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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2/109)

21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리아는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록 원치 않았다 하여도 덱스터 하워드와 약혼을 하고 말았고, 석 달 후에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그럼 결혼을 한 이후에는?’

비센티움의 귀족 여인들은 결혼을 하면 가문을 잇기 위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던데, 나도 덱스터 하워드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걸까? 그와 계속해서 밤을 보내야 하는 거야?

코끝이 찡해지며,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지어 그녀는 비센티움 사람도 아니었다. 이름도, 겉모습도, 신분도, 출신도 진짜가 아닌데 어떻게 덱스터 하워드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정말 운이 좋아서 이 저택 밖으로 도망친다 해도, 내겐 갈 곳이 없잖아…….’

분명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인생이 왜 이렇게 꼬여 버렸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퀼렘 성을 나온 게 후회까지 되기 시작하니, 이리아는 도무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감정에 복받친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기 바로 직전, 산통을 깨듯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이리아가 황급히 눈가를 비비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아에게로 다가가던 덱스터는 눈물 젖은 두 눈망울을 마주하자마자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제자리서 나직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추워. 들어와서 앉아 있지 그래?”

그러나 이리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덱스터가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럼 이거라도 입고 있어.”

덱스터의 시선은 아주 오랜 시간 이리아의 가슴팍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양손에 힘줄이 두드러지게 올랐다.

하녀들이 어깨끈을 묶어 주었다 해도, 대부인의 슬립은 이리아의 몸뚱어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컸다. 몸을 완벽하게 감싸지 못한 슬립 탓에, 그녀는 의도치 않게 뽀얀 가슴 윗부분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덱스터는 들끓는 동물적 욕구를 힘겹게 잠재우며 이리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 그런 그의 옷소매를 이리아가 먼저 잡았다.

그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디 가세요……?”

“황제 폐하께 안부 인사를 전하러 황궁에 가야 해.”

덱스터는 최대한 슬립 안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눈물 때문에 발갛게 달아오른 이리아의 눈가를 손등으로 훔쳐 내듯 쓸었다.

“당신이 많이 혼란스럽다는 거 알아. 갑작스러운 결혼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도.”

차마 말로 동의할 수 없던 이리아는 대답 대신, 작은 어깨를 애잔하게 떨기만 했다.

덱스터는 뒤늦게 이리아가 그의 시선을 계속해서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덱스터는 그녀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남자였다. 이리아는 그의 언행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들이 겨우 하룻밤의 동침으로 치유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동침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이리아는 여전히 그를 무서워하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덱스터가 남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 잠시 후회의 조짐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이리아를 놓아줄 생각 따윈 없는 듯했다.

“난 내일 오후에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생각 정리 좀 하고 있어.”

덱스터의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렇게 이리아가 긴장을 푸는 순간. 그의 발소리가 갑자기 다시 가까워지더니,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아 왔다.

덱스터의 입술이었다.

입술은 짧게 닿았다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덱스터가 바싹 굳어 버린 이리아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잘 자.”

덱스터가 완전히 떠난 이후에도, 이리아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뺨을 쓸어 보았다.

입술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뺨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덱스터 하워드가 이럴 리 없다.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이렇게 살가운 ‘뽀뽀’를 할 리가 없어.

‘온 세상이 미쳐 버린 게 분명해…….’

덱스터의 짧은 키스 때문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저택의 침대는 전쟁터에서의 간이침대와 달리, 온몸이 푹 파묻힐 정도로 푹신했다. 그러잖아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리아는 긴 시간 마차까지 탄 탓에 피곤했는지, 두 눈을 감기 무섭게 잠들고 말았다.

이리아가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에 빠진 사이, 로샨이 들어와 창문을 닫아 주었다. 그녀 덕분에 이리아는 다음 날 아침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

저택의 하녀들은 루퀼렘 성의 무녀들만큼이나 귀신같았다. 그들은 이리아가 아침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커튼을 걷으며 인사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지난 1년 내내 새벽부터 일해야 했던 이리아는 눈을 뜨는 순간 습관적으로 시계부터 살폈다.

아침 8시. 전쟁터에서는 꿈도 못 꾸었던 기상 시간이었다.

이리아는 간단하게 크루통(*crouton: 수프에 띄우는 주사위 모양의 빵 조각)이 올라간 브로콜리 수프로 입가심을 한 후, 하녀들을 따라 재단사에게로 향했다.

오후에 돌아올 것이란 덱스터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응접실로 가는 길 그 어느 곳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단사 제임스 오스왈드는 덱스터의 현(玄) 조부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하워드 가문의 옷을 만들어 온 사람이었다. 그는 곧 하워드 가문의 안주인이 될 이리아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깍듯했다.

“팔을 조금만 더 올려 보시죠, 아가씨.”

“이…… 이렇게요?”

“네, 좋습니다.”

제임스 오스왈드는 이리아의 온몸 구석구석의 길이를 쟀다. 줄자를 다루는 손놀림이 몹시나 현란했다.

이리아가 마네킹처럼 우뚝 서서 제임스에게 몸을 맡긴 사이, 하녀들은 긴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 둘을 구경했다.

로샨이 긴 금발을 양쪽으로 땋아 내리며 제임스에게 물었다.

“오스왈드 씨, 옷은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주문표가 상당히 빽빽하더군요. 옷들은 장신구와 함께 주말 즈음에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주, 주말이요? 조금 서둘러 주실 순 없을까요? 이 저택의 옷들은 하나같이 커서, 지금 당장 아가씨께서 입으실 드레스가 한 벌도 없거든요.”

제임스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디자이너와 함께 다수의 드레스를 한꺼번에 재단해야 하는 그로서는, 앞서 말한 시간마저도 촉박했다.

