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덱스터가 방 뒤편에서 팔짱을 낀 채로 몸을 기대서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깜짝 놀란 듯한 이리아와 눈이 마주치고선, 한쪽 입꼬리를 올려 삐딱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
대체 언제부터 서 있던 거지? 이리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잘못 말한 건 없는지, 그녀는 마음속으로 루시어스와의 대화를 빠르게 되돌려 감았다.
이리아가 반쯤 공황에 빠져 허둥지둥하는 찰나, 덱스터가 팔짱을 풀고선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천천히 내디디며 이야기를 읊듯 말했다.
“피부는 정밀하게 세공된 대리석만큼이나 창백하고, 머리카락은 얼룩 하나 없이 하얗고 깨끗했지. 핏기가 보이지 않는 이목구비 위에는 별을 담은 듯 빛나는 노란색의 눈동자 한 쌍이 박혀 있더군.”
어느덧 이리아의 바로 옆에 선 덱스터가 책 표지를 덮었다.
탁. 두꺼운 종이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며 이리아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덱스터는 어깨를 잘게 떨기 시작한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
“참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한 자들이었어.”
간혹 이민족의 피가 섞인 루퀼렘인은 비센티움인들처럼 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였다. 하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는 루퀼렘인 고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민족 대다수가 가진 외모였다.
과거 대륙의 마법사들이 핍박을 받았던 것도 그들의 외모 탓이 컸다. 공장에서 찍어 낸 듯한 마법사들의 일정한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타민족들은 무척이나 기괴하다고 여겼다.
‘어떤 연유로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덱스터 하워드도 루퀼렘인을 만났을 때, 분명 우리의 모습이 기괴하다고 생각했겠지.’
이리아가 덱스터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슬쩍 시선을 올렸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덱스터는 고개를 루시어스에게로 휙 돌려 버렸다.
그가 태연하게 책을 정리하기 시작한 루시어스에게 핀잔 어린 한마디를 던졌다.
“이렇게 급히 수업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잖나, 루시어스.”
“빨리 시작하는 게 아가씨께도 이롭습니다. 오늘 보니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시간이 지나면 배워야 할 내용이 훨씬 방대해질 텐데, 지금부터 차츰차츰 기초를 잡아 두는 게 좋습니다.”
“……너와의 말싸움에서는 도통 이길 수가 없어.”
덱스터가 고개를 양옆으로 천천히 내저었다. 그는 이어, 이리아의 책들을 빠르게 쌓아 올려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뜻하지 않게 허둥거리며 덱스터를 따라나섰다. 덱스터는 그의 어깨 아래서 총총걸음으로 따라붙는 이리아를 보자마자 다정스레 웃었다.
“너무 지루한 수업을 듣게 만든 것 같아 당신한테 미안해지는군.”
“아, 아녜요. 재밌었어요.”
“루시어스에게는 수업 시간을 한 시간이라도 늦추도록 설득해 볼게. 군대도 아닌데, 당신이 너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같아.”
“공께서 그러시겠다면…….”
“수업을 늦추면 어제처럼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 필요 없을 거야.”
어젯밤 빨리 잠자리에 들었던 건 루시어스가 아니라 바로 옆의 남자 때문이었다.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대화는 몇 개의 문장으로 끝이 났다. 이리아와 덱스터는 화창한 햇살이 스며들어 온 복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덱스터의 보폭이 어느덧 이리아의 것에 맞추어 짧아져 있었지만, 앞만 보고 있는 이리아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침실로 곧장 향하리라 생각했던 덱스터는 계단을 지나 저택 로비까지 내려갔다. 급기야 저택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이리아가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정원.”
덱스터가 책들을 석조 기둥 위에 두며 덧붙였다.
“봄이 와서 그런지, 오늘 날이 너무 좋아. 이런 날에 당신과 산책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더군.”
이리아는 뒤늦게 정원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흑마를 발견했다. 퀸터는 이리아를 알아보았는지, 긴 말꼬리를 흔들며 푸르릉 콧김을 내뿜었다.
덱스터가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이리아의 손을 풀어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뽀얀 손등 위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입술은 상당히 오랜 시간 머물러 있다 떨어졌다. 입맞춤을 끝낸 덱스터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제 약혼자를 밖으로 이끌었다.
이 남자가 왜 이리 내 몸에 키스를 많이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리아는 입술이 왔다 간 손등을 어색하게 문지르며 그와 함께 걸었다. 산책에는 퀸터도 함께했다.
봄을 맞이하여 맺힌 꽃봉오리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들을 반겼다. 덱스터와 함께하여 긴장했던 마음도, 꽃들을 보고 있으니 차차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이리아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곳에 고정되었다.
정원을 거닐면서도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덱스터가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무엇을 그리 빤히 보는 거야?”
“예쁜 나비님이 왔어요.”
이리아가 말을 하기 무섭게, 새하얀 히아신스 위로 범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나비를 향해 작게 웃어 보이는 이리아를 따라, 덱스터도 천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당신은 참 꽃과 나비를 좋아하는 것 같아. 군대에 있을 때도 걸어가다가 나비가 날아오면 멈춰 구경하곤 했잖아. 언젠가는 나비에 정신이 팔려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
“그……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무도 못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못 봤을 리가. 내가 다 봤는데.”
