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혹시 덱스터가 왔나 반쯤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서 있는 이는 이리아의 가슴까지도 닿지 않는 키의 어린 시동이었다.
“아가씨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어요.”
“……제 앞으로요?”
이리아는 비센티움에 인연이 많지 않은 자였다. 그녀 앞으로 편지를 쓸 이는 딱히 없을 텐데.
이리아는 얼떨결에 편지를 받아 들었다. 여행객에게나 팔 것 같은 화려한 편지지 위에는 보내는 이의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우편이 아니라 인편으로 보낸 편지인 듯싶었다.
덱스터와 같은 검은 머리의 어린 시동은 편지를 줬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두 눈동자를 똘망똘망 빛내며 계속해서 이리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칭찬을 해 달라는 건가?’
이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하지만 이게 아니었나 보다. 여전히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무안해진 이리아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물음표들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둘을 지켜보고 있던 로샨이 뒤늦게 달려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엄지손가락만 한 알사탕이었다.
“에구, 또 시작이네. 주인님께서 심부름을 하면 사탕을 받는 버릇을 들여놨더니, 아가씨께도 이러네요.”
아이는 사탕을 받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이리아는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아이의 볼을 빤히 쳐다보다가, 실없이 웃고 말았다.
‘나도 한때 저랬었지…….’
대마법사가 무엇인지, 여신이 무엇인지 모르던 어린 이리아에게 루퀼렘 성안에서 해야 하는 기도들은 불쾌하고 귀찮을 뿐이었다. 그녀가 하기 싫다며 칭얼거릴 때마다 루 아휜은 다른 사람 모르게 손아귀에 사탕을 하나씩 쥐여 주었었다.
이리아는 기도가 끝나고 먹으라던 루 아휜의 말을 무시하고, 사탕을 받자마자 홀랑 입 속에 집어넣곤 했었다. 그리고 저 조그마한 시동만큼이나 맛있게 사탕을 쪽쪽 빨아 먹었다.
‘그리워하면 안 돼. 거긴 날 가둬 두었던 곳이라고.’
이리아는 순식간에 튀어나온 루 아휜의 얼굴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버리고선, 보낸 이를 모르는 편지 봉투를 뜯었다.
이리아는 편지의 첫인사를 보자마자 픽 웃고 말았다.
<안녕, 장군님. 나 콘라드 메이필드.>
간단한 인사 아래로, 기상천외한 악필이 쭉 이어졌다.
<편지 보내서 깜짝 놀랐지? 감동했지? 역시 이 오빠밖에 없지? 너무 멋있어서 나한테 반할까 봐 걱정이네. 난 죄 많은 남자.
덱스터 하워드 그 개새끼……. 내 언젠가 일을 치를 줄 알았지. 약혼자를 맞았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편지를 보내 봤는데, 그 약혼자가 바로 너라는 엄청난 답장을 받은 거 있지? 난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다, 야. 덱스터 하워드 그 새끼가 드디어 미쳐서 망상증에 걸린 줄 알았어.
있잖아, 씨시. 지금껏 여자친구를 무수히 많이 사귀어 온 이 몸이 조언 하나 하자면, 덱스터 하워드랑 너는 대화가 너무 부족해. 아직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없지? 나는 너희 결혼이 파투 나든 말든 신경 안 쓰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파투 나는 게 더 기쁨. 너는 잘 모르겠지만, 덱스터 하워드 아래서 일해 온 나로서는 그놈이 분통 터뜨리는 꼴을 보면 기분이 째지거든!), 한 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봐.
말하는 데 돈 드는 거 아니잖아? 그 정도 시간은 네 미래 남편을 위해 할애해 줘.
이 오빠는 여행 중이라 결혼식 할 때 즈음 다시 얼굴 보러 온다. 신랑이 못생겼으니까 하객 자리에서라도 잘생긴 내가 얼굴을 빛내 줘야지.
P. S. 물론, 결혼식 파투 나도 오긴 옴.>
종이 맨 아래에는 네 살배기 아이가 그린 듯한 투박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림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이리아만은 단번에 콘라드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있었다.
새하얗고 작은 조랑말. 하늘로 간 그녀의 틸다였다.
이리아가 손끝으로 틸다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반응을 줄곧 살피고 있던 로샨이 진심으로 궁금한 마음에 질문했다.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길래 그렇게 웃으세요, 아가씨?”
“죄 많은 남자요.”
“……네?”
