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109)

18화

결국, 이리아는 오후가 되자마자 줄리에타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씨시, 오늘따라 왜 이리 집중을 못 해요? 이거 보세요, 붕대를 다 엉망으로 감아 놨잖아요.”

“미…… 미안해요. 지금 바로 다시 감을게요.”

“됐어요. 이건 제가 할 테니까, 밖에서 머리 좀 식히고 오세요.”

이리아가 억울하게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하는 군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항상 가는 계곡으로 달려가 양손으로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덱스터 하워드의 그 얼굴은 뭐였을까. 대체…… 대체 왜 상처받은 눈빛을 했던 거지?’

상황을 따져 보자면 상처받은 이는 오히려 이리아였다. 덱스터가 쳐 낸 그녀의 손등은 지금까지도 새빨갛게 부어올라 욱신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허락 없이 퀸터에게 사과를 줬기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간호사들도 종종 허락 없이 퀸터의 입에 과일들을 물려 주곤 했다.

‘다른 간호사들이 먹였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이리아가 어느덧 눈물이 고인 눈가를 옷소매로 거칠게 문질렀다. 덱스터가 자신을 너무나도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간호사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분통을 터뜨렸다고밖에 여길 수 없었다.

이리아는 제자리서 한참을 넋을 놓고 서 있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덱스터 하워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정확히 이유를 알아야겠어.’

어젯밤, 손톱을 잘라 줄 때까지만 해도 덱스터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 후에 또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다.

결국, 이리아는 용기를 내 덱스터에게 직접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덱스터가 돌아오니, 그녀는 그의 험악한 표정 때문에 곁에 다가갈 수조차도 없었다.

나무 뒤에 숨어 한참 덱스터를 훔쳐보던 이리아는 콘라드 메이필드를 찾아갔다. 덱스터와 친한 콘라드라면 그가 자신에게 화가 난 이유를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여느 때와 같이 담배를 태우고 있던 콘라드는 이리아가 오자마자 깜짝 놀랐다. 항상 그가 먼저 이리아를 찾았으면 찾았지, 그녀가 먼저 그를 특별한 용건 없이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아가 눈초리 끝으로 덱스터를 흘끔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하워드 공 기분이 어떠셨어요?”

“어떻긴 뭐가 어때, 실연당한 사람의 기분이지.”

“시…… 실연이요? 고, 공이 누군가를 좋아하세요? 공께서 그 누군가한테 차이셨어요!?”

실연은 어저께 요한도 당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첫 번째 충격을, 그리고 그가 어제의 요한처럼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에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대던 콘라드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상태로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냐?”

이리아는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콘라드를 마주 볼 뿐이었다. 순박한 그녀의 얼굴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진짜 모르는 거구나. 콘라드는 아직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탁 던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희는 그냥 운명이 아닌가 보다, 씨시.”

그가 어리둥절한 이리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리고선 몸을 일으켰다.

“신경 쓰지 마. 덱스터 하워드가 성격은 더러워도 뒤끝이 있는 놈은 아니니까.”

“네? 자…… 잠깐만요!”

이리아가 콘라드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콘라드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어느 군인의 부름에 따라 쌩 가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리아는 콘라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덱스터가 왜 화가 났는지 물어보러 온 것이었건만,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했다.

멀리 보이는 덱스터는 평소와 달리 이리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는 이리아를 향해 등을 보인 상태였는데, 가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곤 하는 것을 보아 기분이 정말 좋지 않은 듯했다.

이리아는 한숨을 쉬며 새벽 보초 근무 준비를 했다. 군인들이 사냥개를 풀고 있는지, 개 울음소리가 온 부대에 형형하게 울렸다.

열심히 겉옷을 껴입는 이리아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두드렸다.

요한이었다.

“자. 날이 추우니까 들고 있어.”

그가 이리아에게 따뜻한 물이 담긴 병을 쥐여 주었다. 순간, 요한을 향해 만감이 교차하며 이리아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애써 밝은 미소를 보이며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둘은 나무 밑동에 함께 걸터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은 산을 올랐는데, 꼭대기에 가 보니 구름이 한 점도 없더라. 분명 별이 잘 보일 거야.”

“별이라고……? 난 살면서 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뭐? 거짓말! 농담이지, 씨시?”

이리아가 농담인 척 실없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별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영원히 새벽하늘인 루퀼렘에서 이리아가 별을 볼 방법은 오로지 그림밖에 없었다. 이리아는 아주 어렸을 적, 루퀼렘 성 복도에 걸려 있던 한 유화 그림을 기억해 냈다.

그림은 온통 검고 푸른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위에 각양각색의 점들이 이리저리 찍혀 있었다. 루 아휜은 그 점들이 바로 ‘별’이라고 했었다. 루퀼렘에서는 볼 수 없지만, 루퀼렘을 나가는 순간 볼 수 있는 자연의 신비라고.

비센티움은 위치상 구름이 많이 끼는 나라였기에, 밤에 별을 보기 쉽지 않았다. 이리아는 비센티움에 온 이후로도 ‘별’이라는 것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이 없었고, 줄곧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이리아의 곁으로 한 사냥개가 다가왔다. 이리아는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후, 요한이 건넨 껌을 입에 물려 주었다.

