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04.
덜컹, 덜컹.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이리아의 몸이 들썩였다. 그녀가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눈초리 끝으로 흘끔거렸다.
시선을 느낀 덱스터가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이리아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에 덴 것처럼 황급히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이 반사적으로 의자를 꽉 움켜쥐었다.
덱스터의 영지는 군부대로부터 꽤 먼 소도시였기에, 쉬지 않고 달려야만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아는 덱스터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창밖의 장면이 이리아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덱스터의 저택으로 가고 있었고, 석 달 후에 그와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이리아와 덱스터는 둘 다 마차가 멈출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끔찍한 침묵 속에서, 이리아는 절규 어린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마차는 밤이 되기 전에 저택에 도착했다. 선두에서 말들을 이끌었던 퀸터의 덕이 컸다.
비센티움의 귀족들은 원체 자기 손으로 문고리를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집사나 시종이 문을 열어 주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선 뒷짐을 진 채 문턱을 넘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덱스터는 달랐다. 그는 집사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 있던 집사는 흔하게 있는 일이라는 듯 깜짝 놀라지도 않았다. 그가 군단장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덱스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소규모 토벌전이었어. 승전이라고 할 것도 없지.”
이리아는 그림자 아래 숨어 마차를 내려가는 덱스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센티움의 마차와 루퀼렘의 마차는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평생 비센티움의 마차를 타 본 적 없던 이리아는 혹시라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덱스터의 발 순서를 기억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리아가 발을 내딛기도 전에, 덱스터가 그녀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노, 놓아줘요……!”
“발버둥 치지 마. 그러다 다칠라.”
그는 이리아가 깃털이라도 된다는 듯 가볍게 들었다가 놓았다. 이리아는 땅에 발이 닿은 이후에도 덱스터의 온기가 남은 허리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이리아의 예상외로, 하워드 가문의 집사는 상당히 젊었다. 기껏해야 20대 중반처럼 보이는 그는 이리아를 향해 의아스러운 눈빛을 했다.
덱스터가 작게 미소 지으며 이리아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서신으로 알렸던 내 약혼자야. 결혼 준비가 되는 대로 식을 올리기로 했어.”
덱스터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이리아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그녀와 덱스터는 석 달 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 준비가 되는 대로 식을 올린다니?
비센티움의 귀족들은 정식으로 혼인을 하기 전 황실의 허락을 따로 받아야 하는 데다, 귀족의 품위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식을 성대하게 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평민들은 한 달이면 하는 결혼 준비를 귀족들은 석 달을 넘게 했다.
하지만 순진한 이리아는 귀족들의 결혼 준비가 ‘최소’ 석 달이 걸린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덱스터에게 깜빡 속았다는 사실 또한.
집사는 덱스터의 반 토막도 안 되는 크기의 이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이어 둘을 저택 안쪽으로 이끌었다.
이리아는 착잡했던 기분도 잠시 잊어버리고선, 덱스터의 저택을 정신없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센티움의 저택 양식은 루퀼렘과 완전히 달랐다. 루퀼렘은 검소함을 강조하는 나라였기에 저택 내부가 지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조로웠지만, 비센티움은 부와 명예를 강조하는 나라였기에 저택 내부가 온통 구경거리였다.
이리아는 규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는 와인색 벽지를 구경하다가, 이내 높은 벽면에 빼곡하게 걸린 명화들을 보고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루퀼렘에서는 보통 화가들이 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기에 액자식 그림들을 보기 쉽지 않았다. 덱스터의 저택에서 본 그림이 이리아 인생의 첫 액자 속 그림인 셈이었다.
저택을 요리조리 둘러보는 이리아를 배려하는 걸까, 덱스터가 집사에게 조금 느리게 걸으라는 신호를 줬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장하시겠습니다. 저녁부터 드시죠. 카트린이 주인님께서 돌아오시는 걸 기념하여 칠면조를 구웠습니다.”
“내 약혼자는 고기 요리를 안 먹어. 채식 위주의 음식은 없나?”
“바로 준비하라고 카트린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고기 요리를 안 드신다면 칠면조도 못 드시겠군요. 칠면조가 상당히 크던데…… 요리가 조금 남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나 혼자 전부 해치울 수 있어.”
“……주인님의 먹성은 여전하군요.”
집사의 안내 아래, 이리아와 덱스터는 복도를 쭉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했다. 전쟁터에서는 맡기 힘들었던 고소한 음식 냄새가 이리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집사가 일러 준 대로,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칠면조 고기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비센티움인들의 고기 사랑에 완벽하게 익숙해진 이리아는 이제 고기를 보고도 딴청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죽은 칠면조에게 짧게 명복을 빌어 주었다.
덱스터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가 앉았다. 이리아가 그에게서 가장 먼 의자에 가 앉으려고 했지만, 집사가 한발 빠르게 이리아의 의자를 빼 주었다. 덱스터의 바로 오른편 의자였다.
‘최대한 멀리 앉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바로 옆에 앉아 버렸구나…….’
전쟁터에서 식사할 때도 이렇게 가까이 앉은 적은 없었다. 오늘 먹은 음식은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게 뻔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엄청난 고기 애호가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덱스터의 입맛에 맞추어 모든 음식에 육류를 곁들였기에, 테이블 위에서 이리아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예 없었다.
이리아가 테이블 아래서 한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집사가 그녀 앞에 새로운 음식을 내주었다. 발사믹(*balsamico: 포도주를 숙성시킨 포도주 식초)를 뿌린 샐러드 파스타와 애플 크럼블(*crumble: 과일 위에 버터와 밀가루 반죽을 굵게 부수어 얹은 음식)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리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덱스터가 뒤늦게 식기를 들어 올렸다.
