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109)

27화

등 뒤에서 로샨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바…… 바람 쐬러!”

이리아는 황급히 겉옷을 챙기며 따라오려는 하녀들에게 손을 휘저은 후, 홀로 비틀비틀 지하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정원으로 나가려던 그녀는 문가에 서 있는 루시어스를 보자마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고주망태가 된 이리아를 본다면, 공작가의 차기 안주인이 한밤중에 술을 마시냐면서 하녀들과 그녀를 추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옥상으로 목적지를 바꿨던 이리아는, 저택 3층에 도착하자마자 우뚝 제자리에 섰다.

그녀의 시야 끝으로 덱스터의 침실 문이 보였다.

‘저 침실 안쪽의 덱스터 하워드는 세상 편하게 쿨쿨 자고 있겠지…….’

취기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이리아의 낯빛 위로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자신은 덱스터와 루 아휜, 카즈웰 4세 때문에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걱정 없이 잘 자는 그가 너무 미웠다.

‘나쁜 놈.’

개미 눈곱만큼 남은 이성은 이리아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어느덧 ‘그날’ 밤의 기억도, 옥상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깡그리 잊어버린 이리아는 노크도 없이 덱스터의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리아의 예상대로, 덱스터는 어둠 속에서 깊이 자고 있었다.

겁을 상실한 이리아는 그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녀는 숨소리도 없이 자는 덱스터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손끝으로 볼을 쿡 찔렀다.

“나, 나쁜 놈…….”

덱스터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이리아의 손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험악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는 베개 아래의 단도를 꺼내려던 찰나, 별빛에 비친 빨간 머리를 확인하고선 스르르 손힘을 풀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숨결에 뒤섞인 술기운을 느끼자마자 한숨을 삼켰다. 계속해서 ‘나쁜 놈’이라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놀랍도록 ‘그날’ 밤과 똑같았다.

그가 성냥으로 침대맡 양초에 불을 지폈다. 아른거리는 노란 불빛 속 이리아는, 제 딴에 무서운 표정을 하고선 덱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 나…… 나쁜 놈.”

“당신, 또 시작이야? ‘그날’ 이후로 술 끊은 줄 알았는데.”

끊었었다. 아마 내일 아침부턴 다시 끊을 테지.

이리아는 힘겹게 침대에 기어 올라가 덱스터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미 까치집이 올라앉은 머리카락을 더욱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일평생 총과 칼을 상대해 온 덱스터로써는 이리아의 화풀이가 같잖기만 했다. 그는 한참 어이가 없다는 감정을 담아 이리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팔목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이리아는 팔목이 잡힐 때까지도 덱스터가 나쁘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간,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른 덱스터는 자기도 모르는 새 눈살을 찌푸리며 으르렁댔다.

“그만해. 나쁜 건 당신이잖아.”

“내…… 내가 왜 나, 나빠? 나, 나한테 소리 지른 것도, 겨…… 결혼하자고 한 것도 너면서……!”

“당신은 언제나 아무것도 모르지. 그날은 기억이 나? 거절의 말 한마디도 없이, 퀸터에게 내가 준 사과를 먹였던 그날 말이야.”

“무, 뭐? 퀸터한테 먹였던 사……사과?”

“그래.”

“그, 그 사과를 네가 줬다고……?”

이리아의 작은 어깨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마법으로 꾸민 그녀의 녹빛 눈동자는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마침내 덱스터를 향했다.

이리아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려 보였다.

“네…… 네가 언제 나한테 사, 사과를 줬어?”

아. 일순간, 덱스터의 턱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는 답지 않게 넋이 빠져 버린 얼굴로 눈앞의 이리아를 응시했다.

덱스터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이리아의 양어깨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금 의심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내가 준 건지는 몰랐던 거구나? 그랬던 거지?”

“네가 뭔데 나…… 나한테 사과를 줘? 네가 뭔데 이 나…… 나쁜 놈아……?”

“눈치 없기는.”

이리아의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볼에 여러 차례 닿은 후, 시야는 뒤늦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덱스터는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하고선 이리아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내 오해였다는 걸 확인하니 너무 기뻐. 당신은 모르겠지만, 사실 그때 상처를 꽤 크게 받았었거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리아는 덱스터의 양손이 얼굴을 매만지는 내내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보드라운 솜털을 느끼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더니, 또 한 번 그녀의 뺨 위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거부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이 가만히 키스를 받아들이던 이리아는 피부에 닿아 오는 숨결이 간지러워 작게 키득거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덱스터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선,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냅다 그녀를 품속에 파묻기 시작했다.

“수, 숨 막혀…….”

“어떡하지? 당신이 너무 좋아. 이 감정이 감당이 안 돼…….”

의도치 않게 덱스터의 가슴팍에 코를 묻게 된 이리아가 성난 어린아이처럼 버둥거렸다. 덱스터는 새빨간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웃다가 이리아를 안은 채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침대 위에 흐드러졌다. 이리아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덱스터의 몸 아래 깔려 키스 세례를 받고 있었다.

덱스터는 정신없이 이리아의 양 뺨과 턱 끝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바람결에 촛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입술과 피부가 만나는 소리가 수없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남성의 몸 아래 깔리게 된 이리아는 키스를 받는 내내 끙끙거렸다. 그녀의 잇새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지…… 진짜 이상해. 이, 이중인격자야? 예전에는 가, 갑자기 화냈으면서 지…… 지금은 갑자기 나, 나한테 뽀뽀를 막 하구 그래?”

