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07.
덱스터의 마음을 알았음에도, 둘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변할 것도 없었다. 이리아는 이미 덱스터의 약혼녀였고, 그와의 결혼을 앞둔 새신부였으니까.
하지만 굳이 변한 부분을 하나 꼽자면, 그건 바로 둘 사이의 거리였다.
신체적 부분과 정신적 부분에서, 이리아는 전보다 더욱 덱스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알게 된 덱스터의 감정이 부담스러워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리아는 그의 감정이 부담스럽다기보단 두려웠다.
이름도, 모습도, 과거도, 국적도 가짜. 가짜에 둘러싸인 그녀는 덱스터가 혹여 진실을 알아 버릴까 봐 걱정되었고, 진실을 알았을 때 변해 버릴 모습이 무서웠다.
이리아는 ‘정절’을 빼앗은 책임을 지라는 말 때문에 약혼했던 것이지, 그의 고백을 듣고 약혼을 한 게 아니었다. 고백을 한 덱스터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깊은 정신적 교류를 요구할 텐데, 그럼 정체를 들키는 일도 시간문제였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부부처럼 살가운 남편 흉내만 내는 줄 알았는데. 이런 감정 따위는 고민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평생토록 정체를 숨기고 살 수 있다던 이리아의 자신감이, 덱스터의 진실한 마음 한 조각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미 약혼한 사이였기에, 그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끔찍했다.
마음을 준 만큼, 배신감도 큰 법이다. 이리아는 정체를 들켰을 때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덱스터 하워드가 날 죽일 거다. 모든 게 거짓이었고, 내가 루퀼렘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이 심장에 총구를 겨누겠지.
밖에서 그녀를 쫓고 있는 루 아휜도, 사냥 대회에 초대한 카즈웰 4세도, 마음을 고백한 덱스터도 모두 하나같이 이리아를 힘들게 했다. 세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두고 공놀이를 하는 것만 같다.
이리아는 창틀에 힘없이 걸터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세 마리의 휘파람새가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너희들은 참 좋겠구나…….’
나도 처음부터 새로 태어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저렇게 예쁜 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걱정 없이 날아다닐 수 있었을 텐데.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하녀들은 넋을 놓은 이리아를 살피며 숙덕거렸다.
결혼을 앞둔 새신부는 기대감에 부풀어야 정상이거늘, 그들의 아가씨는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만 했다.
“아가씨.”
이리아가 힘없이 로샨을 돌아보았다.
이리아의 초점 없는 눈망울을 알아챈 로샨은 그녀에게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욕조 물을 받아 두었어요.”
“아…….”
이리아가 뒤늦게 미안하다고 덧붙이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며칠 새 얼마나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그러잖아도 말랐던 이리아는 이제 앙상했다. 툭 치면 맥없이 풀썩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몸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즈웰 4세의 사냥 대외는 끝내 오고야 말았고, 이리아는 대회 참석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몸단장을 해야 했다.
이리아가 욕조에 들어가자마자, 하녀들은 준비했던 향유와 꽃잎을 쏟아부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냄비 요리 안에 향신료를 들이붓는 요리사와도 같았다.
이리아는 자신이 냄비 속의 껍질 벗긴 닭과 다름없다는 사실에 실소를 터뜨렸다.
누구를 위해서 정성스레 준비되고 있는 음식인 걸까. 덱스터 하워드? 루 아휜? 아니면, 카즈웰 4세?
‘오늘은 아마도 카즈웰 4세겠지…….’
덱스터와 닮은 카즈웰 4세의 모습을 떠올리기 무섭게, 이리아의 심장은 거칠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정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검은색 눈동자가 끔찍했다.
이리아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불투명한 물 아래서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여신에게 기도를 하는 자세였다.
루퀼렘 성을 탈출한 이후로 이리아는 단 한 번도 여신에게 기도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는 몹시나 오랜만에 여신을 찾은 것이었다.
이리아는 여신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제발, 카즈웰 4세가 절 알아보지 못하게 해 주세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을 기억해 내지 못하게 해 주세요.’
여신은 인간의 기도를 이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기도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리아는 평소 불편하다는 이유로 코르셋을 입지 않았고, 하녀들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사냥 대회가 제국의 공식적 행사라는 이유로 이리아는 꼼짝없이 코르셋을 차야 했다.
하녀들은 평민 출신인 이리아가 비센티움의 콧대 높은 귀족들 사이서 주눅 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코르셋을 최대한으로 조였다. 이리아의 앙상해진 몸은 다시금 부드러운 여성의 곡선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코르셋 끈을 단단히 조이자마자, 하녀들은 곧바로 준비한 드레스를 가지러 바삐 움직였다.
비센티움에서 곧 결혼식을 올릴 새신부는 일부러 하얀 드레스를 입지 않는 풍습이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결혼식장에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아는 결혼식이 콱 망해 버리라는 마음에 온통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하지만 하녀들이 가져온 드레스는 하얀색과 거리가 멀었다.
드레스는 진하디진한 녹색이었다.
