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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30/109)

29화

덱스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그가 삐딱한 미소를 머금고선 질문했다.

“당신, 지금 날 위로해 주는 거야?”

“주……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아니야. 감동했어.”

덱스터가 멀어지려는 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땀이 말라붙은 뺨 위에 짧게 입맞춤했다.

이리아는 어색한 손짓으로 입술이 왔다 간 자리를 매만졌다. 몇 번이고 당해 왔다지만, 여전히 덱스터의 입맞춤은 익숙해지기 참 힘들었다.

둘은 오로지 ‘정절’을 빼앗은 책임으로 묶여 있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상냥한 애정을 보일 필요도, 과한 스킨쉽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덱스터는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고, 계속해서 스킨쉽을 시도했다.

‘연애를 통한 결혼이 아님에도 다정한 부부 연기는 해야 한다는 건가…….’

사랑을 꿈꾼 적은 없지만, 이런 흉내뿐인 결혼을 바란 적도 없다.

이리아는 순간, 불행한 새신부가 된 기분이 들며 스스로가 너무나도 초라해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정을 흉내 내는 덱스터가 사뭇 밉기도 했다.

마법으로 색을 바꾸었음에도, 이리아의 피부는 다른 비센티움인보다도 훨씬 색이 밝았다. 덱스터는 투명한 손등 위로 언뜻 보이는 실핏줄을 느릿하게 따라 그렸다.

“이제 당신 부모님 이야기를 좀 해 봐. 당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난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저…… 전 부모님이 안 계세요.”

“그 사실은 전에 들었어. 그래도 어렸을 적 추억 정도는 있지 않나?”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이 안 계셨어요. 그래서 추억 같은 것도 없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리아는 실제로 그녀를 낳은 부모를 몰랐으니까.

대마법사는 존재하는 모든 인간 중에서 여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여신의 현신이라고도 불리는 만큼, 이리아는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루퀼렘의 오랜 만년설 한가운데서 태어나 돌을 지나기 전에 루 아휜에게 발견되었다.

정체 모를 부모가 나를 눈 속에서 낳았다고 하면 덱스터 하워드는 아마 기겁을 할 테지. 이리아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상황을 상상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어렸을 적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덱스터의 약혼자가 된 이상 루퀼렘에서의 과거는 가슴 깊은 곳에 영원히 묻어 버려야 할 이야기였다. 새삼 자신의 추억을 그 누구하고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심장이 먹먹해졌다.

‘돌이켜 보니 전부 부질없는 과거구나…….’

루퀼렘에서의 과거를 떠올린 이리아의 머릿속엔 언제나 그랬듯, 루 아휜의 얼굴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앞으로 다시는 만나서도, 보아서도 안 되는 루 아휜. 이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면서까지 루 아휜의 형상을 상상 밖으로 밀어냈다.

찌푸려진 이리아의 미간을 다른 의미로 오해한 걸까. 덱스터가 한참 핏줄을 따라 그리던 손등 위로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난 당신이 어떤 과거를 가졌든, 전부 받아들일 수 있어.”

이리아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과거를 전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덱스터 하워드는 마법과 마법사를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루퀼렘 출신이라는 걸 알자마자 죽이려고 들 게 뻔했다.

이리아의 콧방귀는 덱스터도 들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진심을 담아 말한 건데, 당신은 비웃는군.”

아차. 이리아가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선 덱스터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오히려, 그는 전보다 기분이 더 좋아 보였다.

덱스터의 기분이 좋아진 건 이리아가 자신을 전보다 편하게 여기는 듯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이리아는 갑자기 미소 짓는 그가 몹시나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덱스터가 옷차림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도장 한가운데로 간 그는 이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도회장까지 왔는데 당신과 춤 한번 추지 않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이리아는 고민을 할 틈도 없이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전 춤 못 춰요. 조금 전에 보셨잖아요.”

