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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3/109)

32화

이리아는 지금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사실이 덱스터 안에 없던 용기를 만들어 냈다.

덱스터는 거칠게 요동치는 목소리로, 꼭꼭 숨겨 두었던 오랜 비밀을 끄집어냈다.

“마지막으로 비밀 하나 더 알려 줄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양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의 굳은살을 무참히 파고들었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덱스터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선, 얼굴의 온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이리아를 고통스럽게 응시하다가,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 남몰래 실소를 터뜨렸다. 이리아가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둠 때문에 불안해진 이리아는 급기야 허공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덱스터가 그녀를 위해 향초를 켜며 낮게 내뱉었다.

“나, 사실 루퀼렘어를 할 수 있어.”

이리아가 다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덧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서…… 설마요.”

“진짜야. 10여 년 전에 루퀼렘 국경선에서 보초를 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배웠지.”

덱스터의 입에서 ‘루퀼렘’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그의 반응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이리아는 샛노란 빛무리가 일렁이는 덱스터의 얼굴을 몰래 살폈다. 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비센티움인이 루퀼렘어를 배우는 건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이리아는 순간, 덱스터가 루퀼렘을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이리아는 다시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몸을 숨겼다. 덱스터가 하얀 베개 위에 펼쳐진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어때, 기분이 좀 나아졌어?”

“네…….”

“다행이군.”

예상외로, 덱스터와의 대화는 기분 전환에 꽤 효과가 있었다. 이리아는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리고선 향초를 끄는 덱스터를 힐끔거렸다.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따스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냥 대회에서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당신이 두 눈 감고 있어도 모르는 척할게.”

덱스터는 잘 자, 라는 말과 함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떠났다.

홀로 남은 이리아는 일전에 그랬듯,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든 그녀는 무척이나 선명한 꿈을 꿨다. 사냥 대회와 관련된 꿈이었다.

꿈속 사냥 대회는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웠다. 동물 한 마리 죽지 않았고, 카즈웰 4세도 이리아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이리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래서 아침이 되어 꿈에서 깼을 때, 이리아는 끝내 참아 왔던 눈물 한 방울을 뚝 흘리고 말았다.

꿈은 꿈일 뿐이었다. 현실은 절대로 꿈처럼 평화롭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하루가 지날수록 날은 따뜻해졌고, 그만큼 이리아의 옷차림은 속수무책으로 얇아졌다. 하녀들은 인제 외투 대신 어깨에 케이프를 둘러 주었으며, 프릴 드레스가 아닌 셔링(*shirring: 천을 꿰맨 후 오그려 입체적으로 주름을 잡는 수예 방법) 드레스를 입혀 주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오랜만에 이리아의 빨간 머리에 꽃장식을 달아 줄 때, 루인이 쫄래쫄래 들어왔다. 그는 정체 모를 봉투 하나를 그러쥐고 있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전해 드리래요.”

봉투는 이리아의 앞으로 온 것이었다.

이름 없는 봉투였지만, 이리아는 단번에 발신인을 알아차렸다. 콘라드 메이필드가 보냈을 테지.

그녀는 봉투를 받자마자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좋지 않은 소식들만 줄줄이 이어지던 요즘, 오랜만에 만난 사소한 기쁨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리아는 가지고 있던 사탕들을 모조리 루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루인은 받은 사탕을 곧장 하나씩 까 먹으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하녀들은 그가 복도에 툭툭 던져둔 사탕 껍질을 치우기 위해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고.

치장을 끝내자마자, 이리아는 창틀에 걸터앉아 콘라드가 보낸 봉투를 뜯었다. 봉투 속에는 편지와 한 다발의 엽서가 들어 있었다.

<안녕, 장군님.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네가 생각나서 오랜만에 편지를 써 본다. 감동한 거 다 알아. 웃고 있는 거 다 보여.

