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06.
“아리따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세요, 아가씨.”
로샨이 침대맡 화병 속 시든 꽃송이를 골라내며 말했다. 이리아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안면 그득히 담긴 걱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꽃과 나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일주일이 지날 때마다 침실의 꽃들을 모두 바꿔 주었다. 지난주가 히아신스와 튤립의 주였다면, 이번 주는 작약과 라넌큘러스의 주였다.
이리아는 로샨이 들고 있는 연분홍의 라넌큘러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온갖 걱정으로 하루하루 말라 가는 자신과 다르게, 저 라넌큘러스는 아름답게 피어났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짜증스러웠다.
덱스터의 저택에 온 이후로, 하루도 안심을 해 본 적이 없다. 마음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자는 뜻에서, 이리아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한 달 후에 열릴 사냥 대회에 가게 되었어요. 대회가 너무 걱정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모든 게 순조로울 거예요.”
로샨의 말을 시작으로,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아가씨. 저희가 아가씨를 위해 어여쁜 드레스를 준비해 둘게요.”
“아름답게 꾸민 아가씨를 보시면, 주인님은 분명 아가씨께 또 한 번 반하실 거예요.”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위해서 가장 거대한 불곰을 사냥하시겠죠. 그리고 죽은 곰을 바쳐 아가씨를 대회의 주인공으로 만드실 거예요.”
덱스터가 자신에게 반하는 것도, 그가 불곰을 사냥하는 것도 싫었다.
저 대륙 너머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이리아는 하녀들의 문장이 모두 씨가 되어 버릴까 두려웠지만, 그들의 성의를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들은 이리아에게 평소보다 더욱 맛있는 저녁상을 준비해 두겠다는 말을 끝으로 침실을 나갔다. 고요한 침실에 홀로 남은 이리아는 두 팔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쩌면 사냥 대회가 루 아휜보다도 더욱 시급한 문제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면, 분명 수많은 짐승이 아무 죄 없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터다. 불필요한 살생을 제자리서 구경하는 것은 루퀼렘의 대마법사인 이리아에게 고문과도 같은 행위였다.
설상가상으로, 그곳에는 카즈웰 4세가 있었다. 저택에 방문을 왔을 땐 그가 이리아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대회장에서도 그러리란 보장 따윈 없었다.
‘만일 카즈웰 4세가 내 얼굴을 기억해 낸다면…….’
상상만 했는데도 속이 울렁거린다. 이리아는 헛구역질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그날 아픈 척을 할까? 아니면, 갑자기 달거리가 시작되었다고 할까?’
이리아는 사냥 대회를 가지 않을 만한 이런저런 핑계를 생각했지만, 하나같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덱스터는 오랜 시간 군인들을 통솔했던 자답게, 그러한 면에서는 눈치가 귀신같았다. 이리아는 군대에서 꾀병을 부린 군인들을 잡아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핑계를 대지 않는다면, 곧이곧대로 가기 싫다고 말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덱스터 하워드는 왜 가기 싫은지 이유를 물어보겠지.
카즈웰 4세가 신경 쓰여서 가기 싫다고는 절대 못 말할뿐더러, 비센티움인인 덱스터에게 동물들이 사냥당하는 걸 못 보겠다고도 할 수 없다.
‘사냥 대회에 왜 가기 싫은지, 이유를 말하는 것조차도 참 곤란하구나…….’
결국,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한 이리아는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산책을 나섰다. 덱스터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언제나 하녀를 대동하라 했지만, 오늘만큼은 혼자 걷고 싶었다.
이리아는 정원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날씨가 워낙 좋았기에, 꽃들은 한 송이도 빠짐없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쭉 내민 상태였다.
가슴이 답답하니 날씨가 좋다는 사실도, 꽃이 환하게 피었다는 사실도 짜증스러웠다.
이리아가 가장 가까이 피어 있는 튤립을 꺾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튤립의 줄기를 쥐기까지는 성공했지만, 차마 꺾을 수는 없었다. 이리아에게는 싱그러운 튤립을 쥐어뜯는 행위마저도 어렵기만 했다.
꽃 한 송이도 제대로 꺾지 못한다. 그런데 한 달 후에 열릴 사냥 대회에서는, 수십 마리의 동물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지켜봐야 한다.
‘대회에 가지 않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리아가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울상인 얼굴을 한 채로 제자리에 한참 서 있던 그녀는, 별안간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제 보니 무척이나 익숙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건, 총성이었다.
탕. 총성이 한 번 울릴 때마다,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이리아는 새들을 따라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마 들려오는 총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총성을 따라 몸을 이끌었다.
대부분의 비센티움 귀족들은 자기 소유의 저택이나 별장 뒤편에 사격장을 둔다. 사격은 비센티움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면서도, 귀족들의 여가 생활 중 하나였다.
덱스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리아는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지만, 저택 뒤편에는 거대한 사격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덱스터는 종종 일부러 비둘기를 날려 보낸 후, 쏘아 맞히는 놀이를 했었다.
‘아…….’
이리아는 소총을 들고 있는 덱스터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탕. 총성이 또 한 번 사방을 울렸다. 총구를 빠져나간 총알은 표적판의 정확히 한가운데 박혔다.
완벽한 명중이었다.
