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는 이리아와 눈을 마주친 후에도, 한참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희끄무레해진 것이,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이리아가 덱스터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 때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퀸터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당신을 군부대에서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어.”
아. 이리아가 저도 모르게 품속의 조랑말을 돌아보았다.
덱스터의 눈에도 닮은 거다, 하늘로 간 그녀의 틸다와 마야가. 그는 마야를 쓰다듬는 이리아를 보고, 군부대에서 틸다를 쓰다듬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린 거였다.
‘덱스터 하워드는 자신의 군마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으니, 아마 내가 이 조랑말에게 이름을 준 이유도 이해해 줄 거야…….’
이리아가 아직 가늘고 포슬포슬한 마야의 갈기를 빗어 내리며 속삭였다.
“이 아이에게 마야라는 이름을 줬어요. 이렇게 예쁜 조랑말이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속상해서요…….”
“잘 어울려.”
이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이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는, 입가에 제법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예쁜 이름이야.”
이리아가 그에게 작게 마주 웃어 주었다. 덱스터가 자신의 말에게 제멋대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비난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마야의 이름을 허락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살짝 좋아진 이리아는 마야의 갈기를 격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하워드 공은 왜 퀸터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건가요? 다른 말들은 하나같이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던데, 퀸터만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게 조금 궁금해서요.”
“내가 안 붙였어. 퀸터란 이름도 당신이 붙여 준 거야.”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끝이 흐려지며, 목소리 속의 웃음기가 차츰 사라졌다.
어느덧 미소를 거둔 이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덱스터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답도 던져 주지 않았다.
방금 하신 말씀,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이리아가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떼는 순간, 덱스터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이리아의 질문은 목 너머로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덱스터가 마구간으로 돌아가려는 하녀들에게 가벼이 손짓했다. 퀸터와 마야는 두고 가라는 뜻이었다.
장난꾸러기 퀸터는 하녀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요란스레 둘의 곁을 맴돌았다. 그는 어린 마야에게 놀자는 듯 달라붙기도 했다가, 이리아의 어깨 위에서 투레질하기도 했다.
덱스터가 잠시 놓았던 퀸터의 고삐를 다시 쥐며 나직이 내뱉었다.
“퀸터가 당신을 등 뒤에 태우고 싶은가 봐.”
“하지만…… 하워드 공은 제가 퀸터 등에 타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안 싫어해. 싫어할 리가 없지.”
덱스터가 겉옷을 벗고선 이리아의 허리춤에 단단히 둘러 주었다. 그 후, 그녀를 번쩍 들어 퀸터의 등 위로 올렸다.
모든 과정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서, 이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퀸터의 등 위에 올라 덱스터의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리아는 퀸터의 등에 올라 보는 세상을 깨나 좋아했다. 퀸터의 등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작고 아기자기했다. 마치 그녀가 하늘을 낮게 나는 새가 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하늘에 닿고 싶어, 이리아는 최대한 높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덱스터는 왼손에는 마야의 고삐를, 오른손에는 퀸터의 고삐를 잡고선 그들을 앞으로 이끌었다. 두 말은 투레질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덱스터를 따라갔다.
어느덧 세상에는 저녁이 찾아와, 진홍빛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리아는 노을 위에 진 까만 새들의 그림자를 눈으로 따라가며, 나직이 울려 퍼지는 덱스터의 목소리를 들었다.
“과거를 생각하니 갑자기 물어보고 싶어지는군. 당신이 본 내 첫인상은 어땠어?”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리아는 지금까지도, 덱스터를 만났을 때의 그 두려운 감정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마법을 혐오하여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군단장, 덱스터 하워드는 군인들을 통솔하는 자답게 거대하고 험악했다. 숲에서 나오는 그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이리아는 눈도 제대로 못 맞추었었다.
“제 눈에 하워드 공은 엄청나게 거대했고, 그래서 다가가기 어려웠어요…….”
사실은 그가 루퀼렘을 싫어한다는 사실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웠던 거지만. 이 진실은 평생토록 알려 줄 수 없겠지.
덱스터와 시선도 제대로 못 맞췄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리아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낸 셈이었다. 지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을뿐더러, 먼저 대화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는 덱스터 하워드와 약혼자의 관계가 되고, 이렇듯 함께 노을이 진 정원을 걸을 줄 상상조차 못 했었는데…….’
역시,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이었다. 이리아는 새삼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번에는 이리아의 차례였다. 그녀가 덱스터에게 물었다.
“하워드 공이 본 제 첫인상은 어땠나요?”
“내 눈에…… 당신은 너무나도 작고 여렸어. 설령 실수로라도 힘을 주면 으스러질 것 같았기에, 난 당신의 몸을 만질 때마다 심혈을 기울여야 했지.”
덱스터의 너털웃음이 고요한 저녁 하늘에 퍼져 나갔다. 그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후, 스러져 가는 노을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느덧 덱스터의 목소리에는 과거의 향수가 어려 있었다.