하지만 대신, 그는 임시방편으로 대부인의 드레스를 이리아의 치수에 맞게 줄여 주었다. 제임스가 바느질을 끝냄과 동시에 하녀들은 벌떡 일어나 이리아를 벗기기 시작했다.

비센티움의 어린 하녀들은 루퀼렘의 무녀들보다도 무시무시했다.

도무지 하녀들의 기세를 따라잡을 수 없던 이리아는, 잠깐만이라고 외치기도 전에 완벽한 알몸이 되고 말았다.

커다란 전신거울에 드레스를 입은 이리아의 모습이 비치었다. 검푸른 바탕에 하얀 제비꽃 자수들이 새겨진 드레스는 예뻤지만, 어깨와 다리 부분의 천이 전부 잘려져 있어 이리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깨가 너무 드러난 거 아니에요? 아래 길이도 너무 짧은 것 같은데…….”

“요즘 어린 영애들 사이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래요, 아가씨. 아가씨는 체구가 작으셔서, 이런 드레스도너무 잘 어울리세요.”

어렸을 적 비센티움의 의복 양식에 대해 배울 때, 귀족 영애들은 절대 다리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시대가 변하기는 했나 보다.

이리아는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려 주겠다는 하녀들의 손길을 애써 마다했다. 목덜미와 어깨를 온통 뒤덮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풍성한 빨간 머리카락을 최대한 앞으로 끌어당겨 자국들을 가리고 다녔다.

점심은 치즈가 들어간 프리타타(*frittata: 달걀과 채소를 혼합시킨 재료로 만든 오믈렛)와 가지구이였다.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저택의 요리사들이 오직 이리아를 위해서 어젯밤 외국의 유명한 채식 요리 조리법들을 주문했다고 한다.

덱스터가 없으니 음식들은 잘만 들어갔다.

이리아는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해치운 후에, 저택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하녀들을 졸졸 따라갔다.

“대부인께서는 살아생전 원예를 좋아하셨어요. 대부인 덕에 우리 하녀들은 사계절 내내 꽃 잔치를 치르죠.”

로샨이 이리아의 어깨 위에 외투를 걸쳐 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덱스터의 저택은 이른 봄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꽃밭이었다. 겨울에 피는 꽃들이 아직 지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이 저택은 원래 대부인의 것이었는데, 그분이 운명하신 이후에 소유권이 황실로 넘어갔었어요. 주인님께서는 이 저택을 사들이기 위해 전 재산의 반 이상을 황실에 넘겨야 했죠.”

비센티움의 고전적 건축 양식을 따랐기 때문인지 저택의 전체적인 모습은 성에 더 가까웠다. 이리아가 살았던 루퀼렘의 성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저택의 집사인 루시어스 데이즈먼이 또래 나이대의 하녀들을 배정해 준 덕분에, 이리아는 그들과 쉽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이리아는 저택 소개를 받으며 하녀들과 상당히 친해졌다.

하녀들은 이리아와 덱스터의 사랑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리아는 하녀들이 덱스터를 언급할 때마다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사랑 이야기는 애초에 없을뿐더러, 덱스터가 언급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녀들을 피해 이리아가 간 곳은 저택 대합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합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하녀들에 대한 사실도 잊고선 순식간에 벽에 걸려 있는두 초상화에 시선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저택을 돌아다니던 집사 루시어스가 대합실의 이리아를 발견하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하워드 전 공작 부부의 초상화입니다. 주인님의 어머니와 아버지이시죠.”

둘은 덱스터의 부모님인 만큼, 그와 상당히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선이 굵어 매력적인 미남과 미녀였다.

이리아가 하워드 대부인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대부인께서는 상당한 미인이셨네요.”

“예.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셨죠. 하지만 여성스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대부인께서는 거친 대장군 같은 분이셨습니다. 겨우 다섯 살의 나이에 야생마를 조련하셨으니까요.”

“하워드 공이 부인의 그런 부분을 닮았나 봐요.”

“그런 부분만 닮으셔서 문제죠.”

하하. 루시어스와 이리아는 동시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느덧 루시어스는 액자 속의 하워드 대부인과 깊이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짧은 동화를 읊듯 말했다.

“지금은 늙어 시골에서 요양 중이시지만, 제 아버지께서는 젊었을 적 하워드 대부인을 가르치셨습니다. 뜻하지 않게 황제의 여동생을 가르치는 큰 행운을 누리셨지요.”

“하워드 대부인께서…… 황제의 혈족이신가요?”

“예. 황실의 막내 여동생이셨습니다.”

이리아의 머릿속에 비센티움 황실의 가계도가 빠르게 그려졌다. 비센티움 황실의 가계도 정도는 루퀼렘 성에서 배웠던 내용이었다.

현 비센티움 황제인 카즈웰 3세에게는 한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황제의 남동생은 어렸을 적 독살당했고, 큰 여동생은 성인식을 마치자마자 황제에 의해 외국으로 시집보내졌다.

그리고 덱스터의 어머니, 전 하워드 대부인인 막내 여동생은 비센티움의 어느 공작가로 시집을 갔지만,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열병으로 숨을 거둔다. 그녀의 남편도 머지않아 마차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너무 오래전에 배운 내용이었기에 황제의 막내 여동생이 어디 공작가로 시집을 갔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게 하워드 공작가였다니.

덱스터 하워드가 비센티움 황태자의 사촌이라는 점은 이리아에게 큰 충격을 줬다. 생각보다 훨씬 더 고귀한 핏줄이었던 거다, 덱스터 하워드는.

한참을 바보처럼 눈만 끔뻑이며 말을 잇지 못한 이리아에게 문득 의문점 하나가 떠올랐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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