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109)

35화

덱스터는 연애의 방면에서는 눈치가 없었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리아가 자신을 신체적인 부분에서도,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리아가 마차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남몰래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동안, 덱스터도 적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둔한 이리아 아델리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빠르게 변하는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보다 조금 다른 이리아의 호흡을 느꼈다.

이상하리만치 불규칙한 호흡에, 덱스터의 미간은 곧장 일그러졌다.

상대를 위해 침묵을 고수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 조절해야 하는 법이다.

덱스터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이리아를 살피며 물었다.

“당신 어디 아파? 숨소리가 평소랑 다른 듯한데.”

넋을 놓고 있던 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두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코, 코르셋 때문인 것 같아요. 배가 조금 답답해서…….”

“뒤로 돌아봐.”

이리아는 우물쭈물하다가도 천천히 등을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등 뒤로 닿아 오는 덱스터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척추를 따라 이어져 있는 드레스 끈을 망설임 없이 풀어냈다.

함께 밤을 보냈음에도, 이리아는 덱스터에게 속옷 차림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그녀는 풀어 헤쳐진 드레스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슴께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코르셋을 몇 번 풀어 본 경험이 있는지, 덱스터는 무척이나 능숙하게 코르셋을 다뤘다. 이리아는 코르셋이 헐거워지자마자 막 숨통이 트인 아이처럼 거칠게 호흡을 내쉬었다.

덱스터는 크게 들썩이는 어깨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과 달리 참 작고 여린 어깨선을 허공에서 서서히 따라 그렸다.

“당신 어깨가 너무 앙상해.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거야?”

여전히 가슴께를 끌어안고 있는 이리아는 짧은 찰나에 거짓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리아도 몇 주 사이에 제 몸의 살이 모조리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눈썰미가 없는 그녀가 대충 봐도, 분명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 빠진 살이었다.

얼굴은 원래 살이 없었기에 빠진 게 티가 안 났는데, 드레스를 벗기니 앙상한 몸이 확 드러났나 보다.

이리아는 다시금 드레스 끈을 묶어 주는 덱스터의 손길을 느끼며, 마차에 나직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혹시 당신이 살이 빠진 게 나 때문이야?”

아주 짧은 순간, 이리아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겠지만, 감각이 예민한 덱스터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그가 완벽히 묶인 드레스 끈에서 손을 떼며 이어 말했다.

“당신은 내 감정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어. 나는 당신이 내 사랑에 보답해 주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고, 그걸 기대하지도 않아.”

“그, 그럼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 저에 대해 짝사랑만 하시겠다고요……?”

“그래.”

이리아가 자신의 감정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다는 말은, 곧 그녀에게 깊은 감정적 교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미와도 같다. 루 아휜을 피해 덱스터의 저택에서 지내야 하는 동시에 정체를 숨겨야 하는 이리아에게는 반가운 분명 반가운 말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건만, 고개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결혼을 한 후에도 자기 부인을 계속 짝사랑만 하겠다니, 그럼 앞으로 덱스터 하워드는 긴 인생을 살며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다는 건가.

능력도, 얼굴도 되는 남자가 대체 왜 자신의 낭만을 스스로 포기하려 하는지 이리아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리아가 어느덧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덱스터의 뒤통수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제가…… 제가 만일 훗날 하워드 공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요? 그래도 계속 그 마음을 가지고 계실 건가요?”

덱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리아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그의 입매를 보고 확신했다.

가지고 있을 거다, 덱스터 하워드는.

설령 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 해도, 그는 절대로 마음을 접지 않을 거다. 홀로 영원히 간직하겠지.

이리아가 양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는 또 한 번 덱스터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그럼 제가 어느 날 하워드 공에게 찾아와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하면, 그땐 절 놓아주실 건가요?”

“당신이 사랑하게 된 그 남자가 제대로 된 사람인지 확신하면…….”

덱스터가 천천히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이리아가 본 그의 두 눈은 몹시나 지쳐 있었다.

“이혼……해 줄게.”

이리아는 순간, 애초에 나와 결혼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힘껏 억눌러야 했다.

덱스터와의 결혼은 그녀가 저지른 일이었다. 이리아가 술에 취해 머저리처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정절’을 빼앗아 버린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설령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그녀는 덱스터와의 결혼생활에 책임을 져야 했다.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믿었던 ‘그날’ 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이리아의 머릿속에 천천히 되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당황한 덱스터의 셔츠를 벗겨 내는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거칠게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날, 대체 왜 나는 덱스터 하워드의 막사에 들어갔던 걸까. 대체 왜 지독하게 싫어하던 그와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냈던 걸까!