“도토리만 한 체구 때문인지, 아니면 진한 붉은색 머리카락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유난히 더 눈에 띄었어. 아무리 보지 않으려고 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시선이 이미 당신을 따라가고 있었지.”
“누, 눈에 잘 띄는 건 하워드 공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 내가 눈에 잘 띄어서, 당신이 날 피하기도 그리 쉬웠나 보군.”
이리아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덱스터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퀸터의 등에 올라 있는 탓에 보이는 건 그의 새까만 정수리뿐이었다.
‘……덱스터 하워드도 알고 있었구나. 군부대에서 내가 일부러 그를 피해 다녔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들킨 기분이 들며, 괜히 미안해졌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살피기 위해 그의 정수리를 빤히 응시했다.
덱스터는 눈초리 끝으로 그런 이리아를 힐끔거리고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난 당신 뒷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꽤 괜찮았거든.”
이리아는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군부대에서의 일을 미안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어린 마야에겐 산책길이 조금 버거웠는지, 그녀가 거칠게 콧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덱스터가 마야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조금 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어. 언제 말을 해야 좋을지, 그때 말하면 당신이 내 마음을 믿어 줄지…….”
노을은 빠르게 저물었다. 주홍빛의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는 당연히 달이 차올랐다. 달은 둥그스름하고 예쁜 보름달이었다.
밤이 찾아오자마자 들새들의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이리아는 뒤늦게 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이 그녀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보였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정원의 길도 끝이 난 지 오래였다.
둘은 이제 이리아는 단 한 번도 온 적 없는 조그마한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너……너무 멀리까지 온 것 같아요, 공.”
“일부러 멀리 온 거야. 후원 내부에선 이곳이 별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장소거든.”
하워드 대부인이 이곳까지는 꽃을 심을 여력이 없었던 건지, 언덕에는 초록빛 풀만이 가득했다. 이리아는 왠지 이 언덕이 군부대에서 별을 보았던 그곳과 비슷하다고 느끼며, 덱스터를 돌아보았다.
덱스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이리아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작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별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리아가 찬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군부대에서만큼은 아니었지만, 새까만 밤하늘에는 별이 무수히 흩뿌려져 반짝거리고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리아는 잠시 멍하니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언덕 아래 서 있던 덱스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빛이 바랬지만, 언덕 아래에 서 있던 그의 모습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밤하늘 아래서, 그는 처음에는 길 잃은 소년의 얼굴을 지었다가, 그다음에는 분노어린 표정을, 그다음에는 울음을 터뜨리려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남자의 얼굴을 했었다.
이리아는 당시 덱스터가 왜 그런 표정들을 지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저택에 온 이후로, 덱스터는 필요치 않은 상냥함을 보였다.
쓸데없이 금반지 위에 입을 맞추고, 뺨에 몇 번이고 다정하게 키스했다. 춤에 어색한 그녀를 위해 발등을 내어 주고, 밤늦게까지 뒤척인 날에는 꽃다발과 함께 찾아왔다.
이리아의 눈앞에 사격장에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덱스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쉬운 길을 옆에 두고, 계속해서 빙빙 돌아가기만 하는 그녀를 기다려 주겠다는 눈빛이었다.
‘지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리아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덱스터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푹 수그렸다.
들새의 울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언덕 위에서, 이리아의 물음이 잔잔히 퍼져나갔다.
“하워드 공. 호, 혹시 저를 연모하세요……?”
잠시 긴 정적이 흘렀다.
이리아의 손톱이 옷자락을 넘어 손바닥을 파고들 때 즈음, 덱스터가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 질문에 지금 대답하면, 내 마음을 믿어 줄 거야?”
이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덱스터는, 처음으로 밤하늘의 별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는 이리아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떠올리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연모했었고, 연모했어. 그리고 여전히 내 마음은 그대로야.”
대답을 듣자마자, 이리아의 머릿속에 덱스터의 지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라이터를 쥐고 있던 날 바라보던 덱스터 하워드. 틸다가 죽은 그날, 시체를 전부 태워 버리라고 명령하던 덱스터 하워드…….
퀸터에서 떨어진 나를 잡아 주었던, 요한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가던 덱스터 하워드. 마물의 앞에 쓰러져 있던 날 구해 주었던, 모닥불 앞에 앉아 내 손톱을 깎아 주었던 덱스터 하워드.
‘그 언덕 아래서 날 바라봤던 것도, 마지막 날에 소리를 질렀던 것도, 전부 다 나를 좋아해서…….’
울컥. 갑자기 정체 모를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며, 이리아의 두 눈가가 새빨개졌다.
군부대에서의 세월 내내, 그리고 이 저택에서까지, 덱스터가 보였던 모든 행동을 너무 오랜 시간 제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포시 헤집고 지나갔다. 바람결을 타고, 덱스터의 마지막 문장이 어슴푸레 들려오는 듯했다.
당신을 사랑해.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