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109)

19화

이리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변의 간호사들에게 말했다.

“이, 이럴 수가. 어…… 어떡하죠? 실수로 공의 셔츠를 찢어 버렸어요.”

“이런……. 귀족들의 옷감은 예민해서 조심해야 해요.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공께 찾아가서 사과하면 아마 가볍게 넘어가실 거예요.”

“맞아요. 저도 저번에 실수로 단추 하나를 뜯었었는데, 상황을 설명하니까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시더라고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에요, 씨시. 우리 같은 평민들이 귀족들의 옷에 대해 뭘 알겠어요? 시킨 사람 잘못이지.”

간호사들이 동의하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차마 그들과 함께 웃지 못하고, 불안한 가슴팍만 콱 움켜쥐었다.

그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그녀는 없는 용기를 전부 끌어모은 후, 덱스터를 찾아 나섰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자주 가던 계곡 옆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낙엽을 밟는 이리아의 발소리가 들렸음에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이리아가 직접 그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덱스터의 망토 끝을 아주 살짝 잡아당겼다.

“하…… 하워드 공.”

덱스터는 그제야 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이리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표정부터 살폈다.

덱스터의 표정에는 제대로 된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았다.

쿵쿵. 감정이 없는 표정을 본 이리아의 심장이 더더욱 세게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그 앞으로 찢어진 튜닉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정리하다가 그만 실수로 찢어 버렸어요.”

덱스터는 찢어진 옷가지를 펼쳐 보지도 않았다. 그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됐어. 그건 불에 태워 버려.”

“그…… 저, 정말로 죄송…….”

“할 말 끝났으면 가.”

“죄, 죄송해요…….”

이리아는 이후에도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반복되는 사과를 들으며, 덱스터가 아랫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울분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몰아치는 분노와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덱스터는 결국, 이리아를 다시 돌아보며 고함치고 말았다.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나한테 할 말이 죄송하다는 것밖에 없나?!”

깜짝 놀란 이리아의 어깨가 크게 요동쳤다. 숲에서 마물에게 당할 뻔했을 때를 제외하곤, 덱스터가 크게 고함을 내지른 건 이번이 첫 번째였다.

이리아가 천천히, 떨리는 고개를 들어 올려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표정이 없던 그의 얼굴은 이제 이리아를 향한 생생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것도 바로 앞에서 마주한 덱스터의 분노는 숨통이 턱 막혀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아직 제대로 화를 내지도 않았건만, 이리아의 커다란 두 눈망울엔 벌써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녀가 두려움 때문에 잠겨 버린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 그럼 제가 공한테 무슨 말을 해야…….”

“너도, 죄송하다는 말도, 이곳도 이제는 모두 지긋지긋해! 네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를, 아무 생각 없이 내보인 행동 하나하나를 밤새워 곱씹을 때마다 난 등신, 머저리가 된 기분이란 말이다!”

이어진 덱스터의 고함은 이리아의 두려움을 배로 부풀렸다. 이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리아의 녹빛 눈망울에서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을 본 덱스터의 입가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리아가 눈물을 더 많이 흘릴수록, 그의 고통은 배가되어 찾아왔다.

덱스터는 몰아치는 감정들을 견디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고선, 이리아를 향해 다 털어 버리듯 절규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다시는 네 얼굴을 볼 일 없겠지. 다시는…… 다시는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일도 없을 거야! 겨우 너 따위 거 때문에 나의 언행을 밤새워 곱씹을 일도, 이딴 비참한 기분을 느낄 일도 없을 거라고-!!”

덱스터의 목소리가 온 계곡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는 그가 이리아의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밀고선 명령했다.

“돌아가는 길에 내 눈에 띄지 마. 혹여 눈이라도 마주쳤을 땐, 곧바로 죽여 버릴 테니까.”

숨통이 턱 막혀 버린 이리아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덱스터가 눈앞의 손가락을 거둘 때까지, 제자리서 끅끅대며 눈물만 훔칠 뿐이었다.

덱스터는 등을 돌리고선, 제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었다. 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이제 제발 가. 네 얼굴을…… 네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어.”

새까매진 이리아의 머릿속엔 최대한 빨리 덱스터의 분노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덱스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세차게 달음박질쳤다. 혹시나 덱스터가 또 자신을 향해 소리칠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함을 내지르던 덱스터의 모습은 생애 최악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덱스터가 죽도록 무서워진 이리아는 짐마차 안에 숨어 한참을 엉엉 울었다.

‘내가 옷을 찢어 버려서? 아니면, 퀸터를 돌봐주는 게 싫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를 몰래 쳐다보는 게 싫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녀는 덱스터가 왜 갑자기 화가 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러워지기만 했다.

이리아는 눈이라도 마주치면 죽여 버리겠다는 덱스터의 명령을 가슴속에 새기며 짐마차에서 기어 나왔다. 짐마차 앞에서는 콘라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리아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참 서럽게도 운다. 자, 눈물 닦아.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네, 쯔쯔.”

고맙다고 인사를 할 기운도 없었다. 이리아는 힘없이 손수건을 받아 눈물범벅인 얼굴을 닦아냈다.

콘라드는 그답지 않게 긴 뜸을 들였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철저히 확인한 후, 짐마차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덱스터 하워드가 한 말 다 들었어. 너희들, 내 담배 구역에서 싸우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

왈칵. 콘라드의 말을 듣자마자,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튀어나왔다.