이리아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일렬로 놓인 표적판과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탄피들, 그리고 다시금 총구를 조준하고 있는 덱스터는 이곳이 말로만 듣던 사격장이라는 걸 손수 증명하고 있었다.
오로지 가늠쇠에만 집중한 덱스터는 이리아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알이 다시 한번 질주했다.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총알은 표적판 한가운데 푹 박혔다.
이리아는 총을 든 덱스터와 표적판을 몇 차례 번갈아 바라보았다. 커다란 녹빛 눈동자는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곳은 군부대가 아니었고, 숲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숲속에서 토끼를 쫓던 그 순간이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리아는 죽은 토끼를 집어 들었던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토끼를 잡았던 이는 확연한 명사수였다. 그도 그럴 게, 총알은 정확히 토끼의 급소를 꿰뚫고 있었으니까.
당시에는 총을 잡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파, 토끼를 대신 잡아 준 이를 알아낼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었다. 만일 그때 토끼를 잡은 이를 알아냈더라면, 1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서 그의 정체를 의심할 필요도 없었겠지.
덱스터가 텅 빈 탄창을 채우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멀리 서 있는 이리아를 뒤늦게 알아챘다.
덱스터는 이리아에게 아는 척을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자마자 다시 내리고 말았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된 듯, 그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휘잉. 조금 서늘한 산들바람이 마주 본 남녀의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여자는 저 멀리 있는 남자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져서, 남자는 멀리 있는 여자의 얼굴을 읽어 내느라 바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을 깬 이는 이리아였다. 그녀가 잘게 요동치는 목소리로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토끼…….”
덱스터가 천천히 총을 내려 두었다. 그는 이리아가 채 완성하지 못한 문장을 만들어 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때 그 숲속에서 쫓았던 토끼 말이에요. 호, 혹시 하워드 공이였어요……?”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덱스터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소심한 원망과 함께, 이제라도 알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담고 있었다.
‘……정말로 덱스터 하워드였어.’
이리아는 말문이 턱 막혀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어지럽게 둘러보다가, 다급히 물었다.
“왜…… 왜요? 우리는 그때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전 그냥 일개 간호사였을 뿐인데……!”
“어떤 사이였는지가 중요해? 당신이 숲에서 울고 있었잖아.”
덱스터가 이리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리아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망울로 다가오는 덱스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장갑을 끼지 않은 오른손으로 이리아의 뺨을 감싸 쥐었다.
“내 눈에는 당신이 우는 모습밖에 안 보였어.”
이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덱스터가 보여 준 모든 모습과 더불어, 이 순간의 모습까지도 그녀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단지 ‘울고 있었다’라는 이유로, 나 대신 토끼를 잡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울고 있는 여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사도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군대에서 울고 있던 간호사들의 옆을 쌩 지나가 버리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았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나를 남몰래 짝사랑했던가 하면, 이것도 아니었다. 덱스터 하워드가 나를 짝사랑했다면, 마지막 날에 그리 험악하게 소리 지르지 않았겠지. ‘정절’을 빼앗아 간 책임을 지라는 이유로 결혼을 강요하지도 않았을 거야.
단순히 울고 있었다는 이유로 토끼는 잡아 준 건 아니었다.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럼……대체 왜?’
이리아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그녀는 마치 쉬운 길을 옆에 두고 이리저리 꼬아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덱스터는 여느 때와 같이 거대한 신장을 자랑하며 이리아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이리아의 작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전부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덱스터가 바람결에 흐트러진 빨간 곱슬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나직이 말했다.
“당신 침대 밑에 소총 하나를 숨겨 뒀어. 방으로 돌아가면 확인해 봐.”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순간, 뚝 끊겼다. 머뭇거릴 여유도 없이, 이리아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침대 밑에 총을 두는 건 싫어요.”
“두게 해 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거야.”
표정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잠을 자는 공간 아래에 소총을 둔다고 생각하니, 이리아의 얼굴은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리아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비센티움의 귀족 사회가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자객과 암살자의 존재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니, 침대 아래 두는 총이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당신은 총을 정말 싫어하는군.”
덱스터가 작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이리아의 미간을 살살 폈다. 그가 과거의 향수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의 그날, 아버지께서 당신의 베개 밑에 총을 두셨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시진 않았을 테지. 나는 단지 그날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덱스터가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도 펴지지 않던 미간이 저절로 펴졌다. 이리아는 왜인지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소심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 총으로 사람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야. 당신은 그럴 필요도 없어.”
덱스터가 왼손의 장갑을 벗어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온전히 드러난 두 손으로 이리아의 얼굴을 감싸고선,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었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속삭였다.
“위험이 발생했을 때, 아무 곳으로나 총을 쏴. 그럼 내가 곧바로 당신한테 달려갈 거야.”
쪽. 피부와 피부가 부딪히는 귀여운 소리를 내고선, 덱스터는 이리아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입술이 왔다 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첫발은 미리 장전해 두었어. 그러니 부디 장난으로 쏘지는 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농담인 건지. 설령 보드카를 세 병이나 마셔 거나하게 취한다 해도, 총 따위를 장난으로 쏠 일은 절대로 없었다.
덱스터가 의미 없는 걱정을 하는 모습이 참 웃기고도 어이없었다. 이리아가 작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전 장난으로 총 안 쏴요, 하워드 공.”
순간, 머리 위에서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덱스터가 급하지만 부드럽게 이리아의 손을 휘어잡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