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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7/109)

26화

루 아휜의 이름을 듣자마자 덱스터의 입가는 차갑게 굳었다. 그가 웃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카즈웰에게 따지듯 말했다.

“대륙법상 루 아휜은 세 제국 황제들의 허가 없이 루퀼렘을 빠져나오지 못할 텐데요.”

“군사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게 아니기에, 허가는 따로 필요치 않다고 하더라고.”

“군사적인 이유가 아니면, 그 갸륵한 여신의 종이 갑자기 우리 제국에는 왜 오는 거랍니까?”

“……루퀼렘에서 도주한 마법사에 대한 소식은 그대도 당연히 들었겠지?”

“예. 그 마법사가 현재 비센티움에 있는 것 같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습니다.”

담배를 문 카즈웰이 이어 꺼낸 것은 라이터가 아닌, 조그마한 성냥 상자였다. 그는 담배 끝에 불을 붙이자마자 반도 타지 않은 성냥을 홍차 속에 퐁당 빠뜨렸다.

같은 혈통을 타고난 두 남자는 서서히 재가 섞이기 시작한 홍차의 모습을 구경했다.

카즈웰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선 입을 열었다.

“루퀼렘 내부에서 도주한 마법사가 1년째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라는 뒷소문이 돌고 있네. 만일 그 마법사의 정체가 진실로 이리아 아델리어라면, 루 아휜이 갑자기 우리 제국에 넘어오는 것도 설명이 돼. 루 아휜의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이리아 아델리어를 찾아가야겠지.”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의 이름이 언급되자, 덱스터의 눈초리 끝이 사뭇 일그러졌다.

어느덧 매섭게 변한 그의 표정 속에는 루퀼렘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흠뻑 묻어 있는 듯했다.

“눈 힘 풀게. 이거 원, 무서워서 시킬 일도 못 시키겠군.”

카즈웰이 탁한 회색빛의 담배 연기와 함께 날카로운 비소를 흘렸다. 그는 덱스터와 달리, 루 아휜과 도주한 마법사를 감싼 이 모든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는 낌새였다.

덱스터는 금연을 한 지 상당히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안주머니에 담배 한 개비씩을 넣고 다니는 남자였다.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강렬한 흡연 욕구를 참아 내며 묵묵히 질문을 던졌다.

“……전하께서는 제가 그 도주한 루퀼렘 마법사를 잡아내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 자네가 할 일은 루 아휜을 감시하는 거야. 도주한 마법사는 루 아휜이 알아서 잡아 줄 테니, 그놈까지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만일 도주한 마법사가 정말로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라면 어찌하실 생각이시죠?”

“글쎄. 그 점에 대해서는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을 해 봐야겠네.”

재가 둥둥 떠다니던 홍차 속으로 다 피우지 못한 담배가 퐁당 떨어졌다.

펄럭이는 망토 뒤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카즈웰 4세는 응접실을 나서며 경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 아휜이 하루빨리 나의 나라로 와 주었으면 좋겠군!”

덱스터는 순식간에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선 카즈웰 4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그의 웃음소리가 참으로 불쾌했다.

카즈웰 4세는 아직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제2의 던햄 공’이라 불릴 만큼 정복욕이 큰 남자였다. 그가 루 아휜을 기다리는 건, 분명 루퀼렘을 상대로 어떤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루 아휜과 도주한 마법사를 가지고 대체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걸까.

덱스터는 도통 읽을 수 없는 카즈웰 4세의 속을 조금이나마 어림짐작하며, 뒤늦게 방을 나섰다.

***

루 아휜이 비센티움으로 온다. 그리고 그런 그를, 덱스터 하워드가 감시할 예정이다.

양피지에 쓰여 있는 모든 내용이 이리아에게는 아슬아슬한 도미노 게임 같았다. 루 아휜은 이리아가 어떤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해도 알아볼 인물이었다. 그와 실수로라도 마주치는 순간에는 곧바로 잡히고 말 텐데, 그럼 덱스터 하워드도 이리아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마법을 혐오하여 세상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군단장. 덱스터의 악명 높은 소문을 떠올리자마자, 이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냐. 정신 차려, 이리아 아델리어. 루에게 잡히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머리카락 색과 정체를 숨기고 평생토록 ‘씨시 힐데어’로 살아갈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루 아휜에게 잡히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긴 드레스 아래 이리아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차례 씹었던 엄지손톱 밑은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가씨.”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아가씨!”

