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얼굴을 놓아줬기에 그의 손길에서 자유가 된 줄 알았건만, 다시 잡혀 버렸다. 이리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붙잡힌 손과 덱스터를 번갈아 쳐다봤다. 덱스터는 왜인지 몽롱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웃는 모습, 단 한 번이라도 거울로 본 적 있어?”
“아, 아뇨.”
“그럼 오늘 한 번 봐봐.”
덱스터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리아는 바람결에 너무 예뻐, 라는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덱스터는 키스를 남긴 후에도 이리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강하게 손깍지를 껴 왔다.
카즈웰 4세가 오기 전 함께 정원 산책을 할 때도 잡았고, 연회장에서 춤을 출 때도 잡았었다. 하지만 그때는 단순히 손바닥을 맞댄 정도였고, 이렇게 깍지를 끼지는 않았다.
사냥터에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리아는 잡힌 손에 온 신경이 가 있었다. 분명 그녀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한 바가지 흘러나왔을 텐데, 덱스터는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
이리아는 그녀가 조금 전에 꺾을 뻔했던 정원의 튤립을 힐끔거렸다. 튤립은 티 하나 없이 선명한 붉은빛을 자랑하며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여전히 태양은 화창했고, 날은 따스했다. 덱스터는 그녀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고, 지금이 아니라면 그에게 다시는 말을 꺼낼 기회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리아는 바람결에 살랑이는 튤립에서 위안을 받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워드 공. 저, 사냥 대회에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말을 꺼내자마자, 이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덱스터는 아마 그녀의 손바닥에서 더욱 흥건히 새어 나오는 식은땀을 알아챘으리라.
그가 땀 때문에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이리아의 손을 재차 강하게 잡으며 물었다.
“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뭔데?”
“그냥 여러 가지 이유로……. 무, 무엇보다 동물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기가 좀 힘들 것 같아서요…….”
이유가 너무 두루뭉술했다. 덱스터 하워드가 받아 줄 리 없다.
그러나 곧바로 안 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덱스터는 그녀의 대답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널찍하게 펼쳐진 튤립밭이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기 싫다고 하니 나도 가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해. 귀족들에게 얼굴을 알리지 않은 채로 당신과 결혼식을 할 수는 없어.”
이리아는 속상함을 숨기는 데는 썩 재주가 없었다.
덱스터가 축 가라앉은 약혼자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그가 뒤늦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음 해부터는 참석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다음 해는 다음 해일 뿐. 이리아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곧 다가오는 사냥 대회였다.
‘게다가 결혼식 때문이라니.’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와 버렸다. 사냥 대회도 싫고, 결혼식도 싫었다. 의도치 않게 잘못 끼워 버린 첫 단추가 모든 걸 줄줄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리아가 다급히 옷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소매 끝에 달린 레이스 때문에 피부가 따가웠지만,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야 나았다.
덱스터는 잠자코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새빨갛게 열이 오른 눈가를 빤히 응시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가만 보면, 당신은 간혹 정말 루퀼렘 사람 같을 때가 있어.”
이리아가 반사적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덱스터는 다른 때와 같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리아는 그의 표정을 읽기 위해 속상한 기색이 가득 담긴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루퀼렘 사람 같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안다. 비센티움에 온 이후로 수십 번 들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덱스터의 입에서 나오니 적잖이 신경 쓰였다.
이리아는 끝내 덱스터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그녀가 소심하게 고개를 푹 수그리며 답했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루퀼렘 사람 같다는 덱스터의 말을 끝으로, 이리아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말았다.
침실로 돌아온 이리아는 일부러 침대 밑의 소총을 확인하지 않았다. 소총까지 확인하면, 암울한 기분이 바닥을 치는 것으로 모자라 지하까지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도망갈 수만 있었다면…….’
밖에는 루 아휜이, 안에는 덱스터와 카즈웰 4세가 있다. 이리아가 어딜 가든,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길 운명이었다.
호기롭게 가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벽한 자유란 없었다.
이리아는 창틀에 걸터앉아 탐스럽게 핀 작약꽃 한 송이를 만지작거렸다. 루시어스의 수업이라도 있었다면 잠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오늘 루시어스는 자리를 비웠다. 그는 하녀들이 언급했던 다섯 살배기 막내아들을 보러 간 참이었다.
활짝 열린 창 안으로 산들바람이 들어와 이리아의 빨간 머리칼을 휘날렸다. 바람 안쪽에서 덱스터가 쏘았던 총탄의 희미한 화약 냄새가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지만, 어쩐지 느껴지는 공기는 너무나도 차갑기만 했다.
***
평소보다 더욱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두겠다던 하녀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이리아는 도자기 그릇 가득 담겨 있는 라따뚜이(*ratatouille: 가지, 호박, 피망, 토마토 등에 허브와 올리브오일을 넣고 뭉근히 끓여 만든 채소 스튜)와 마늘 바게트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눈을 빛낸 것도 잠시뿐.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이리아는 또다시 축 가라앉고 말았다. 요리사의 정성을 생각해서 음식을 꾸역꾸역 입 속에 집어넣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오늘도, 덱스터는 끝까지 저녁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아는 잠시 그의 빈 자리를 바라보다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일찍 침실에 올라갔다.
로샨은 기분이 영 별로인 이리아를 위해서 바닐라와 치자 향의 양초를 꺼냈다. 바닐라와 치자는 이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향들이었다.