“술 취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듯한데.”

덱스터가 한숨을 삼키며 이리아의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는 조그마한 이리아의 두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고선 그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맨정신의 당신한테 지금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그 소심한 여자가 어떻게 술만 들어가면 날 먼저 찾아올 생각을 하지?”

이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덱스터도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던 듯, 나란히 누워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밤눈이 어두운 이리아가 촛불이 꺼진 방 안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숨소리와 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으로 덱스터의 존재를 알아채고 있었다.

새하얀 초승달이 천천히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초승달의 끄트머리가 창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방 안이 환해지고, 이리아는 희미하게나마 덱스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달빛 속 덱스터는 신화 속 여신에게 단단히 홀려 버린 머저리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건만, 이리아보다도 더욱 취해 버렸다. 덱스터는 떨리는 손끝으로 이리아의 눈 아래를 쓰다듬었다. 이리아가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길고 빨간 속눈썹이 그의 손톱을 아찔하게 스쳤다.

덱스터가 오로지 이리아만 들릴 정도의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세계로 당신을 데려가고 싶어.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우리 둘만 있는 거지.”

“너…… 너랑 나 둘만……?”

덱스터와 단둘이 남는 것보다도 루퀼렘 성에 갇혀 자유를 빼앗기는 게 더 싫었던 걸까, 지금의 이리아에게는 덱스터의 말이 달콤한 권유로 들려왔다.

이리아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취기에 휩싸인 그녀의 머릿속엔 어느덧 옛 기억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루 아휜과 카즈웰 4세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너, 너랑 나 둘만 있는 그……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평생 날 찾지 않겠네?”

“그럼, 당연하지.”

“거, 거기서는 내 마음대로 해…… 행동해도 혼내는 사람 없어? 내…… 내가 원하는 대로 자,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그래.”

“아이, 좋아라…….”

이리아가 맥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두 팔을 뻗어 덱스터의 목덜미에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 그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리아는 짙은 박하 향이 풍겨 오는 덱스터의 목덜미에 제 코를 파묻은 후,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빠, 빨리 데려가, 죠. 아……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덱스터는 한참을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몸이 풀린 이후에도 고장 난 태엽 인형이라도 되는 듯 삐걱대다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선 이리아를 부드럽게 그러안았다.

“술에 취한 당신이 내뱉은 말 중, 방금 것이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었어.”

그의 목소리 속엔 감미로운 웃음이 섞여 있었다. 덱스터는 가녀린 숨결을 내뱉는 이리아의 둥근 이마 위에 제 이마를 맞댔다.

“데려가 줄게. 당신이 원하는 그 어느 곳이든.”

덱스터는 말이 끝나자마자 이리아의 숨결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계속해서 짧게 끊어지는 숨결 속에는 그녀 특유의 과일 향과 함께 알싸한 위스키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조금 우악스레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덱스터의 혀끝은 닿을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쓸고 지나갔다. 목덜미에 감긴 이리아의 두 팔이 발발 떨리기 시작하자, 덱스터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이리아의 조그마한 몸뚱어리가 덱스터의 등 아래로 모조리 감춰졌다. 간혹 들려오는 신음성과 흐트러지는 빨간 머리칼만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할딱이는 숨소리가 어두운 방을 채웠다. 덱스터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리아의 목덜미를 따라 차츰차츰 내려갔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목덜미 위로 자잘한 문양들이 새겨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내내 간지럽다고 칭얼거렸다. 그녀의 잇새서 귀여운 웃음소리가 까르르 터져 나왔다.

이리아의 슬립은 이미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옷까지 입지 않은 탓에 흐트러진 슬립 안쪽으로 뽀얀 가슴이 드러나니, 덱스터는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버린 기분이었다.

덱스터의 손이 새하얀 슬립 아래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허벅지에 손을 올리기 무섭게, 축 처지는 몸을 느끼고선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 덱스터의 잇새서 숨이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지…….”

들뜬 신음성을 흘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품속 이리아는 어느덧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덱스터는 잠시 어이없다는 투로 웃음을 흘리다가, 이리아의 슬립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 주었다. 그러고,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대부인의 침실로 옮겼다.

이리아가 오랜 시간 뒤척였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이부자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덱스터는 금주했다고 믿었던 이리아가 갑자기 술을 입에 댄 이유를 짐작하고선 그녀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대체 무엇이 당신을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게 만든 건지, 덱스터는 저택에서의 하루를 곰곰이 되돌아보며 방을 나섰다.

실로, 엄청난 자제력이었다.

***

이리아는 잠꼬대도 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잠든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뜬 한낮이었다.

‘아, 다행이다…….’

이리아는 눈을 뜨자마자 보인 익숙한 천장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한 순간도 잠시.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덱스터와 눈이 마주치자, 이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굳히고 말았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녹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덱스터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당신, 갑자기 기절했던 거 알아? 어떻게 손이 닿자마자 그대로 잠들 수가 있어?”

창밖을 본 이리아는 뒤늦게 자신이 엄청난 늦잠을 자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덱스터의 말뜻을 생각할 틈도 없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어,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10일 동안.”

“네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 머리가 띵 울렸다. 이마를 잡고 끙끙거리는 이리아 앞에 유리잔이 들이밀어 졌다.

덱스터가 내민 것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두 손에 잔을 쥐여 주며 말했다.

“농담이야. 열 시간.”

농담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남자가 농담을 다 하다니…….

이리아는 소심하게 물을 꼴깍꼴깍 마시면서 덱스터의 눈치를 살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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