혼서를 보내기도 했었지만, 하나같이 퇴짜를 맞았다.

덱스터는 공개적인 연애도 한 적 없는 데다, 저택에 왔던 청혼서도 모두 돌려보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가 결혼 계획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덱스터가 전쟁터에서 만난 여인을 약혼녀 삼아 데려왔을 때, 귀족 사회는 한 번 크게 들썩였었다.

그가 데려온 빨간 머리의 약혼녀는 단번에 큰 관심을 받았다. 덱스터가 저택의 보안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는 습관이 있어 다행이었지, 만일 그가 보통의 귀족들처럼 저택 대문만 걸어 잠갔다면 분명 누군가가 이리아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담을 넘었을 터다.

이리아는 그녀를 힐끗거리는 귀족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앞만 보았다.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퀼렘에서는 언제나 이보다 더 많은 관심과 시선을 받고 살았었으니까.

이리아가 시선을 피한 이유는 오직, 덱스터와의 대화 때문에 착잡해진 기분을 눈치 빠른 귀족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인사는 영지의 주인에게 올리는 것이 귀족 사회의 오랜 암묵적 규칙이었다. 카즈웰 4세의 대고모, 우즈웰 클로티어 영부인은 성 앞의 커다란 의자에 앉아 덱스터와 이리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덱스터가 부인의 손등 위에 제 이마를 살짝 맞대었다.

우아한 귀족의 인사였다.

“소문 속 제 약혼녀입니다.”

사실 우즈웰 클로티어는 덱스터가 알려 주기도 전에 이미 이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시어스에게 배운 대로, 이리아는 좌우 드레스 자락을 짚고 살짝 무릎을 구부렸다.

“씨시 힐데어입니다, 전하.”

루퀼렘에서 받았던 교육의 영향인지, 레이디의 인사를 처음으로 한 것 치고는 자세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우즈웰 클로티어는 비센티움 귀족 사회를 오래 겪어 봤기에, 그 누구보다도 말을 아낄 줄 아는 자였다. 그녀는 곧 새신부가 될 여인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덕담을 끝으로 덱스터와 이리아를 돌려보냈다.

이리아가 궁금했는지, 여타 귀족들은 그녀에게 말을 붙여 볼 생각으로 힐끔거렸지만 아무도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덱스터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그런 듯했다.

이리아는 베일 너머로 주변을 가볍게 훑은 후, 덱스터의 팔 안쪽을 살짝 잡아당겼다.

테이블 위에서 도수가 높지 않은 와인을 살피고 있던 그가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다른 분들께 인사는 하지 않을 생각이세요? 귀족들이 제 얼굴을 모른 상태로 결혼을 할 수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불편하지 않겠어?”

불편한 거로 따지면 네가 더 불편하거든? 이리아가 마음속으로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거야, 이리아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모두가 평민으로 아는 그녀는, 사실 평생토록 루퀼렘 성에서 상류층들을 상대해 온 그곳의 군주였으니까.

‘오히려 상류층을 상대하는 게 보통의 중산층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지…….’

덱스터가 발걸음을 내디디자마자, 귀족들은 급하지만 우아하게 옷차림을 정돈하며 그를 기다렸다. 모두가 자신을 힐끔거리는 걸 알아챈 이리아는 가십거리의 중심이 되었다는 걸 몸소 실감했다.

상대 귀족의 특성을 읽어 내는 건 루 아휜에게 배운 이리아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리아는 그들의 손에 끼워진 반지의 보석으로 부의 정도를, 입은 옷의 상태로 거느리는 하인들의 수를 파악했다.

루시어스는 제국에서 한가락 한다는 귀족들의 기본적 정보를 이리아에게 따로 귀띔해 주었었다. 그가 알려 준 정보들은 대부분 맞았지만, 관심사의 경우에는 종종 틀리기도 했다.

루시어스는 워랠 백작이 미용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리아는 그의 귀에 난 피어싱 자국을 보고, 그가 미용에 관심이 많으나 고지식한 귀족의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미용에 무관심한 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탬퍼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학문에 관심이 많아 다수의 소논문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전부 거짓말이다. 스탬퍼 부인의 손에는 오랫동안 펜을 잡은 이들이 가지는 특유의 굳은살이 없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덱스터가 상대했기에, 이리아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루시어스의 수업 중 틀린 점 찾기에만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이리아가 한창 파트리지 변경백의 지팡이를 살피고 있을 때, 그녀의 시야 안쪽으로 한 여자아이가 불쑥 들어왔다.

‘……음?’

이리아와 같은 새빨간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베일 너머의 그녀를 한참 빤히 쳐다보았다. 흔치 않은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가 신기한 듯싶었다.

당황한 파트리지 부인이 급하게 아이를 데려가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이는 루인보다도 어려 보였기에, 이리아는 괜찮다는 뜻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파트리지 변경백이 아이의 자그마한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공께서는 처음 보시죠? 제 조카딸입니다. 올해로 다섯 살이죠.”

“분명 아들이라고 들은 것 같소만, 딸아이였군.”

“머리를 짧게 잘라 두었더니, 사람들이 아들로 많이 오해하더랍니다. 그 때문에 다시 머리를 기르고 있죠.”