“내가 알고 있으니 괜찮아. 이리 와.”

춤을 못 추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춤을 추는 상대가 덱스터라는 게 더 싫었다. 분명 그와 몸을 바짝 밀착시켜야 할 텐데, 상상만 해도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하지만 이리아에겐 달리 선택권이 없었고, 그녀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춤을 출 줄 알았던 덱스터는 갑자기 이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드레스 아래 숨겨져 있던 종아리를 잡고선, 하얀 구두를 조심스레 벗겨 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리아는 그가 왜 구두를 벗겼는지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덱스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이리 올라와.”

이리아가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뽀얀 발을 덱스터의 구두 위에 올렸다. 덱스터는 그의 발등을 딛고 선 이리아의 몸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둘이 추는 건 춤이 아니었다. 덱스터는 잔잔한 음에 맞추어 이리아의 몸을 살짝 흔들어 주기만 했다. 그러나, 춤을 못 추는 이리아에게는 도리어 지금이 좋았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끊기니 다른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루 아휜의 고운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카즈웰 4세의 방문 이후로, 이리아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루 아휜에 대한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덱스터가 루 아휜의 위치를 알고 있다 확신했다.

이리아가 표정을 숨기기 위해 덱스터의 어깨 위로 뺨을 묻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운을 뗐다.

“공께서 요즘 따라 더욱 바쁘신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무슨 일이 있다기보다는, 여름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많아. 혹시 바쁜 내 모습이 신경 쓰였어?”

“시…… 신경 쓰인 게 아니에요. 그저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얼굴을 안 비치시기에, 무슨 일로 바쁜 건지 궁금해서…….”

“밤에는 당신이 날 상대하기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안 찾아갔던 건데. 앞으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얼굴을 비쳐야겠군.”

어깨에 뺨을 대고 있는 탓에, 이리아의 귓가에 덱스터의 웃음소리는 북처럼 울렸다.

덱스터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려 시원하게 드러난 이리아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지금껏 그가 손과 팔은 만졌어도 목을 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전율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 흘러내렸다.

“1년 가까이 자리를 비웠더니 업무가 많이 밀렸어. 여름이 오면 당신과의 결혼 준비를 해야 하니까, 조금 무리해서라도 미리 끝내 두려는 거야.”

아. 결혼 준비.

루 아휜에 대한 걱정이 앞서 결혼에 대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덱스터는 그녀에게 적응할 시간 석 달을 주었다. 그리고 현재, 그 석 달 중 첫 달이 끝나가고 있다.

이제 이리아에게 남은 시간은 단 두 달.

두 달 후에는 덱스터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하워드 공작 부인이 될 예정이었다.

잊고 있던 결혼식이 생각나자마자 이리아의 속이 울렁거렸다. 이대로 덱스터의 어깨에 뺨을 파묻고 있다가는 그의 옷을 눈물로 적셔 버릴 것 같았기에, 이리아는 애써 밝은 척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타들어 가는 마음도 모르고서는, 덱스터는 이리아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덱스터가 그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있던 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가 짙고도 투명한 녹빛 눈동자 속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당신한테선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나. 잘 익은 복숭아 향 같기도 하고, 은은한 목련 향 같기도 해.”

“하…… 하워드 공한테서는 진한 박하 향이 나요.”

“그렇겠지.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금연하기가 상당히 힘들어. 담배를 끊으려고 박하를 씹기 시작했건만, 지금은 담배 대신 박하에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

“담배보다는 박하가 훨씬 낫죠. 전 박하 향 좋아해요…….”

덱스터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 이채가 서리더니, 그는 이리아를 냅다 껴안아 제 가슴팍에 파묻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정수리 위로 거칠게 문질러지는 덱스터의 뺨을 느낄 수 있었다. 덱스터는 한참 새빨간 정수리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이어 이마에 정신없이 입술을 문질렀다. 다른 때보다 훨씬 과격한 스킨쉽이었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어깨를 꽉 껴안으며 흥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뿌듯하게 느껴지는지 당신은 짐작조차 못 할 거야.”