이리아는 보는 사람이 더 안쓰러울 정도로 흐느끼며 띄엄띄엄 대답했다.

“다, 다 들으셨으면 알겠네요. 하…… 하워드 공이 저…… 저보고 지긋지긋하대요. 누, 눈도 마주치지 말래요. 마주치면 주……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뒤끝 없다는 말 취소할게. 덱스터 하워드 그 새끼, 성격도 더럽고 뒤끝도 존나 길어.”

“저, 저는 왜 하…… 하워드 공이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나, 난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게 없단 말이에요!”

이리아의 울음소리는 문장이 이어질수록 커졌다. 그녀가 급기야 목이 터지도록 울부짖기 시작하자, 콘라드는 황급히 두 번째 손수건을 꺼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중얼거렸다.

“젠장, 마지막이라 초조해졌나 보군…….”

콘라드는 마음속으로 덱스터를 향해 쌍욕을 퍼부으며, 들썩이는 이리아의 등을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로 콘라드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콘라드는 여러 차례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쳤다.

양측의 상황을 모두 아는 그로서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씨시. 이건 덱스터 하워드가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 한 거야.”

“보…… 보세요. 부단장님도 제, 제가 잘못한 게 없다고 하잖아요. 하…… 하워드 공은 그냥 저를 싫어하시는 거예요. 제, 제가 지…… 진절머리 나게 싫어서 꼴도 보기 싫으신 건가 봐요!”

콘라드는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선, 엉엉 우는 이리아의 등을 계속해서 토닥여 주기만 했다.

이리아의 울음이 잦아들기까지는 족히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녀는 힘 빠진 몸을 겨우 일으켜 간호사들에게 돌아갔다.

간호사들은 이리아에게 지금껏 무엇을 하고 왔냐며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퉁퉁 부은 얼굴을 보자마자 일제히 침묵했다.

최종적으로 의료품을 확인하고 있던 줄리에타가 살금살금 다가와 이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씨…… 씨시. 울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녜요. 그, 그냥 개인적으로 속상한 일이 있었어요.”

“울지 말아요.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벗어날 수 있잖아요. 다들 기뻐할 때 혼자서 울면 더 속상해질 거예요.”

“네…….”

“오늘 밤에 술 마시러 올 거죠? 속상한 일 잊어버리는 데에는 술이 특효약인데.”

이리아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는 전쟁이 끝난 기념으로 군인들이 큰 술판을 벌인다. 종전은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지만, 오직 이리아에게만은 떠돌이 생활의 시작과도 같았다.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벗어난다는 줄리에타의 말을 듣자마자, 이리아의 속은 더더욱 뭉그러졌다. 다른 사람들이 전쟁터를 벗어나면 돌아갈 집과 고향이 이리아에게만은 없었다.

옆에서 고향의 모습을 기대하는 간호사들의 수다를 듣고 있으니,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리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판에 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속상한 마음에는 술이 특효약이라는 줄리에타의 말에 참석하기로 했다. 맨정신으로는 이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버틸 수가 없었다.

술판에 가자마자 이리아는 덱스터로부터 최대한 먼 곳에 궁둥이를 붙였다. 혹여 실수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그녀는 덱스터를 향해 고개도 못 돌렸다.

모두가 전쟁 종결을 기념하며 건배사를 외칠 때, 이리아는 제자리서 술병부터 땄다.

“너무 급하게 마시는 거 아니에요? 안주도 좀 먹어요.”

“괘…… 괜찮아요. 안 먹어도 돼요.”

“안 돼요, 씨시. 술만 마시면 내일 아침에 엄청 속 쓰릴 텐데…….”

이리아의 발밑에 병들이 빠르게 쌓여갔다. 주변의 간호사들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계속해서 안주도 먹으라 권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병만 비워 댔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자, 이리아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

이리아가 눈초리 끝으로 덱스터를 슬쩍 흘겨보았다. 덱스터는 이리아를 향해 등을 보인 채로 앉아 있었는데, 그의 발치에도 도수 높은 보드카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 이는 덱스터였다.

그는 마지막 보드카 병을 깔끔하게 비우고선, 제 막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억울해. 짜증 나. 너만 나 싫은 줄 알아? 나도 너 싫어, 덱스터 하워드…….’

나쁜 놈. 악마 같은 사람. 이리아가 나직이 욕설을 뇌까리고선 들고 있는 보드카를 한꺼번에 머금었다.

도수 높은 보드카는 그녀의 입 안을 타들어 갈 듯 아프게 했다. 하지만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비하면 이까짓 고통 따위는 새 발의 피였다.

이리아가 보드카를 단번에 꼴깍 삼키고선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짜증 나!”

점점 희미해져 가는 덱스터의 모습을 계속 훔쳐보던 이리아는 예고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쨍그랑. 옆에 앉아 있던 줄리에타가 화들짝 놀라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가 급히 깨진 술잔을 정리하며 물었다.

“어…… 어디 가요, 씨시?”

“어,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헤어져……. 억울해서 모, 못 가…….”

이리아는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덱스터가 간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줄리에타를 포함한 간호사들이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의 이리아에게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사실, 이리아는 술에 찌들어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걸어가 덱스터의 막사 앞에 선 그녀는, 당당한 손짓으로 막사 천을 휙 걷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나…… 날 왜 싫어하는지 당장 이유를 말해, 이 나쁜 놈아-!!”

***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산새가 짹짹 지저귀는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는 덱스터의 품에 안겨있었다.

둘 다, 완벽한 알몸이 되어.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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