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109)

25화

05.

이리아는 재빨리 머리카락을 헤쳐 앞을 가렸다. 쿵쿵. 미친 듯이 튀어 오르는 심장 박동이 두 귓가를 먹먹하게 메웠다.

‘……알아봤을까?’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바꿨다 해도, 얼굴은 그대로였다. 카즈웰 4세가 이리아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를 못 알아봤을 리 없다.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덱스터의 뒤에 숨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카즈웰 4세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뜻으로 다리에 힘을 줘 보았지만, 덱스터는 이리아의 힘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카즈웰 4세는 가볍게 백마에서 내려왔다. 그가 거대한 깃털이 달린 모자를 떨어뜨리자, 시종이 허겁지겁 공중에서 받았다.

“승전을 했는데 황제 폐하께만 얼굴을 비추고 내게 안 찾아온 건 너무 정이 없지 않은가, 하워드 공?”

“그러잖아도 곧 찾아뵐 예정이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그 말을 하고 날 한 번도 안 찾았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덱스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보였다. 보기에는 멀쩡한 웃음이었지만, 숨소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카즈웰 4세와 덱스터 사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황 파악에 둔한 이리아도 알아차릴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덱스터는 황태자의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위해서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부모를 희생당한 남자였다. 부모의 장례식들이 마무리되자마자 목숨 보전을 위해 군대로 도망쳐, 계획에도 없던 군인 생활을 15년 넘게 했고. 황태자를 증오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카즈웰 4세는 덱스터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신장의 소유자였다. 그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선 한동안 덱스터를 내려보다가, 그의 뒤에 숨어 있는 이리아에게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나저나, 약혼자를 새로 맞았다던데…….”

이리아가 덱스터의 뒤로 더 깊게 숨어들었다. 카즈웰 4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순간, 덱스터가 이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일렀다.

“아직 귀족의 예법을 온전히 익히지 않은 여인입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아, 전쟁터에서 만났다고 했었지. 잠시 잊고 있었네.”

지금은 바로 앞에 있는 덱스터가 그리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더 앞으로 내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카즈웰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묵묵히 명령했다.

“얼굴을 보여 봐라.”

이리아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녀가 도와달라는 의미를 담아 덱스터를 올려다보았지만, 이리아의 머릿속을 모르는 덱스터에게 뜻이 통할 리 없었다.

제발. 제발 저 남자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않기를.

터지도록 뛰는 심장 박동이 정수리까지 흔들어 대는 기분이었다. 이리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새빨간 머리카락을 좌우로 넘겼다.

카즈웰은 드러난 이리아의 얼굴을 속속들이 살폈다. 얼굴의 모든 부분을 거쳐 간 그는, 마지막으로 커다란 녹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특이한 눈 색을 가졌구나. 이민족의 피가 섞인 자들은 희귀한 보석만큼이나 매혹적이지.”

기억하지 못하나 봐. 이리아가 굳었던 어깨를 풀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지만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카즈웰의 낮은 목소리가 두 귀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굉장히 낯이 익은 듯한데…….”

쿵.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급기야 멎어 버렸다.

이리아는 흔들리는 눈망울로 카즈웰을 바라보았다가, 그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아니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할 거야. 몇 년 전에 잠깐 만났을 뿐이잖아. 게다가 지금은 그때와 머리 색과 눈 색도 달라. 제발, 제발 내 얼굴만이라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말아라…….’

이리아는 애써 자신을 스스로 안심시켰지만, 이미 그녀의 옷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덱스터의 셔츠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가 나직이 웃으며 셔츠를 쥐고 있던 이리아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긴장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새빨간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요. 어느 귀족의 여인과 닮은 것이겠지요.”

“그대의 약혼자처럼 생긴 귀족 여인이 있었던가?”

“전하 주변엔 아리따운 여인이 많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카즈웰이 대답하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덱스터가 카즈웰 모르게 다가오는 루시어스에게 눈치를 주었다. 루시어스는 카즈웰을 향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리아를 불렀다.

“아가씨.”

이리아는 루시어스가 이끄는 대로, 굳어 버린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두 남자를 힐끔거리던 이리아가 복도 창문을 닫기 시작한 루시어스에게 질문했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주 오시나요?”

“자주는 아니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종종 오십니다. 이번에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찾아오신 것 같군요.”

귀족 사회의 흔한 친목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서나 업무 때문에 덱스터를 찾아오는 듯했다. 아마 전자가 더 큰 이유겠지.

덱스터가 황태자의 사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염려해야 했었다. 이리아는 자신의 무지함과 둔함에 혀를 차고선, 커튼 틈으로 덱스터와 카즈웰 4세를 지켜보았다.