로샨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리아는 그녀를 보고선 장난스레 웃다가,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콘라드의 편지는 받는 순간부터, 라이터와 함께 이리아의 두 번째 부적이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받아 본 편지 덕에 암울했던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언젠가 기운이 없을 때 또다시 콘라드의 편지를 펼쳐 보리라 생각하며, 이리아는 루시어스를 찾았다.
***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루시어스 데이즈먼은 일어난 지 한참 된 듯 말끔한 모양새였다. 그는 탁한 회색 머리칼을 한 올도 빠짐없이 모조리 뒤로 넘기고선, 무뚝뚝한 가정교사의 얼굴로 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루…… 루시어스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
아무리 봐도 저 얼굴이 마흔셋은 아닌데. 마흔셋일 수가 없는데.
이리아는 어제 오후, 하녀들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굳건한 귀족 사회인 비센티움에서는 귀족들의 품위와 교양을 무척이나 중요시했다.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학문이 몇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세계사였다.
세계사라면 루퀼렘 성에서 귀가 빠지도록 배웠다. 이리아는 천 년 전의 고대 역사부터 현재까지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세계사에 관해서는 박식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루시어스의 수업을 들었다.
루시어스는 그녀를 부모 없는 비센티움의 평범한 아가씨로 알고 있었다. 괜한 의심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대륙에는 본래 세 제국과 서른여덟 개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세 제국은 요크 제국, 시어스 제국, 헤르츠만 제국으로, 각자 대륙의 동, 서, 북쪽을 점령하고 있었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헤르츠만 제국이 간신으로 인해 자멸하고 맙니다.”
루시어스가 지도 위, 헤르츠만 제국의 영토 위에 줄 두 개를 그었다. 간신으로 인해 분열된 헤르츠만의 모습이었다.
“헤르츠만 제국을 이끌던 두 대부는(代父) 각자의 정치 뜻과 맞던 신하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한때 철학자였던 휘트필드 공작은 팔런 왕국을, 군 총사령관이었던 던햄 공은 비센티움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리아는 루시어스의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다음 내용을 예상했다.
비센티움을 왕국을 건설한 던햄 공은 나라의 국력과 토지에 욕심이 많은 남자였다. 그가 왕이 된 이후로 처음 한 일은 바로 공립 학원을 설립해 젊은이들에게 군사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대략 15년 정도의 군사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이후, 던햄 공은 왕국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나라의 젊은이들을 징병하여 주변의 왕국들과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은 성공적이었고, 팔런 왕국을 포함한 총 4개의 왕국이 비센티움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한편, 대륙의 동쪽, 요크 제국 옆에 자리 잡고 있던 루퀼렘 왕국에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핍박을 받아온 탓에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국가를 계획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비센티움과 팔런이 전쟁을 하는 틈을 타 먼 북쪽, 엘퀸즈 산맥 안쪽으로 이주한다.
루퀼렘 왕국의 이주를 실행한 대마법사 엘드리지는 정치에 뜻이 없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엘퀸즈 산맥 안쪽에 자리를 잡자마자 능력 있는 정치가를 차기 루퀼렘 왕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
루퀼렘은 온 대륙을 통틀어 정치를 하는 군주와 종교를 이끄는 군주가 따로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이리아가 성을 나서기 전까지,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과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루퀼렘 내에서 동등한 위치로 대접받았다.
국경선을 맞대고 있음에도 끝까지 ‘왕국’이란 이름을 내세운 루퀼렘과 달리, 비센티움은 건국 20년 이후에 던햄 공의 칭제를 통해 ‘제국’으로 승격된다.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낸 던햄 공의 칭제에 감히 반대표를 던질 국가는 없었다. 그렇게 비센티움이 승격됨으로써, 대륙에는 다시 세 개의 제국이 굳건히 자리하게 되었다.
비센티움 제국은 군사적 힘으로 세워진 나라이기에 지금까지도 힘과 병력을 중요시하고, 어린아이들에게 일찍부터 힘을 기를 훈련을 시킨다. 반면 루퀼렘 왕국은 폐쇄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종교적 이념에 따라 절대적인 평화를 강조한다.
‘훗…….’
이리아는 루시어스의 말과 자신이 예상한 내용이 같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작게 코웃음 쳤다.
루퀼렘 성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자신이 아주 조금,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루시어스가 준 세계사 도서는 루퀼렘 성에서 공부했던 도서와 약간의 내용 차이가 있었다. 이리아가 흥미로운 마음에 이것저것 살펴보는 동안, 루시어스가 말을 이었다.