이 잘생긴 오빠는 지금 아즈웬국의 작은 마을에서 미모를 빛내 주고 있단다. 여행하느라 미용을 할 틈이 없어서 머리가 조금 덥수룩하지만, 내 얼굴에 이 정도는 흠도 아니지. 지나가는 여자들이 날 쳐다볼 때마다 인사를 해 주느라 왼팔이 빠질 것만 같다, 씨시. 이거 봐, 또 쳐다보잖아. 너무 매력 있게 태어나도 문제라니까!

이봐, 씨시. 너 덱스터 하워드와의 결혼 준비는 순조롭게 하고 있냐? 설마 벌써 파투 난 건 아니지? 결혼식 청첩장이 날아오면 비센티움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올 기미가 안 보이니 이 오빠는 점점 두려워진다. 이러다가 평생 비센티움으로 못 돌아가는 거 아니겠지? (농담이야. 진짜로 파투 났다면, 덱스터 하워드 그 새끼가 질질 짜는 꼴이라도 보기 위해서 당장 짐 싸고 달려가야지!) 결혼식 준비 중이라면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만일 파투 났다면 네가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라. 부디 이 편지도 받을 일 없기를.

아, 참. 봉투 속에 들어 있는 건 여기저기서 산 엽서들이야. 싸구려니까 소중히 간직하도록.

P. S. 이곳에는 빨간 머리가 정말 많아. 여인들의 뒷모습을 보고 가끔 너인 줄 착각한다니까? 다들 염색 좀 했으면.>

이리아는 짤막하게 붙어 있는 추신을 보자마자 슬픈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 콘라드 메이필드는 영원토록 모를 것이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실은 하얗다는 사실을.

이리아는 동봉된 엽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엽서들은 모두 여행자들을 위한 기념품 같았는데, 바닷가들이 많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콘라드는 대륙의 해안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는 듯했다.

널찍한 바닷가가 그려진 엽서, 아기자기한 풍차들과 푸른 하늘이 그려진 엽서, 길거리의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그려져 있는 엽서까지. 이리아는 어느덧 붉어진 눈시울로 싸구려 엽서들을 넘기고 있었다.

‘언젠가 진짜 자유를 가지게 된다면 나도…….’

이리아는 엽서의 그림들을 손끝으로 일일이 따라 그렸다. 엽서들의 거친 질감 위로 바다의 소금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창틀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그녀는 협탁의 가장 위 서랍장을 열었다. 그곳에는 라이터와 콘라드에게서 왔던 첫 번째 편지가 들어 있었다.

새로 받은 엽서들과 편지도 이내 자리 서랍장 한쪽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리아는 우두커니 선 채 그녀의 부적들을 아주 긴 시간 응시하다가, 서랍장을 닫았다.

활짝 열린 창밖에서 문득 하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 사이에는 간간이 말의 투레질도 뒤섞여 있었다.

이리아는 저택 앞마당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있는 말들을 확인하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말 오랜만에, 퀸터가 보고 싶었다.

말도 재산의 일종이기에, 흔히 비센티움의 귀족들은 저택에 말들을 많이 키운다. 덱스터도 마찬가지로 수십 마리의 말을 소유했지만, 여타 귀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말을 쉽게 사고팔지 않았다.

덱스터가 가진 말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주인을 잃은 군마들이었다. 사람과의 의리가 깊은 군마들은 원래의 주인이 죽은 후, 새로운 주인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을 태울 수 없는 말은 곧 고기가 된다. 주인을 잃은 군마들은 대부분 고기가 될 운명을 앞두고 있었고, 이를 지켜볼 수 없던 덱스터가 거금을 주고 군마들을 모조리 사들인 것이다.

이리아는 다 엇비슷하게 생긴 군마 중에서도 곧잘 퀸터를 찾아냈다. 그녀가 퀸터의 새까만 콧잔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말들을 모두 풀어 놓으셨네요?”

“네. 주인님께서 군마를 가둬 키우는 건 좋지 않다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마구간 문을 열어 주라 하셨거든요. 보통은 뒷마당에서만 돌아다니는데, 오늘은 날이 좋아서인지 여기까지 나왔네요.”