‘만일 카즈웰 4세가 뒤늦게 루퀼렘에서 만났던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떠올리고, 내 얼굴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덱스터 하워드에게 알린다면…….’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아는 카즈웰 4세는, 지금의 이리아에게 터지기 전의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카즈웰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이리아의 심장은 뛰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거대한 신장을 자랑하며 함께 성큼성큼 실내로 들어섰다. 이리아는 그들이 응접실로 향한다는 걸 깨닫자마자 다급히 뒤를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복도 한가운데서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만일 이리아가 둘의 대화를 염탐하다가 걸리면, 카즈웰 4세에게 정체를 의심받을 게 뻔했다. 분명 염탐한 이유를 추궁하겠지.

‘절대 의심을 받으면 안 돼. 절대로!’

복도 한가운데 멈춘 이리아의 시야 안쪽으로 문득 익숙한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콘라드의 편지를 전해 주었던 시동이었다.

이리아가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저기, 자……잠깐만요!”

시동이 길을 가던 걸 멈추고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이리아는 왠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선 그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친구는 이름이 뭐예요?”

“루인 웨스틴이요.”

“루인은 글 쓸 줄 알아요?”

루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아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녀가 외투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양피지 조각과 잉크 펜을 꺼냈다. 외투 주머니에 항상 필기구를 넣고 다니는 건, 양피지를 쉽게 구할 수 없던 군부대에서 만들어진 습관이었다.

이리아가 루인의 손에 양피지와 펜을 꼭 쥐여 주며 부탁했다.

“그럼 혹시 응접실에 가서 하워드 공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적어 줄 수 있나요?”

“염탐은 나쁘다고 했어요, 아가씨.”

“여……염탐이라뇨!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루인의 눈동자 속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지. 이리아는 결국,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에게만 통하는 ‘그’ 회유책을 쓰기로 했다.

그녀가 루인의 눈앞에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사탕 다섯 개 줄게요!”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루인은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눈동자를 부라리며 코앞의 이리아를 응시했다.

‘이……이게 아닌가?’

이리아의 목덜미에서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회유 실패를 확신한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루인의 입이 열렸다.

“열 개 주세요.”

“조…… 좋아요. 열 개! 대신, 제가 부탁한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그럼 사탕 세 개 더 주세요.”

“세 개는 나중에 줄게요. 지금은 주머니에 딱 열 개밖에 없어서요.”

루인은 사탕 세 개를 나중에 받는다는 사실이 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열 개도 일단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는 사탕 열 개를 약속받자마자 양피지를 손에 쥐고선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어린아이이니까 크게 의심을 하지도 않을 거야.’

이리아는 루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에,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초조함은 배가 되었다.

“아가씨.”

“네-?!”

로샨과 이리아가 동시에 펄쩍 뛰었다. 로샨이 양손 가득 들고 있던 화병을 떨어뜨리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녀가 봄꽃들이 환하게 핀 화병들을 침대맡에 장식하며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다리를 계속 떠시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이리아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다리를 더 이상 떨지 못하도록 양 무릎을 세워 팔로 감쌌다.

이리아는 무릎 사이에 코를 파묻은 채, 루인이 가지고 올 양피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하녀들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들에게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오는 길에 누군가가 쓰다듬었는지, 루인은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함께 돌아왔다. 그는 양피지를 받은 이리아가 약속대로 사탕 세 개를 더 주자마자 후다닥 도망쳤다.

이리아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녀가 글을 반 이상 읽었을 즈음, 커다란 녹빛 눈동자는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리아의 손아귀 아래서, 양피지는 무참히 구겨졌다.

***

쿵. 뒤늦게 들어온 덱스터가 문을 닫았다. 카즈웰 4세는 이미 소파에 편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카즈웰의 손짓을 따라 조그마한 티스푼이 찻잔 안에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는 은으로 만든 티스푼을 털어 색을 확인한 후,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렸다.

카즈웰이 티스푼을 손안에서 굴리는 사이, 희미한 인기척을 느낀 덱스터가 문가를 흘낏 보았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다가, 인기척의 정체가 조그마한 남자아이라는 걸 깨닫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심심한 루인이 문밖에서 서성대는 건, 이 저택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덱스터는 카즈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독은 타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하지만 카즈웰은 은수저가 그대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찻잔에 입을 대지 않았다. 그가 어느덧 창틀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덱스터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 꽤 능력이 있는 남자였군, 하워드 공? 약혼자의 미모가 빼어나서 깜짝 놀랐어.”

“제 약혼자 때문에 이 먼 곳을 방문하신 건 아닐 터이지 말입니다.”

“그렇지. 며칠 전에 황제 폐하께 재미있는 서신이 하나 날아와서 말이야…….”

카즈웰이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덱스터는 탁한 회색빛의 역광에 숨어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카즈웰 4세는 덱스터가 불쾌한 기색을 더 이상 숨기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루 아휜이 우리 제국 국경을 넘겠다더군.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통보였어.”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