아이는 여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생김새가 판박이였다.

둥글게 묶은 아이의 빨간 머리가 참 귀엽다고 생각하던 이리아의 심장이 순간 쿵 가라앉았다.

‘아이는…… 부모와 닮아.’

아이는 부모와 닮는다. 결혼식을 올린 후엔 덱스터와 함께 밤을 보내는 걸 피할 수 없을 텐데, 그럼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리아가 아이를 낳는다면, 태어난 아이는 빨간 머리가 아닐 게 뻔했다.

‘만일 아이가 하얀 머리로 태어난다면? 루퀼렘인 특유의 노란색 눈을 가지게 된다면? 마법이라도 쓸 수 있다면?’

쿵쿵. 이리아의 심장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젠 그녀가 일평생 ‘씨시 힐데어’로 살 자신이 있다고 해도, 아이를 배면 끝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녀의 실수로 덱스터와 결혼을 한다고는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다. 임신이 두려울뿐더러, 태어난 아이를 엄마로서 사랑해 줄 자신이 없다.

루 아휜, 카즈웰 4세, 그리고 덱스터. 이 셋에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임신과 아이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덱스터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니 아이를 원할 게 뻔한데, 그런 그의 면전에 대고 임신을 할 수 없다고 어떻게 말하지?

덱스터와의 약혼은 거짓투성이인 억지 약혼이었다. 순탄치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으나, 아이에 관한 문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 가혹한 여신이시여…….’

이리아의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렸다.

덱스터와 약혼을 한 이후로, 두통을 달고 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다음 날이 사냥 대회이기 때문에, 저녁 소모임은 일찍 마무리되었다. 성의 하인들은 마차에 실었던 트렁크들을 가지고 둘을 침실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공.”

이리아가 내 방은 어디냐는 뜻을 담아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방문을 열어 준 후, 아무 말 없이 쌩 가 버렸다.

설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리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하…… 한방에서 함께 자는 거예요?”

“그럼, 저택에서처럼 따로 자는 줄 알았어?”

“공께서 안 알려 주셨잖아요! 당연히 저는 따로 자는 줄 알았는데…….”

“나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아서 별다른 말을 안 했던 건데.”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아 별다른 말을 안 했다고 하니 대꾸할 게 없었다.

하긴, 귀족들이 많이 모인 탓에 방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성안에서 이제 곧 결혼식을 올릴 남녀가 따로따로 침실을 쓴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덱스터 하워드와 침실을 함께 쓰는 건 싫다.

귀족 대부분은 자신들이 거느리는 하인을 따로 데려왔지만, 덱스터는 아니었다. 그는 종종 하인들에게 따로 휴가를 챙겨 주는 편이었고, 그 휴가 날이 바로 그가 저택을 비웠을 때였다.

우즈웰 클로티어 영부인은 따로 하인을 대동하지 않은 덱스터를 위해 성의 하녀들을 배정해 주었다. 하녀들이 이리아의 드레스 끈을 풀어내는 동안, 덱스터는 모른 척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이리아가 슈미즈(*chemise: 어깨에서 늘어뜨려 동부를 풍성하게 감싸는 허벅다리 길이의 여성용 속옷)를 입기 무섭게, 치자 향이 강하게 풍겨 왔다. 로샨이 최근 잠을 못 이루는 그녀를 위해 미리 향수를 뿌려 놓은 듯싶었다.

잘 준비를 끝낸 이리아는 슬그머니 침대 위에 몸을 올렸다.

덱스터가 신문을 접지 않은 채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야 해. 빨리 잠자리에 드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럼 하워드 공은 어디서…….”

“그새 잊었어? 나 군인이야. 군인들은 서서도, 앉아서도 잘 자.”

분명 자기가 먼저 침대에서 안 잔다고 한 거다. 이리아는 잘되었다는 마음에 곧장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그녀가 침대에 자리를 잡자마자, 방이 어두워졌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어둠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침대맡의 호롱불 하나는 남겨 두었다.

그러잖아도 불면증을 앓고 있는데, 덱스터까지 함께 있다. 제대로 잠들 수 없을 게 뻔했지만, 이리아는 두 눈을 꽉 감고서 꿋꿋이 양을 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양을 50마리째 세는 순간, 눈을 뜨고 말았다.

이리아가 살짝 고개를 들어 덱스터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덱스터는 소파에 곧게 앉아 팔짱을 낀 상태였는데, 아무리 봐도 편한 자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군부대에 있을 때 새벽 근무를 하며 저 자세로 잠든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온몸에 근육통이 와 며칠 동안 끙끙 앓았던 기억이 있다.

‘안 된다, 이리아 아델리어. 저 남자는 덱스터 하워드야. 겨우 저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돼.’

이리아는 못 본 척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이미 본 것을 못 본 척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고, 그녀는 결국 다시 부스스 일어나고 말았다.

“그냥 같이 자요, 하워드 공.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덱스터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는 흔들리는 호롱불 안쪽의 이리아를 잠시 응시하다가, 변함없이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이어 침대로 다가오는 덱스터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리아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후, 침대 모서리에 최대한으로 바짝 붙었다.

그녀는 아주 잠깐 덱스터가 그냥 의자에서 자게 둘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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