이리아는 하녀들이 괜히 자신을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녀는 로샨이 방문을 닫기 전, 잊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널따란 침대 한가운데 누운 이리아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밀랍 인형 같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뒤척이지 않은 채로, 천장 위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그림자들을 구경했다. 모두 향초가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그림자는 마치 늑대를 마주한 소녀 같기도 했고,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 같기도 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혹등고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자, 어느덧 이리아는 머릿속에서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결말을 맞았다. 소녀는 잡아먹혔고, 독수리는 추락했다. 혹등고래를 탐욕을 이기지 못한 인간들에게 무참히 사냥당했다.
이리아는 끔찍한 결말을 맞은 이야기들이 마치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인생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황급히 그림자 구경을 그만두고, 두 눈꺼풀을 있는 힘껏 감았다.
그러나 마음이 이렇게나 불안한데, 순조롭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리아는 일부러 째깍째깍 돌아가는 탁상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최후의 수단으로 양을 세려고 할 때 즈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정확히 침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똑똑. 단조로운 노크 소리가 베개에 얼굴을 푹 박은 이리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녀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리아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미안해. 아무래도 낮에 당신이 보였던 표정이 너무 신경 쓰여서.”
덱스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리아는 흐트러진 곱슬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선, 문가의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덱스터의 한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가 새빨간 아네모네와 장미, 복숭아꽃들이 가득한 꽃다발을 협탁에 올렸다.
뒤늦게 머리카락을 정리한 이리아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방에 꽃은 이미 넘치고 넘쳐요, 공.”
“알아. 그래도 차마 여인의 침소에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어.”
보지 않으려고 했건만, 꽃다발을 살피며 그 뒤에 있던 탁상시계도 확인하고 말았다.
시간은 새벽 2시. 10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장장 네 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 셈이다.
덱스터는 한숨을 삼키는 이리아의 뺨 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머리카락 한 가닥을 넘겨 주었다. 그는 짙게 내려온 눈그늘을 보고 단번에 이리아가 오랜 시간 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덱스터가 손가락으로 요란히 흔들리던 촛불을 꺼 버렸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 안에서, 그는 다른 때보다 더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니께서는 어린 내가 밤늦도록 잠들지 못할 때마다, 서로가 가진 비밀을 번갈아 털어놓는 특이한 놀이를 시작하시곤 했지. 어때, 당신도 해 볼래?”
“비…… 비밀을 털어놓으면 그게 어떻게 비밀이 되겠어요.”
“당신이 하기 싫으면 나 혼자서 할게. 내 비밀을 들어서 당신의 기분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밤눈이 어두운 이리아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덱스터의 손길을 따라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를 기다리기는 했으나, 이리아는 사실 덱스터의 비밀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덱스터는 콘라드 메이필드만큼 통통 튀고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진 비밀도 재미없을 게 뻔했다.
“어렸을 때, 여장을 하고 다녔어.”
하지만 예상과 달리, 첫 비밀부터가 파격적이었다.
어어? 순식간에 괴상한 표정을 한 이리아는 그만큼 괴상한 눈빛으로 덱스터를 쳐다보았다. 달빛에 희미하게 얼굴 윤곽만 드러낸 그는 작게 웃으며 이리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께선 딸을 원하셨거든. 나를 낳으신 이후에도 딸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셨지만, 순조롭게 임신이 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딸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여장을 하고 다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어, 덱스터가 덧붙였다.
한때 괴상했던 이리아의 표정은 서서히 측은함을 담았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덱스터는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목소리 끝을 잘게 떨었다. 마치 어린 소년이 있는 힘껏 울분을 참을 때처럼.
이리아는 희미한 그의 얼굴 윤곽을 아주 긴 시간 응시하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덱스터가 어떤 비밀을 이야기한들, 속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은 이리아의 온 감각은 자연스럽게 덱스터가 어루만지는 손으로 쏠렸다. 덱스터는 손등 위로 보이는 푸른 혈관을 따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난 금연했지만, 여전히 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녀. 죽을 위기가 닥쳤을 때, 목숨이 다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대를 태우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지.”
그의 손끝은 이리아의 손목을 지나 차차 위로 올라갔다.
“금연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거든. 죽기 전에 한 대를 태우는 게 내 소원이 될 정도로.”
어찌나 피부가 투명한지, 팔뚝의 푸르스름한 혈관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덱스터는 옷소매가 나타날 때까지 혈관을 타고 올라가다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이리아를 발견하고 감미롭게 웃었다.
“비센티움에선 흔히 강한 여성이 일등 신붓감이라고 하지만, 난 여리고 고운 여인이 조금 더 취향이야.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최고의 아내라고도 할 수 있겠군.”
이리아의 볼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가볍게 앉았다가 떨어졌다. 이리아는 보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덱스터 하워드의 입술이겠지.
이리아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슴푸레하게 드러난 시야 속에서 제일 처음 들어온 건, 향초 끝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회색빛 연기 한 줄이었다.
연기는 위를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불투명한 잔상이 되어 사라졌다. 잔상으로 변하는 연기의 모습은 마치 날갯짓하는 한 마리의 어린 새 같았다.
이리아가 잡히지 않는 연기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전…… 어렸을 때 새가 되고 싶었어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거든요.”
루퀼렘 성 창틀에 걸터앉아 날아가는 철새들을 얼마나 많이 바라보았던가.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많이 부러워했던가.
끊임없이 자유를 동경했던 이리아는 루퀼렘에서의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날개를 가지게 해 달라고 수백 번 빌었는데, 신은 끝까지 내 소원을 이뤄 주지 않더라고요.”
“난 어머니를 되돌려 달라고 수백 번 빌었었어. 신은 내 소원도 이뤄 주지 않더군.”
이리아와 달리, 덱스터는 밤눈이 몹시 밝았다. 어느덧 붉어진 이리아의 눈시울을 알아차린 그가 눈 옆, 조그마한 관자놀이를 애타게 쓰다듬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