이리아가 흔들리는 눈망울로 덱스터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진했던 그의 미소는 어느덧 옛 추억을 회상하는 듯, 한없이 애틋하게 변해 있었다.
“나뭇가지 위의 부엉이에게 손을 흔든 것도, 모닥불에 포도주를 뿌린 것도, 새벽에 남몰래 퀸터의 곁에서 울던 것도 내가 다 봤지.”
이리아의 두 눈이 더욱 거칠게 흔들렸다.
부엉이에게 손을 흔든 건 똘똘하게 생긴 게 왠지 마주 인사를 해 줄 것 같아서였고, 모닥불에 포도주를 뿌렸던 건 포도주도 술이니 불이 더 세게 타오를까 궁금해서였다. 새벽에 남몰래 퀸터의 곁에서 운 것은, 틸다가 그리워서였고.
그 장면들은 덱스터가 모두 봤다고 생각하니, 순식간에 이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모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들이었는데…….
“그걸 왜 다 보셨어요…….”
아.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확인한 덱스터의 잇새서 작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그가 감미로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보이는 걸 어떡해?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눈에 띄는 빨간 머리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아.”
덱스터가 허리를 숙여 구불구불한 빨간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온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문득 이리아의 머릿속에 콘라드의 편지 한 구절이 떠올랐다.
덱스터와 그녀가 대화가 너무 부족하다는 구절이.
사실 이리아도 자신과 덱스터의 대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덱스터 하워드는 여전히 무섭고 어려운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먼저 말을 걸기란, 맨정신의 이리아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라면 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태양 빛은 따스했고, 바람은 좋았다. 눈앞의 덱스터는 웃고 있으니 금방 화를 낼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쥐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최…… 최근 들어 공께서 많이 살가워지신 것 같아요. 제 앞에서 과거 이야기도 하시고…….”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다행이야.”
“원래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야, 약혼자라는 이유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굳이 살가워지실 필요 없어요.”
“그런 이유로 당신을 다정하게 대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럼 왜? 이리아가 무언의 질문을 담아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덱스터가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있던 이리아의 두 손을 풀어 마주 쥐었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나직하게 웃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경험해 보고 깨달았어. 당신은 보통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해.”
덱스터의 손이 팔을 타고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또다시 시선을 피하기 시작한 이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을 감싸는 손길이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그가 애처롭게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돌려 전하면 눈치채지 못해.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믿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난, 주어진 석 달 동안 당신을 내게 천천히 스며들도록 만들어 보려고.”
과거나 지금이나, 이리아에게 덱스터의 문장들은 수수께끼투성이였다.
그녀가 조그마한 머리를 열심히 굴려 그의 말을 해석하기 시작할 찰나, 눈앞에 그림자가 지며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쪽. 입술과 뺨이 맞물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감미롭게 울렸다. 입맞춤은 저택에 온 첫날, 창틀에 앉아 있던 이리아가 받았던 것만큼이나 가벼웠다.
덱스터는 키스를 마치고선 천천히 멀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런 그의 옷깃을 이리아가 먼저 덥석 잡았다. 이리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내뱉었다.
“저, 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워드 공. 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잖아요. 저한테 죽여 버린다고 소리치셨던 그때랑……!”
덱스터의 폭언은 이리아에게 평생토록 잊지 못할, 최악의 기억이었다. 그 당시를 떠올리는 이리아의 눈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쏠리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 아래를 보고선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흘렸다. 덱스터도 마찬가지로, 그가 폭언을 내질렀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이리아와 덱스터의 시선이 가까운 허공에서 맞닿았다.
폭언을 내뱉었던 사람, 그리고 그 폭언을 들었던 사람. 두 남녀는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덱스터의 미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가 답지 않게 기운이 다 빠져 버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퀼렘 사람들의 마법이 처음으로 부러워지는군. 내가 마법을 쓸 수만 있었다면, 그때의 기억을 당신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지워 버렸을 텐데…….”
덱스터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선 다음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나는…….”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꽃을 뜯어먹고 있던 퀸터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깜짝 놀란 덱스터와 이리아는 동시에 서로의 손을 확 떼어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퀸터와 정 반대되는 거대한 백마를 타고선 저택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말 위의 탄 남자는 덱스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가에 조소를 흘렸다.
휘잉. 서로를 노려보는 두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동시에 바람에 흩날렸다.
덱스터가 허리를 펴며 나직이 읊었다.
“아쉽지만 오늘 산책은 여기까지군.”
쿵쿵.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이리아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저 남자, 루퀼렘 성에서 만났던 적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빨간 머리 ‘씨시 힐데어’가 아닌, 하얀 머리를 가진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이었고, 루퀼렘의 군주로서 그를 상면했었다.
남자는 꽤 긴 시간 정원에 서 있는 두 남녀를 응시하다가, 뒤늦게 첫 마디를 꺼냈다.
“얼굴빛이 참 좋아 보이는군, 사촌.”
그는 덱스터의 사촌이자, 비센티움 제국의 황태자.
카즈웰 4세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