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밤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그녀를 바라보는 덱스터의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우연히 손에 들어온 보석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했던 모습이라면, 지금은 그 보석을 진득하게 감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리아는 언제나 짙게 가라앉아 있던 새까만 눈동자 위로 스며든 이채를 보았다. 그녀가 눈동자 속 이채를 좇아 시선을 피하지 않자, 덱스터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뽀얀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언젠가 날을 잡아서 당신 주량을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술을 마신 다음 날마다 이러면 내가 너무 곤란해.”
술을 마신 다음 날마다 이러다니? 이리아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 서, 설마…….’
덱스터는 급격하게 창백해진 낯빛을 알아차리고선 더욱 짙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손의 힘이 풀려 떨어지려고 하는 유리잔을 가볍게 낚아채며 물었다.
“당신이 어젯밤에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
“어젯밤에 제가 공을 찾아갔었나요……?”
“기억 안 난다면 됐어. 이미 익숙해.”
덱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리아의 얼굴은 급기야 창백한 수준을 넘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어젯밤이 한순간도 기억나지 않는 이리아는 다급히 이불 안쪽부터 살폈다. 한참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그녀는 덱스터가 직접 ‘그날’ 같은 일은 없었다고 말한 후에야 퍼뜩 제정신을 되찾았다.
덱스터가 식은땀에 달라붙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 주었다. 목덜미 위의 울긋불긋한 문양들을 확인한 덱스터는 남몰래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어느덧 그의 손은 이리아의 엄지손가락에 자리 잡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덱스터가 애잔하게 떨리기 시작한 새빨간 속눈썹을 응시하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말 한마디를 안 했더군.”
덱스터는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리아의 손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그때, 소리 질러서 미안해.”
이리아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본 덱스터는 험악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제법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제 ‘그날’ 같은 사건은 없었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덱스터 하워드가 갑자기 이렇게 농담과 사과를 할 리가 없어.
‘대……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눈꺼풀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한참 이리아의 반응을 살피며 손등을 살살 쓸다가, 쉬라는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이리아는 그의 모습이 문 뒤로 사라지자마자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빨간 머리카락이 이리아의 손아귀 안쪽에서 이리저리 뜯겼다. 그녀는 하녀들이 들어올 때까지, 아주 긴 시간 이불을 발로 차며 제 이마를 쿵쿵 쥐어박았다.
‘바보. 바보, 멍청이 이리아 아델리어! 덱스터 하워드는 대체 왜 찾아간 거야. 대체 왜!’
덱스터 하워드에게 특별한 용건도 없는 듯한데, 도대체 왜 술에 취할 때마다 그를 찾는 건지 도무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며 천하의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거야. 어젯밤은 운이 좋았지. 절대로, 절대로 덱스터 하워드와 ‘그날’의 일을 반복할 순 없어.
이리아는 수차례 다짐을 거듭하며 하녀들을 맞아들였다. 다행히 덱스터가 하녀들에게 핀잔을 주진 않았는지, 그들은 하나같이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하녀들이 쥐어뜯어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이리아는 신문을 살폈다. 이런저런 뉴스들이 뒤섞인 신문 위에서 그녀가 찾는 소식은 단 하나였다.
루 아휜의 비센티움 방문.
황실에서 일부러 기사 기재를 막았는지, 아니면 루 아휜이 아직 비센티움에 도착하기 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신문에는 루 아휜이나 루퀼렘에 관한 소식이 없었다.
이리아는 애써 근심 섞인 표정을 숨기며 신문을 치워 버렸다. 그녀는 루 아휜이 비센티움에 도착했다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기를, 만일 도착하지 않았다면 최대한 늦게 도착하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이리아는 최근에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루시어스는 사교댄스의 ‘사’자도 모르는 그녀를 배려하여 비교적 쉬운 스텝부터 가르쳐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리아는 모든 부분에서 엉망이었다.