번쩍. 이리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코앞의 루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루시어스는 수업을 하다 말고 대륙 지도 앞에 엉성하게 펜을 올린 상태였다. 그가 반쯤 넋을 놓은 이리아를 향해 핀잔 어린 한마디를 했다.

“오늘따라 유독 집중을 못 하시는군요.”

“죄송해요…….”

이리아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잘근잘근 씹은 엄지손톱 아래가 뒤늦게 아파지고 있었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루시어스의 양해를 받아 수업을 일찍 끝내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가는 길, 살짝 열린 집무실 문 사이로 덱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문 앞을 지나가는 이리아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바쁜 상태였다. 이리아는 잠시 문을 두드려 그의 집중력을 깨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휘저으며 급히 떠나 버렸다.

이리아의 눈에는 덱스터의 모든 행동이 루 아휜을 감시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보였다. 덱스터가 더 바빠질수록, 이리아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방에 들러 책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둔 후, 마구간으로 뛰어 내려갔다.

여러 말 사이서도 단연 퀸터가 제일 눈에 띄었다. 커다란 꽃송이를 우적우적 씹고 있던 퀸터는 이리아가 오자마자 푸르릉 콧김을 뿜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세상을 떠난 틸다가 더 보고 싶다. 이리아는 퀸터의 새까만 콧잔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선, 그의 거대한 목덜미를 양팔로 껴안았다.

[착한 퀸터…….]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 강하게 튀어 오르는 퀸터의 맥박을 느꼈다. 그의 등허리에 올린 안장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충동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리아의 손이 천천히 퀸터의 고삐를 감싸 쥐었다.

퀸터는 훌륭한 군마였다. 퀸터의 등에 올라 온종일 달리면 비센티움 남쪽 도시까지는 가볍게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퀸터가 푸르릉 콧김을 뿜자마자, 눈앞에 빛이 번쩍이며 제정신이 돌아왔다.

‘이건 아니야. 정신 차려, 이리아 아델리어!’

쿵. 이리아가 마구간 기둥에 제 머리를 부딪쳤다.

지금껏 이 저택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지금의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에게서 무사히 달아날 수 있다는 보장도, 비센티움에 안전하게 몸을 의탁할 곳도 없었다.

더구나 곧 국경선을 넘는 루 아휜에게 만일 비센티움 도심을 돌아다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녀는 완전히 끝이었다, 끝!

이리아는 마구간 기둥에 머리를 몇 번 더 부딪혔다가, 힘이 다 빠져 버린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처음 그녀의 시선 안으로 들어온 건, 정갈하게 쌓여 있는 책들이었다.

분명 아무렇게나 던져 두고 갔었는데, 내가 퀸터를 보러 간 사이 로샨이 정리를 해 준 거구나. 이리아는 로샨의 일이 괜히 자신 때문에 늘어났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덱스터는 온종일 바빴기에, 그와 저녁까지도 따로 먹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늦은 저녁에는 한 번쯤 와 얼굴을 비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덱스터는 루시어스를 통해 자그마한 나비 모양 브로치만 보냈을 뿐, 그녀를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대체 얼마나 바쁜 거야. 대체 얼마나 철저히 준비를 하는 거냐고…….’

이리아는 거대한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어지러운 머릿속 때문에 자정이 지나도록 잠들지 못하자, 결국 그녀는 향초라도 피우기 위해 로샨을 찾았다.

낮에 쓸데없이 책도 정리하게 했는데, 잠까지 깨워야 한다니. 이리아는 로샨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저택 지하층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다들 깊게 잠든 줄 알았건만, 저택 지하는 이리아의 예상과 달리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이리아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기름진 음식 냄새를 쭉 따라갔다.