“흔히 종교적 이유로 루퀼렘 왕국민들은 모두가 아가씨와 같은 채식주의자라고 하죠. 분명 엄청난 양의 작물을 길러내야 할 텐데, 그 작물들을 모두 마법으로 관리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모, 모두가 채식주의자라니 설마요. 그 많은 국민이 어떻게 전부 채식주의자겠어요?”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렇습니다만, 아가씨의 말씀대로 그 많은 국민이 전부 채식주의자이기엔 좀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루시어스가 책 페이지를 넘기며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를 보고 있는 이리아는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해 미칠 것만 같았다.
루퀼렘 왕국민들은 대부분이 여신을 모시는 수도자인 만큼,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많았다. 하지만 여신을 거부하는 소수의 왕국민은 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리아는 국교를 수호하는 자로서, 이들에게 신앙심을 심어 주기 위해 루 아휜과 함께 직접 만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굳건한 무신론자들에게 종교를 전도하기란 쉽지 않았고, 번번이 실패했던 기억이 있었다.
‘루퀼렘에도 고기 먹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말해 주고 싶다…….’
원래 같은 국민보다도 외국인이 잘못된 정보를 가졌을 때 더 고쳐 주고 싶은 법. 루퀼렘의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근질거리는 입을 참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언제부턴가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루시어스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투로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신기한 나라입니다, 루퀼렘은. 두 군주가 서로 권력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만일 루퀼렘이 비센티움과 같은 사회였다면, 분명 두 군주 중 한 명은 독살당했을 겁니다.”
“도…… 독살…… 정치와 종교가 그만큼 잘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겠죠.”
“긴 역사 속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던 국가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꼭 정치가 종교를 먹거나, 종교가 정치를 먹어 버렸죠.”
“설마 루퀼렘도 그러겠어요……?”
“하긴,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과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의 힘이 둘 다 막강하다 하니 근 50년 동안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리아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루시어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니,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루시어스는 몇 번이고 그녀를 재차 언급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루퀼렘 하늘의 두 달을 쏘아 올렸다고 하죠. 마법이란 게 대체 뭔지, 저의 머리로는 그녀의 힘을 가늠하기가 참 힘들군요.”
“그래도 이, 이리아 아델리어는 정치적 면에서는 전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잖아요. 아마 그 방면으로는 전혀 능력이 없을걸요…….”
“들리는 말에 따르면 지난 비센티움와 루퀼렘의 정상회담 때 황태자 전하와 담화를 원활히 나누었었다고 하더군요. 권력은 없지만, 정치에 전혀 소질이 없진 않은 듯합니다.”
“어……. 황태자 전하와 담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정치에 소질이 있다고 치부하기엔 근거가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당시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겨우 열다섯이었습니다. 제아무리 한 나라의 군주라 하여도, 이웃 제국의 황태자와 단둘이 말을 하기는 쉽지 않죠.”
이리아는 맞장구를 쳐야 하나, 아니면 부정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루시어스 데이즈먼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리아가 5년 전의 정상회담 때 비센티움의 황태자를 만나 상당히 능숙하게 담화를 나누었던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루 아휜이 써 준 대사들을 줄줄 읊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대사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걸 눈치챈 듯했지…….’
이리아가 남몰래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언제나 조금 창피해졌다.
루퀼렘에 관한 대화는 이후에도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루시어스는 생각보다 루퀼렘에 관심이 많은 교사였다. 루퀼렘 사회의 폐쇄성과 신비스러움이 그의 흥미를 돋운 듯해 보였다.
비센티움에 온 이후로 언제나 루퀼렘에 관한 험담만 들었던 이리아였기에, 그녀는 루시어스와의 대화가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웠다. 옛 고향을 제대로 존중해 주는 비센티움인은 루시어스 데이즈먼이 최초였다.
둘의 대화는 어느덧 루퀼렘의 정치 체계,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 여신을 믿는 종교를 지나 루퀼렘 ‘사람’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제가 읽은 도서에 따르면, 루퀼렘 사람들은 몸에 멜라닌 세포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멜라닌 세포 대신,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특정한 세포가 자리하고 있다 하더군요.”
“피부가 창백하고 머리카락도 하얀 게 그런 이유에서인가 봐요.”
“멜라닌 세포가 없는데 피부가 성한 게 신기합니다.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드는 세포가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나 봅니다.”
“거…… 그러니까 피부가 멀쩡하지 않을까요?”
“아가씨께서는 루퀼렘인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어서, 언젠가 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저…… 저도 없네요. 저도 한 번쯤 만나 봤으면…….”
“주인님께서는 루퀼렘인을 직접 만난 적이 있으시죠?”
어? 이리아가 황급히 등을 돌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