물론, 루퀼렘인들도 사교댄스를 추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루퀼렘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었고, 이리아에겐 예외였다.
그녀는 거대한 무도장에서 루퀼렘의 상류층들이 춤을 추는 내내, 언제나 거대한 의자에 고고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나라를 이끄는 두 군주는 연회를 이끄는 역할이지, 참석자가 아니었다. 거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것만이 무도장에서 이리아가 취할 수 있는 행동 전부였다.
“왼발이 아니라 오른발부터 내딛으시라고 벌써 세 번째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아가씨.”
“죄, 죄송해요. 그런데 분명 오른발부터 내디딘 것 같은데…….”
“그리고 손끝과 시선은 절대로 함께 움직이면 안 됩니다. 시선은 언제나 댄스 상대에게 고정되어 있도록 하세요.”
“하지만 손끝을 안 보면 손가락 모양이 틀릴까 걱정되는데요…….”
“아가씨의 손가락 모양까지 살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손가락은 틀려도 되니 시선 정리부터 하시죠.”
“네.”
루시어스에게 어젯밤의 음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그녀는 애써 숙취로 인한 두통을 무시하며 스텝을 밟아나갔다.
상체는 나름 댄스의 틀을 잡고 있었지만, 연분홍빛 드레스 아래 숨겨진 하체는 도저히 못 볼 꼴이었다.
숙취로 인한 두통에다가 지난밤의 실수에 대한 부끄러움, 루 아휜에 대한 걱정까지 찾아오니 남아 있던 집중력마저 흐트러졌다. 루시어스는 그의 발등이 잘근잘근 밟혀 사라지기 전에 황급히 댄스 교습을 멈추었다.
“한참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인데 말입니다…….”
반쯤 녹초가 되어 버린 이리아가 비척비척 몸을 움직여 루시어스를 바라보았다. 열기에 휩싸인 그녀의 양 볼은 평소보다 더욱 새빨갰다.
“아가씨께서는 정말로 엄청난 몸치시군요.”
이리아가 미안한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게, 루시어스는 며칠째 똑같은 곡만 반복하며 영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참을성이 부족한 선생이었다면, 아마 진즉 댄스 교습을 그만두었을 터다.
루시어스가 축음기 위에서 열심히 돌아가던 음반을 빼냈다.
축음기라는 물건을 난생처음 보았던 이리아는, 댄스 교습이 시작되고 며칠 동안 축음기가 돌아가면 눈을 빛냈었다. 하지만 루시어스의 잔소리가 섞인 음악을 수도 없이 듣고 나니, 지금은 축음기라는 물건 자체가 지긋지긋했다.
루시어스가 축음기 바늘 안쪽에 새로운 음반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군대에서 따로 운동은 하지 않으셨나 봅시다. 운동을 하셨다면 이렇게까지 댄스가 힘겹지는 않았을 텐데요.”
“일하느라 바쁜 간호사들에게 따로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호신술도 따로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간호사들도 기본적인 호신술은 필수적으로 익힌다고 하더군요.”
“그, 그게…… 저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들어간 간호사가 아녔었어요.”
“그럼 주인님께서 검술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까?”
“검술까지는 아니지만, 총을 쏘는 법은 배웠네요.”
루시어스가 한심한 감정과 더불어 ‘참 늦게도 배웠다’라는 뜻을 담아 이리아를 쳐다보았다.
이리아는 루시어스도 어쩔 수 없는 비센티움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발등에 이미 시퍼렇게 멍이 든 루시어스를 배려하여 이번에는 홀로 왈츠 스텝을 연습했다. 집중력을 다잡은 이리아는 심혈을 기울여 발을 디뎠지만, 루시어스는 여전히 최악이라는 얼굴로 눈썹을 씰룩거릴 뿐이었다.
이리아는 루시어스의 표정을 살피느라 엉킨 치맛자락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다리를 뻗기 무섭게,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발목이 갑자기 안으로 확 꺾여 들었다.
“어어……!?”