하녀들은 그들만의 거대한 식당에 모여 왁자지껄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리아를 제일 먼저 발견한 이는 복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헬레나였다.

그녀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아가씨! 이, 이 야밤에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잠이 통 안 와서요. 혹시 향초를 찾아 줄 수 있나 해서…….”

하녀들의 대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들은 일제히 이리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단번에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진 술병들을 발견했다.

“다들 술 마시고 계시군요.”

“아, 아하하-. 루시어스 씨가 위스키를 선물로 주셔서요. 어쩌다 보니 오늘 병뚜껑을 따게 되었네요.”

이리아는 한참 제자리에 서서 일렬로 서 있는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잊지 못한 럼주의 맛이 혀끝에서 아른거렸다.

그녀는 술에 취해 덱스터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만큼, 잠시 술을 끊은 상태였다. 하지만 저택에는 곳곳에 사용인들이 있으니, 설령 고주망태가 된다 해도 ‘그날’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거다. 이 넓은 저택 복도를 지나 덱스터를 찾아가기도 힘들겠지.

이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술이 고팠다. 그녀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헬레나에게 물었다.

“저도 한 모금만 마셔 보면 안 돼요?”

시녀들은 아주 잠시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하얀 슬립을 입고서 빨간 곱슬머리를 풀어헤친 이리아는 하녀들 사이서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이리아는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독한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의 음주 습관을 처음 본 하녀들은 일제히 기겁하며 위스키 잔에 급히 물을 섞기 시작했다.

군대에서와 달리 안주를 조금씩 먹기는 했으나, 취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순식간에 취기가 오른 이리아는 이유 없는 웃음을 실실 내뱉으며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꼬았다.

“다, 다…… 다들 술을 어, 엄청나게 잘 마시네…….”

“아가씨께서 술에 조금 약하시네요. 자, 안주도 같이 드세요. 술만 마시면 몸 상해요.”

“여, 여기는 아…… 안주가 많아서 좋다. 아, 아니, 군대에서는 여…… 여기부터 쩌기까지 다아-고기였다니까?!”

먹을 게 없었어, 먹을 게! 이리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다가 로샨이 건네준 구운 완두콩을 급히 씹어 삼켰다.

로샨이 계속해서 술잔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리아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군대에서는 많이 바쁘셨나요?”

“그, 그럼! 아……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종일 이, 일했지! 아, 아침마다 데…… 덱스터 하워드 얼굴 보기 싫어서 확 물에 빠, 빠뜨리고 싶었어!”

“아가씨께서는 군에서도 주인님을 좋아하셨나 봐요.”

“조, 좋아하긴 무슨! 걔 엄청 나쁜 놈이야. 나…… 난 걔 싫어!”

“짝사랑하는 남자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여인의 특징이죠.”

“아니야! 그, 그놈은 진짜 나빠! 나한테 누……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하고, 나, 나랑 모…… 몸 닿는 것도 싫어한다니까!”

하녀들이 하나가 되어 까르르 웃었다. 그들에겐 이리아가 내뱉는 모든 문장이 여인의 새침한 투정과 다름없었다.

취기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리아는 제 몸을 가누는 것마저도 힘겨워했다. 고개를 앞뒤로 줏대 없이 흔드는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군대에서의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

자신의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밀고선 고함치는 덱스터의 모습, 그리고 그의 발밑에서 굴러다니던 보드카 병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급기야 덱스터를 따라 들어간 천막에서 겪었던 첫날 밤의 기억까지도 흐릿하게 떠오르니, 이리아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기억 저편으로 거의 사라졌었던 ‘그날’ 밤의 짧은 대화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기분이 어때? 계속해도 될 것 같아?’

‘기, 기분 좋아. 이…… 이래서 인생에서 꼭 한 번은 해 봐야 한다고 했나 봐.’

쿵!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시끌벅적했던 술자리에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시녀들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테이블 모서리에 제 허벅지를 박은 이리아는 두 귀를 감싸고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날’ 밤의 대화 따위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게 다 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리아는 한밤중의 찬 바람이라도 맞기 위해 비틀거리며 자리서 일어났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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