덱스터와 이리아는 먹는 양도 차원이 다른데, 먹는 속도 또한 차원이 달랐다. 이리아가 아직 애플 크럼블을 반의반도 채 못 먹었을 때, 덱스터는 이미 거대한 칠면초를 반 이상 해치운 상태였다.
이리아는 요리사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음식을 열심히 먹어 보려 했다. 하지만 덱스터의 앞에 앉은 탓에 몸이 긴장하여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음식을 반 이상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이리아와 달리, 덱스터는 혼자서 칠면조 한 마리를 전부 해치웠다. 입가까지 말끔하게 정리한 그의 곁에 집사가 다가와 속삭였다.
“주인님, 아가씨께는 손님방을 드릴까요?”
“아니. 어머니의 침실을 줘. 그곳이 훨씬 넓고 좋잖아.”
“하지만 주인님, 대부인의 침실은…….”
“어머님께서도 내 약혼자가 그 방을 쓰길 바라실 거야. 조만간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될 여인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드려라, 루시어스.”
“……네, 알겠습니다.”
거의 1년 만에 본가에 돌아온 덱스터는 바빴기에, 이리아의 안내는 온전히 루시어스의 몫이었다.
루시어스는 저택을 오랜 시간 지켜 온 집사인 만큼, 그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이리아를 대부인의 침실로 이끌었다.
저택의 주인이 전쟁터에서 약혼녀를 만들고 돌아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용인들 대부분이 복도에 숨어 이리아를 구경했다.
시동들 사이서는 종종 예쁘다는 감탄이 흘러나왔지만, 이리아는 괜히 민망해져 못 들은 척했다.
“이 방입니다, 아가씨.”
루시어스가 잠겨 있던 방문을 열었다. 이리아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주춤주춤 방 안에 들어섰다.
대부인의 침실이라 해서 웅장하고 화려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본 침실은 상당히 단조로웠다. 이리아는 부인의 침실에 꽃장식이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루시어스가 인사와 함께 나가자마자, 하녀 다섯 명이 방에 우르르 들어왔다.
아주 오랜 시간 덱스터의 시중만 들었던 하녀들은 오랜만에 ‘아가씨’를 모신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이리아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들을 하고선 흥얼거리며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아가씨.”
로샨이라는 이름의 하녀가 이리아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이리아가 반사적으로 앞섶을 움켜쥐었지만, 로샨은 넉살 좋게 타이르며 그녀를 홀딱 벗겨 냈다.
다른 하녀들은 욕조에 온갖 향유들을 풀고선 이리아를 풍덩 던져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리아가 옆에서 속옷을 정리하는 로샨에게 물었다.
“다…… 다들 같이 들어오시는 건가요?”
“그럼요, 아가씨. 아가씨의 시중을 드는 게 저희 일이랍니다.”
“목욕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요…….”
루퀼렘 성에서 살았을 시절에는 무녀들에게 목욕 시중을 받았었다. 하지만 성을 나온 뒤로 홀로 몸을 씻는 게 익숙해지니, 지금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몸을 보이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이리아는 조그마한 발가락부터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녀의 빨간 곱슬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한 하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
화끈. 이리아는 순간 얼굴에 모든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하녀가 왜 탄성을 내뱉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목에 남아 있는 자국 때문이겠지.
덱스터 하워드가 남긴 키스 마크.
밤새 대체 얼마나 물고 빤 건지, 자국이 있는 곳은 비단 목뿐만이 아니었다. 이리아의 가슴, 아랫배, 등, 허벅지 안쪽, 심지어는 종아리에까지 시뻘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샨이 이리아의 둥근 어깨를 닦으며 낭만적인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어쩜 이렇게 온몸 구석구석에…….”
“당연히 사랑하시죠! 주인님께 약혼이 얼마나 큰 의미인데요.”
“전쟁터에서 만들어온 약혼녀라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요? 아가씨와 주인님의 약혼은 분명 레이디 카트리나가 소설 소재로 쓸 거예요.”
“말조심해요, 아델린. 주인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작가가 레이디 카트리나잖아요. 그나저나, 아가씨께서는 몸이 참 작으시네요.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하녀들은 이리아를 가운데에 두고선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그들은 덱스터와 이리아가 끈끈한 사랑의 관계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사랑은 무슨, 하룻밤의 실수로 이루어진 약혼인데…….’
이리아는 마음만 같아서는 약혼의 진실을 다 떠벌려 버리고 싶었지만, 끝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첫날부터 저택의 하녀들에게 그녀에 대한 언짢은 감정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의 긴 목욕 시간은 이리아의 온몸에서 감미로운 향기가 풍기게 만들었다.
제 팔목에 코를 박고선 킁킁대는 이리아 앞으로 로샨이 슬립을 내밀었다. 하얀 실크에 레이스가 덧대어진 슬립은 단조로우면서도 고아했다.
“이건 대부인께서 십 대 시절에 입었던 잠옷이에요. 아가씨의 몸에는 조금 크지만, 어깨끈을 묶으면 얼추 입을 수 있으실 거예요.”
“내일 아침 일찍 재단사와 디자이너가 온다고 하네요. 오후에는 새 옷을 입으시겠어요.”
하녀들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 위에 곧바로 슬립을 입혀 주었다. 속옷 없이 헐겁게 잠을 자는 비센티움의 문화는 이리아에게 무척이나 생소했다.
이리아는 하녀들이 모두 나가 텅 빈 침실을 둘러보다가, 창틀에 슬그머니 걸터앉았다.
그녀는 창밖으로 두 발을 힘없이 흔들거리며 다가올 앞날을 생각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