시야가 빠르게 기울어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을 틈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리아가 다가올 고통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강인한 팔뚝이 허리를 휘감았다.
참았던 숨통이 터져 나오며, 이리아의 두 눈이 퍼뜩 뜨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자칫하다 넘어지겠어.”
“아…….”
덱스터는 이리아가 제대로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선 몸을 바로 세워 주었다. 그가 자그마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던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말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당신 몸을 쓰는 일에는 영 솜씨가 없군?”
그가 지칭한 ‘일’은 댄스뿐만이 아니었다. 이리아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드레스 앞섶을 움켜쥐며 물었다.
“여……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당신, 숙취 심하잖아. 언젠가 들었는데, 꿀이 숙취 해소에 좋대.”
덱스터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매서운 시선이 옆얼굴을 때렸다.
무시무시한 가정교사의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루시어스와 차마 시선을 맞출 수 없던 이리아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내리깔았다. 그녀는 제발 루시어스가 하녀들에게 핀잔을 주지 않기를 하늘에 빌 뿐이었다.
이리아의 양손에는 머지않아 꿀물이 찰랑거리는 유리잔이 쥐어졌다. 이리아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감사해요.”
덱스터 하워드한테 감사하다는 말은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잖아도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리아의 목덜미가 급기야 터질 듯 새빨개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참 내뱉기 쉬운 감사의 인사 한마디도, 덱스터 앞에서는 미치도록 낯간지러웠다.
소심하게 꿀물을 꼴깍꼴깍 마시는 이리아의 시야 안쪽에 문득 까만 머리의 남자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루인이 덱스터의 다리 뒤에 숨어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덱스터가 루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었다.
“얘는 할 일 없이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기에 데려왔어. 참, 둘이 인사는 했나?”
“했어요. 아가씨께선 제 이름도 아세요!”
“그래? 나 모르는 사이에 이름까지 알려 줬구나. 빠르기도 하지.”
덱스터는 더 큰 칭찬을 바라는 루인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머리에 까치집이 질 정도로 우악스레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루인은 루시어스의 부름을 무시하면서까지 덱스터의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일곱 살 남자아이답게 한참을 칭얼거리던 그는 루시어스가 케이크를 주겠다는 말을 꺼낸 후에야 쪼르르 달려갔다.
루시어스는 5살 막내아들을 둔 아버지였기에, 능숙히 루인을 이끌었다. 이리아는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를 좋아하시나 봐요.”
“원래 싫어했었는데, 이웃 나라에서 어떤 꼬맹이를 만난 이후로 좋아하게 됐어.”
힘없이 풀어져 있던 이리아의 손바닥 안쪽으로 온기가 파고들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손을 잡고서 일곱 살짜리 루인을 이끌던 루시어스만큼이나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둘은 무도장 한편에 놓인 구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장신구가 없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탓에, 이리아는 평소보다도 더욱 조그마해 보였다.
덱스터가 아무것도 없는 무도장 한가운데를 응시하며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루인 웨스틴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강도 사건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어. 출신이 분명하지 않은 이민족의 핏줄이라 보육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지. 저 조그마한 아이가 눈이 발목까지 쌓인 겨울날, 저택 앞에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더군.”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를 읊조리듯, 덱스터의 목소리 속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이를 저택에 들이는 게 까다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못 본 척 지나칠 수가 없었어. 부모를 잃었던 어릴 적 나의 모습과 루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거든.”
덱스터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감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실패하고 만다.
끝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만 그의 잇새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그 당시 누군가가 거두어 주었더라면, 일평생 이토록 외로운 삶을 살지는 않았겠지…….”
이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평생 루 아휜과 무녀들, 그리고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비호를 받아 왔었다. 그들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서 이리아는 단 한 순간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누군가를, 하물며 덱스터 하워드를 위로해 주는 방법 따위 몰랐다.
그녀는 제자리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손바닥을 살포시 덱스터의 팔뚝 위에 얹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