어리둥절한 이리아가 푹 파묻힌 얼굴을 들어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역광에 뒤덮인 덱스터는 양 뺨에 보조개가 질 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며 얼굴에 열기가 확 올랐다. 이리아가 반사적으로 덱스터의 가슴팍을 밀쳐내고선 횡설수설했다.

“이, 이렇게 춤을 추다가는 평생 실력이 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당신과 춤을 출 사람은 평생 나밖에 없어. 내가 잘 추니까, 당신은 못 춰도 돼.”

“안 돼요. 춤을 추면서 공의 발등을 밟을 수는 없어요.”

“당신이 수십 번, 수백 번을 밟아도 내 발등에는 생채기 하나 안 나.”

덱스터가 멀어지려는 이리아를 힘껏 붙잡았다. 그는 이어, 이리아가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도록 팔로 단단히 허리를 휘감았다. 반대편 손은 어느덧 이리아의 둥글고 뽀얀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전보다 더 단단하게,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이리아가 덱스터의 옷자락을 소심하게 짓이기며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무지 하워드 공을 이길 수가 없네요…….”

“헛소리 마. 당신은 이미 날 수차례 패대기치고,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었어. 군단장과의 싸움에서 셀 수 없이 승리를 거머쥐었었다고.”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가 천천히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덱스터는 어느덧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이렇게나 작고 여린 사람을 내가 왜 이기지 못했을까…….”

그의 속삭임 속에는 이리아는 정체 모를 감정이 흠뻑 배어 있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성을 나온 이리아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남자였다. 오로지 혼자만의 노력으로 높은 직위를 얻어 냈고, 힘도 훨씬 더 강했으며,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그가 대체 무엇을 이기지 못했다는 건지, 이리아는 덱스터의 말뜻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그의 새까만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또 이런 눈으로…….’

덱스터는 마치 지금처럼, 종종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그 속에는 슬픔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애틋함이 담겨 있기도 했다.

덱스터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이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난처했다.

‘덱스터 하워드에게서 이만 떨어지고 싶은데…….’

덱스터와 언제까지 이런 춤 아닌 춤을 춰야 하나 눈치를 보던 이리아는, 노랫소리가 뚝 끊기자마자 안도 어린 한숨을 삼켰다.

노래를 멈춘 이는 루시어스였다. 그는 멀리서 축음기 바늘을 들어 올린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루시어스와 시선이 마주친 덱스터가 나직이 내뱉었다.

“아쉽지만, 춤은 여기까지 춰야겠군.”

붙잡았던 행동이 무색하게, 그는 순순히 이리아를 제 발등에서 내려 주었다.

루시어스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덱스터를 향해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방금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보낸 이는 카즈웰 4세인가.”

“예. 사냥 대회의 날짜가 드디어 정해진 듯하더군요.”

이리아는 벗어 놓았던 구두를 주섬주섬 다시 신었다. 그녀가 발목의 리본을 완벽하게 묶었을 때 즈음, 덱스터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선 초대장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가 다가오는 이리아를 향해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리아는 암묵적인 허락 아래, 조심스레 초대장을 펼쳐 보았다.

초대장의 맨 위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공작새의 실루엣이, 초대장의 맨 아래에는 황태자의 서명이 값비싼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초대장의 가운데에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초대 문구가 쓰인 채였다.

초대장을 읽어 나가는 이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느덧 새까맣게 변해 버린 그녀의 머릿속에서, 덱스터의 목소리가 흐릿한 잔상처럼 퍼져 나갔다.

“당신, 아무래도 조만간 새 드레스를 맞춰야겠어.”

이어진 화려한 필체 끝에는, 덱스터의 이름과 함께 그녀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카즈웰 4세가 이리아를 사냥 대회에 초대한 것이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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