이리아는 어김없이 ‘그날’ 밤을 후회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마법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만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진작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었을 터다.

형식적인 부부 생활, 그리고 한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은 둘 다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보다도 최악이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이리아는 이미 그와의 결혼생활에 지쳐 가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도, 덱스터 하워드를 위해서도 그의 감정은 하루빨리 끊어 내야 해.

이리아가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일렀다.

“절 좋아하지 마세요. 접으세요, 그 마음.”

“안 돼. 못 접어.”

“하워드 공이 그 마음을 계속 가지고 계시면 우리 둘 다 힘들어요! 잘 아시잖아요!”

“못 접는다니까.”

“하워드 공!”

“당신,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못 접어! 내 힘으로는 도무지 이 감정을 버릴 수가 없단 말이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이를 깨달은 이리아는 뒤로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덱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이리아에게 언성을 올려 버렸다는 사실을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는 한참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작게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덱스터는 아주 긴 시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울분을 참기 위해 한참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이내 제 머리를 감싸고선 반쯤 절규하듯 토로했다.

“전쟁터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도 그만두려고 수십 번 노력했어.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내가 이 감정을 버리기 위해서 어떤 멍청한 개짓거리들을 했었는지! 그런데, 그 어떤 짓을 저질러도 이 감정은 언제나 내게로 다시 돌아오더라. 분명 다 베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더라……!”

덱스터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 내고선,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리아는 그가 호흡을 가다듬는 내내,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평정심을 잃어버린 덱스터를 벌써 세 번째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덱스터가 숲에서 마물을 상대하고 있던 그녀를 만났을 때였고, 두 번째는 전쟁터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던 바로 그때.

감정을 버리기 위해 고생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덱스터의 얼굴 위로 고통이 들어섰다. 그러잖아도 잔뜩 틀어졌던 그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이리아와 마주했을 때 더더욱 일그러졌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창백해진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슬피 웃어 보였다.

“멍청하기 짝이 없지. 내가 이렇게 아픈 지금도, 난 바보처럼 당신의 기분만 걱정하고 있어…….”

이리아는 이번에는 덱스터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덱스터는 저택에서 만지지 못했던 그녀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훑은 후에, 손을 거두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사랑시를 노래하는 음유시인들은 모두 등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내가 스스로 그 등신이 되어 버렸군.”

덱스터가 차가운 조소를 내뱉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잃어버렸던 평정심이 뒤늦게 돌아온 듯했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손길이 잠시 스쳤던 뺨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덱스터가 제 사랑을 겉으로 드러내도, 정체를 숨긴 그녀는 절대로 그의 마음에 보답할 수 없었다. 빨간 머리 이리아에게 사랑의 시도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였다.

이리아는 사랑을 잘 몰랐지만,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돌아앉은 덱스터의 등이 일순간 몹시나 지쳐 보였다. 하지만 차마 그를 위로해 주지 못한 이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극심한 피곤을 느꼈음에도, 이리아는 긴 이동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졸지 않았다. 도시가 바뀔 때마다 휙휙 변하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몸을 일으켰다.

마차는 베니즈헴의 영주, 카즈웰 4세 대고모의 성 앞에서 멈추었다. 덱스터는 성에서 나온 사용인들이 오기도 전에 먼저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그의 움직이는 두 발만을 보고 있었다. 아직 제 발로 직접 비센티움의 마차에서 내려 본 적 없기에, 어떻게 내려가는지 순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덱스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이리아의 잇새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이리아가 내려 달라는 뜻으로 어깨를 밀어냈으나, 덱스터는 도리어 그녀를 품속에 꽉 껴안았다.

이리아의 머리 위에서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제발 나한테 그만두라고 하지 말아 줘. 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미 내 모든 것이 되어 버렸어. 이 마음마저 잃어버리면, 내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덱스터는 마차에서부터 차갑게 식었던 이리아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문지른 후, 그녀를 내려 주었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감정의 폭이 깊은 줄은 어느 정도 감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삶의 유일한 이유라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감정이었다.

착잡해진 이리아는 장갑을 최대한 높이 끌어 올리고선 왼손을 덱스터의 팔뚝에 올렸다.

성에 일찍이 도착한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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