“흔히 녹색의 드레스는 입는 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하죠. 용기를 가지고 당당하게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라는 의미에서, 귀부인들은 자신의 딸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 언제나 녹색의 드레스를 입혔다고 해요.”
로샨이 속삭이며 이리아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거울 속 이리아는 평소와 달리 무척 화려한 화장을 하고, 또 그만큼 화려한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로샨은 아름답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리아는 자신의 모습이 생기 없는 밀랍 인형 같기만 했다.
이리아가 건너 들은 바로는, 덱스터는 몸단장을 자기 혼자서 한다고 한다. 십 대 시절부터 군대 생활을 오랫동안 한 탓에,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몸을 만지는 걸 극히 꺼린다나.
‘이런 복잡한 준비를 혼자서 하다니,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준비 과정이 더 쉬운가? 나는 절대로 혼자서는 못 할 것 같은데…….’
이리아는 착잡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방을 나섰다.
하녀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 머리 위에 투명한 베일을 씌워 주었다. 이리아는 조금이라도 얼굴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덱스터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자세를 바로 했다.
이리아는 계단 위에서, 덱스터는 계단 아래서 서로를 아주 긴 시간 마주 보았다.
공식적인 연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덱스터는 오랜만에 군단장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제복 가슴팍에 주렁주렁 달린 금장들은 지금껏 그가 얼마나 많은 전쟁터를 거쳐왔는지 손수 알려 주었다.
덱스터는 투명한 베일 뒤로 비치는 이리아의 얼굴을 초점이 반쯤 풀린 눈으로 응시했다.
그 행동이 이제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이리아는 화끈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덱스터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지만, 하녀들은 어김없이 이리아를 그에게로 인도했다. 이리아는 로샨이 놓아 주는 대로, 꼼짝없이 덱스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야만 했다.
덱스터가 베일 너머로 비치는 이리아의 작은 관자놀이를 쓸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 바로 직전, 이리아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덱스터가 보라는 뜻에서 일부러 크게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덱스터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었다. 주위에 있던 하녀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리아는 고개를 푹 수그려 전부 모르는 척했다.
덱스터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거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가 등을 돌리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출발하지.”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둘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카즈웰 4세의 사냥 대회는 그의 대(大)고모가 다스리는 비센티움 동남쪽 영지에서 열린다.
영지의 이름은 ‘베니즈헴’. 흔치 않게 고대어로 지어진 이 이름은 ‘부유한 여인’이라는 의미이다. ‘부유한 여인’이라는 뜻을 가진 땅인 만큼, 베니즈헴은 비센티움 내에서 가장 부자인 마을 중 하나였다.
덱스터의 저택에서 베니즈헴까지는 다행히 그다지 멀지 않아, 퀸터를 선두에 두고 4시간 정도 말을 이끌면 도착할 수 있다.
이리아는 덱스터와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베일을 걷은 후, 창에 얼굴을 기댔다.
사냥 대회에 처음 참가하는 이리아를 위해, 루시어스가 수업 시간에 짬을 내 미리 대강의 설명을 해 주었다.
일단, 사냥 대회는 황궁에서 키우는 보아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난 때부터 정확히 38일 후에 열린다. 보아뱀이 겨울잠에서 깬 후 38일 즈음이 봄을 맞은 야생 동물들이 왕성하게 활동활 시기이기 때문이라나.
비센티움 내에서 사냥은 오로지 돈이 많고 여유로운 기득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여가 생활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사냥 대회는 귀족들만이 참여하는 놀이였으나, 일을 하지도 않는 귀족들이 영지에 침입해 동물들의 씨를 다 없애 버린다는 불만이 폭주해 평민도 원한다면 참여할 수 있도록 규칙을 개정했다.
루시어스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사냥 대회의 참가자 중 3분의 1 이상은 권력이 없는 평민층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껏 평민이 우승한 적은 단 한 번이지만, 전문 수렵인들이 많아 언제나 만만찮은 성적을 거둔다고도 덧붙였다.
10년 전에 평민의 참여가 허가된 이후로, 사냥 대회는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비센티움의 대표적 연례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가족끼리 나들이 겸 귀족 구경을 오는 평민들이 많아, 준비한 좌석들은 언제나 가득 찬다.
루시어스는 사냥 대회의 지난 우승자들도 귀띔으로 일러 주었는데, 덱스터는 총 일곱 번 참가하여 그중 세 번이나 우승을 거두었다. 그가 오로지 손도끼로만 불곰의 목을 쳐 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리아는 그만 두 귀를 막고 말았었다.
베니즈헴에는 총 3일 동안 있어야 한다. 첫날은 귀족들이 서로 인사만 하는 날이었고, 둘째 날은 대횟날, 셋째 날은 이른 아침에 저택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그 끔찍한 곳에서 무려 3일을 버텨야 한다니…….’
이리아는 옆에 앉아 있는 덱스터가 듣지 못하도록 조그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이미 그 영지가 참 끔찍하게 생긴 곳이겠다며 생각하고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