로샨은 문장을 끝내자마자 저 멀리서 꽃을 뜯어먹기 시작한 말들에게로 달려갔다. 몹시나 급박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어차피 막을 수 없을 텐데. 군부대에서 군마들의 무시무시한 식성을 직접 봐 온 이리아는 곧 엉망이 되어 버릴 정원을 향해 미리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향하는 퀸터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갔다.

마치 이리아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는 듯, 퀸터는 거대한 군마들 사이에서 한 조랑말을 찾아내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조랑말은 죽은 틸다만큼이나 새하얬다. 순간, 이리아의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앉았다.

‘……틸다랑 닮았어.’

퀸터의 옆에 있으니 더 그랬다. 순식간에 마음이 착잡해진 이리아는, 멋모르고 다가오는 조랑말의 이마를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틸다도 날 발견하면, 예쁜 꼬리를 살랑이며 이렇게 다가오곤 했는데.

조랑말은 무뚝뚝했던 틸다와 다르게, 엄청난 애교쟁이였다. 그녀는 이마를 어루만지는 이리아의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더 해 달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애교가 많은 동물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이리아는 조랑말에게 맥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주고 말았다.

그녀가 퀸터와 조랑말에게 고삐를 채우러 온 하녀들에게 질문했다.

“이 말은 이름이 뭔가요?”

“이름이요?”

하녀들은 하나같이 이리아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이는 이리아였다. 아주 짧은 찰나에, 그녀는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았다.

퀸터에게 고삐를 채우는 하녀가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말에게 이름을 붙여 주시나 봐요. 독특하시네요.”

“이 검은 아이의 이름은 퀸터잖아요. 그럼 저 조랑말도 분명 이름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주인님께서는 이 새까만 군마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하셨으니까요. 특별히 이름을 줄 만도 하시죠.”

이리아는 하녀의 말을 이해하고, 뒤늦게 정원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다시 말들을 마구간으로 데려가기 위해 고삐를 잡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의 시선을 잡아놓을 때 휘파람이나 손뼉을 쳤지, 절대로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군부대에 있을 때도, 이리아는 말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콘라드 메이필드도 그의 매에게는 이름을 불러 주었지만, 말의 이름은 불러주지 않았었다.

그래, 불러 줬을 리가 없다. 애초에 그들은 불러 줄 이름조차 없었으니까.

비센티움 사람들은 원체 말에게 이름을 붙여 주지 않는다. 비센티움이 왕국이었던 시절에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도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말의 가치가 재산과 고기로 환원되면서 이름 붙이기를 그만두었다.

전쟁에 나가는 말들은 금방 죽고, 피난하러 가는 이들은 타고 간 말들을 돈으로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정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였다.

생명체는 이름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존재를 인정받는다. 비센티움의 오랜 풍습을 잘 모르는 이리아는, 이 수많은 말들이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틸다를 닮은 이 하얀 조랑말도 자신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까. 이리아는 쫑긋 솟아 있는 조랑말의 귀 사이를 한참 간지럽혀 주었다.

퀸터에게 고삐를 채운 하녀가 자리를 뜨자, 그녀가 조랑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마야’야. 저택 사람들은 불러 주지 않겠지만, 내가 그만큼 더 많이 불러 줄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마야는 거친 투레질을 하고선 이리아의 가슴팍에 콧잔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틸다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모습에, 이리아는 그녀의 목덜미를 두 팔 가득 안아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포슬포슬한 갈기가 스쳤다. 태어난 지 1년이 넘지 않은 어린 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갈기였다.

“아직 어리구나…….”

전쟁에 나가지도 않은 아이가, 대체 어떠한 연유로 이 저택에 오게 된 걸까. 이리아는 눈물이 촉촉하게 젖은 마야의 까만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어린 조랑말과 한참 눈을 맞추고 있을 때, 문득 뒤에서부터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퀸터의 고삐를 잡고 서 있는 덱스터가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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