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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3/109)

22화

덱스터 하워드가 황제의 혈족이라면, 그도 정당하게 황위계승권을 가진 계승 후보들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비센티움 수도에 남아 정치를 하지 않고 군대만 전전했다.

‘분명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생길 만도 한데 말이지…….’

이리아가 계속해서 대부인의 초상화를 보고 있는 루시어스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워드 공께서는 정치……를 하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 봐요……?”

“정치판을 혐오하시는 분인데, 정치를 하실 리가요. 주인님께서는 권력 싸움의 최대 피해자이십니다. 어렸을 적 독살로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때 자객으로 아버지를 잃으셨죠. 모두 황태자의 안정적 황위 계승을 위해 황비가 꾸몄던 일입니다.”

“저, 전 하워드 공작 부부가 열병과 사고로 사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건 다 헛소리……!”

큼큼. 루시어스가 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황실이 만들어 낸 가짜 소문입니다. 귀족들의 세계 안에서 들리는 걸 곧이곧대로 믿는 건 옳지 않습니다, 아가씨.”

이리아의 입 안이 씁쓸해졌다. 직계 비속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여신과 마법의 선택을 통해 차기 왕을 정하는 루퀼렘에서는 권력 찬탈 싸움이 드물었다.

하지만 비센티움은 달랐다. 비센티움은 엄격하게 자신의 혈족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가족 중심적 상속 사회이기에, 권력 찬탈 싸움이 잦았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황제의 권력이 흔들릴 때면 귀족들이 이유도 모르게 떼거리로 죽어 나간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덱스터가 황위 찬탈 싸움에 엮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막상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루시어스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리아에게 떠보듯 질문했다.

“그나저나, 아가씨의 질문은 제 예상 밖이군요. 주인님으로부터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못 들으셨나 봅니다?”

“뭐, 그…… 그렇죠.”

이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들었을 리가 없지. 나랑 덱스터 하워드는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나눠 본 사이인데.

루시어스는 이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전 하워드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이리아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럼 하워드 공은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홀로 살아온 건가요?”

“그래.”

헉. 이리아가 기겁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 온 건지, 그녀의 옆에는 루시어스가 아닌 덱스터가 서 있었다.

덱스터가 당황한 빛이 역력한 이리아를 보고서 비딱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이리아가 예쁜 얼굴을 가릴 수 없도록, 말하기 전에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전부 넘겨 버렸다.

“아버지, 어머니 다음의 희생양은 나였어. 황실로부터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전쟁터로 도망쳤지. 사실 난 처음부터 군인이 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전쟁터에서 군인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진짜 군인이 되어 있더군.”

덱스터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그는 부모님이 권력 때문에 친족에게 살해당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어머니께서 지금의 내 꼴을 보시면 크게 노하실 거야. 전쟁을 죽도록 싫어하는 분이셨거든.”

이리아는 덱스터의 말끝에 은근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유감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그녀가 마음속으로 온갖 대답을 고민하고 있을 때, 덱스터가 다가와 왼쪽 손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덱스터가 잡은 손의 엄지에는 그가 끼워 준 금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신 손가락에 끼워진 이 반지는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사랑을 고백할 때 드렸던 반지야. 언젠가 나도 결혼하게 될 여인이 생기면 이걸 꼭 끼워 주고 싶었어.”

작게 신음성을 흘린 이리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느덧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가 덱스터에게 물기 어린 목소리로 토로했다.

“저…… 저랑 결혼해도 좋을 것 하나 없을 거예요.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많으니까 상관없어.”

“우,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이름이랑 얼굴만 아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요?”

“그래서 석 달을 줬잖아. 석 달이면 서로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귀족들은 가문을 보고 결혼하는 거 아닌가요? 전 명문가의 피가 없는 평민인데…….”

“좋네. 나도 부모님을 잃은 후엔 한동안 평민이었거든. 내게 가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이리아가 잔뜩 울상인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변함없이 덩치가 어마어마한 덱스터는 머리 두 개가 차이 나는 높이에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덱스터가 천천히 이리아의 손을 들어 올려 투박한 금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금반지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노력할게.”

저는 루퀼렘의 대마법사예요, 하워드 공.

이 말이 이리아의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마법을 혐오하여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군단장 앞에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대체 어떤 말을 해야 덱스터 하워드와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석 달 후의 결혼식과 그 이후에 이어질 나날들을 생각하니 이리아는 너무나도 암울해졌다.

루퀼렘에서 바랬던 자유는 이런 게 아니었다. 덱스터와 결혼하면 남은 생이 온통 불행으로만 가득 찰 것 같았다.

***

덱스터는 군대에 있을 때 밀린 가문 일을 처리하러 집무실로 가 버렸다.

저택을 더 구경할까 잠시 고민했던 이리아는, 이 기분으로는 아무리 저택을 구경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침실로 돌아갔다.

이리아가 침실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침구를 바꾸고 있던 하녀들이 아는 척을 해 왔다. 새롭게 바뀌는 침구는 다가오는 봄 날씨에 따라 이전 것보다 훨씬 더 얇고 화사했다.

침구 다음으로 이리아의 시선에 들어온 건 테이블 위에 높이 쌓여 있는 책들이었다. 두꺼운 양피지로 제본된 책들은 언뜻 봐도 평범한 소설책은 아니었다.

군부대에서는 단 한 번도 책이라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 이리아에게는 거의 1년 만에 보는 책들이었다.

문득 반가움을 느낀 이리아가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이 책들은 다 뭔가요?”

“아, 방금 루시어스 씨가 전해 드리라는 말과 함께 급히 놓고 가셨어요. 아가씨께서 익히셔야 할 교양 도서들이래요.”

“……네?”

반가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리아가 급히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로샨의 말대로, 루시어스가 놓고 간 책들은 하나같이 작고 빽빽한 글씨가 가득한 교양 도서들이었다.

이리아는 적극적인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루퀼렘 성에서 살았을 적엔 수업을 듣기 싫어 루에게 꾀병을 부렸던 적도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이리아의 발밑으로 작은 쪽지가 하나 툭 떨어졌다.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쪽지 위에는, 루시어스의 우아한 필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전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신부 수업의 일환으로 당장 내일 아침부터 교양을 들으셔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배울 내용이 ‘정말’ 많습니다. 루시어스가 뒤늦게 덧붙인 듯한 쪽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원치 않은 신부 수업까지 들어야 한다니.’

이리아는 아무도 없는 산속에 가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덱스터가 더 원망스러웠다.

그러잖아도 영 별로였던 기분이 땅끝까지 푹 꺼지는 느낌이다.

이리아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침대맡에 꽃장식을 붙이던 로샨에게 물었다.

“루시어스 씨께서 직접 저를 가르쳐 주시는 걸까요?”

“아마 그러실 거예요. 지금은 집사로 계시지만, 사실 루시어스 씨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귀족 부인들 사이서 되게 유명한 가정교사셨거든요.”

아아. 이리아가 아무 생각 없이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로샨의 문장 속에서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이리아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수를 세기 시작했다.

“루시어스 씨가 10년 전까지만 해도 가정교사셨다고요? 그, 그렇다면 대체 몇 살 때부터…….”

저택의 집사인 루시어스 데이즈먼은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가정교사였다는 로샨의 말은, 그가 열다섯 즈음에 가정교사 일을 그만두었다는 뜻과도 같았다.

혼란스러운 이리아의 얼굴을 알아챈 하녀들이 깔깔 웃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소리쳤다.

“루시어스 씨는 올해로 마흔셋이세요, 아가씨!”

뭐? 이리아의 턱이 떡 벌어졌다. 덱스터 하워드가 황태자의 사촌이라는 사실보다 실로 다섯 배는 더 충격적이었다.

‘그……그 얼굴이 마흔셋일 수가 있나?’

루시어스는 마흔셋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동안의 소유자였다. 언젠가 콘라드 메이필드가 스물일곱이라고 들었었는데, 그런 그와 동갑처럼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리아와 같은 빨간 머리를 가진 하녀, 헬레나가 책들을 하나둘씩 책장에 꽂아 주며 말했다.

“깜짝 놀라셨죠? 저도 처음에 데이즈먼 씨의 나이를 알았을 때 뒤로 넘어질 뻔했다니까요? 심지어 로샨은 데이즈먼 씨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셋 있는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바로 마음을 접었죠.”

“들리는 말들에 의하면, 첫째 아들은 올해로 스물하나가 되었대요.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와 나이가 같네요!”

“놀라운 점 하나는, 루시어스 씨의 막내아들은 올해로 다섯 살이에요. 첫째와 무려 열다섯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거죠.”

“예전에는 종종 루시어스 씨가 저택에 막내아들을 데리고 올 때도 있었는데…… 어찌나 귀여웠던지 몰라요.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이 천사나 다름없었다니까요?”

“예전이라면…… 지금은 데려오지 않으시나 봐요?”

“아들이 실수로 대륙 너머에서 들어온 비싼 도자기를 하나 깨 버렸었거든요. 주인님께서는 괜찮다고 했는데, 루시어스 씨께서는 신경이 쓰이셨는지 그 후로부턴 데려오지 않고 있네요.”

한 하녀가 보고 싶다는 뜻이 담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의 탄식이 끝나자마자, 하녀들을 또다시 도란도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루퀼렘 성에서는 모두가 이리아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기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꿈도 못 꾸었었다. 비센티움 군부대에서는 다른 간호사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저택의 하녀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리아의 또래 아가씨들이었고, 이리아를 보고서도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다.

하녀들의 수다를 듣고 있으면 이리아도 그들과 같은, 평범하게 태어난 비센티움의 숙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덱스터 하워드와의 약혼 사실만 없었다면, 아마 이 저택을 상당히 좋아했을 테지.’

이리아가 남몰래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덱스터는 저택에서도 군부대만큼이나 바빴다. 그는 대합실에서 만난 이후로 온종일 업무에 시달려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는데, 그건 이리아에게는 몹시나 기쁜 일이었다.

저녁 식사는 치즈를 곁들인 팔라펠(*falafel: 병아리콩 또는 누에콩을 갈아 둥글게 빚어 튀긴 요리) 디쉬였다. 이리아는 혼자서 후식까지 말끔하게 해치운 후, 일찌감치 방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혹시라도 덱스터가 저녁 늦게 그녀를 찾아올까 봐 염려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일찍 잠자리에 든 이리아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로샨이 어젯밤 덱스터가 잠시 들렀다가, 자는 이리아를 발견하고 그냥 갔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덱스터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오후 3시에 잠들 수도 있었다. 이리아는 그의 약혼자였으니 평생토록 피할 수는 없을 테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오래 그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녀들은 아침부터 긴 시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이리아를 배려하여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와 편한 튜닉 셔츠를 입혀 주었다. 군부대에서 입었던 옷차림과 유사했다.

하녀들이 머리를 손보는 사이, 문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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