“별을 볼 수 있다니, 기대된다.”

“오늘의 밤하늘은 아마 평생토록 잊지 못할 거야. 나도 어렸을 적 누나와 함께 들판에서 별구경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의 밤하늘을 여전히 잊지 못하겠더라고.”

“요한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더 기대된다!”

“운이 좋으면 아마 은하수도 볼 수 있을 거야.”

이리아가 하얀 앞니를 보이며 까르르 웃었다. 기대감에 부푼 그녀는 꼬리를 휘두르는 사냥개의 목덜미를 조금 격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요한이 떠난 후에도 사냥개는 이리아의 곁에 쭉 붙어 있었다. 이리아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며 하늘이 빨리 새까맣게 변하기를 고대했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본 별들이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함께 보초 근무를 서는 군인들이 하나둘씩 준비를 끝마쳤다. 그들은 허리춤에 검을 하나씩 묶고선, 붉은 지평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을이 잦아들고, 완벽한 밤이 찾아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리아의 눈망울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별이다…….”

별이 뜬 밤하늘은 루퀼렘 성에서 보았던 그림과 같았다. 검고 푸른 바탕 위에, 여러 가지 빛깔의 점들이 이리저리 찍혀 있는 모습.

하지만 이리아의 눈에 실제 밤하늘은 그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이 순간만큼은 이리아에게 걱정이란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 일어나, 부대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향해 뛰어갔다. 함께 있던 사냥개가 컹컹 짖으며 이리아를 따라갔다.

언덕 위에서 본 밤하늘은 더더욱 아름다웠다. 사냥개가 이리아의 주위를 돌며 세차게 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긴 은하수를 따라 흩뿌려진 별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은하수가 넋을 놓아 버린 이리아의 얼굴 위로 고운 그림자를 자아냈다. 그녀의 새빨간 머리칼이 밤바람에 휘날리고, 커다란 녹빛 눈동자는 별들과 함께 반짝거렸다.

쏟아질 것 같은 비센티움의 별들 아래서, 이리아가 두 팔을 앞으로 쫙 내밀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이리아의 양 볼이 고운 꽃잎처럼 물들었다. 그녀가 눈 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기 위해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턱선을 가진 얼굴. 두꺼운 붓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미남 같은 사람.

이리아의 웃음이 아주 천천히 스러졌다. 그자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두 녹빛 눈망울은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덱스터 하워드였다.

언덕 아래에, 덱스터가 서 있었다.

덱스터는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서 언덕 꼭대기에 선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기 전까지만 해도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이제 갈 길 잃은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휘잉. 밤바람이 또다시 불어와 마주 본 두 남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것도 잊은 채, 이리아는 천천히 변하는 덱스터의 표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덱스터는 처음에는 갈 길 잃은 소년 같은 얼굴을 지었다가, 그다음에는 분노에 서린 표정을, 그다음에는 울음을 터뜨리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남자의 얼굴을 했다.

덱스터의 마지막 얼굴을 마주한 그 순간, 이리아는 심장이 우뚝 멎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리아의 마음속 덱스터 하워드는 언제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군단장이었다. 그렇기에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서 무너지려고 하는 덱스터는, 이리아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이리아가 넋을 놓은 채로 덱스터를 바라보는 사이, 뒤에서 줄리에타의 부름이 들려왔다.

“씨시!”

이리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줄리에타가 사냥개의 목줄을 잡고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차, 싶었던 이리아는 황급히 다시 언덕 아래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언덕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 있던 덱스터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순간, 이리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 모를 감정이 울컥 튀어나왔다. 그녀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줄리에타에게 소리치듯 물었다.

“저…… 저기 서 있는 하워드 공 못 봤어요? 부,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저기에 서 있었는데…….”

“무슨 말이에요, 씨시? 바쁘신 분이 한가하게 저런 곳에 계실 리가 없잖아요.”

“아, 아닌데. 내가 분명 봤는데……. 부, 분명 저기에 서 있었는데……!”

이리아가 울먹거리며 같은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그녀가 되뇔 때마다 덱스터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분이 언덕 아래에 서 계셨을 리가 없다면서.

줄리에타는 혼자 자유로이 언덕을 돌아다니는 사냥개를 잡아 온 참이었다. 그녀는 이리아에게 사냥개의 목줄을 꼭 쥐여 주고선, 제 막사로 돌아갔다.

줄리에타가 돌아간 이후, 이리아는 밤새 몇 번이고 언덕을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올라갈 때마다 언덕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덱스터의 새까만 머리카락 끝조차도 볼 수 없었다.

요한은 이리아에게 오늘의 밤하늘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거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잊지 못한 건, 밤하늘이 아닌 덱스터의 얼굴이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의 얼굴.

***

마치 간밤의 모습이 환상이었다는 듯, 다음 날이 되자마자 덱스터는 굳은 얼굴로 조사를 준비했다. 밤을 통째로 지새워 버린 이리아는 몰아치는 잠기운을 이겨 가면서 덱스터를 몰래 바라보았다.

덱스터는 오감이 예민한 군인이었다. 그가 이리아의 강렬한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를 기다리며 그의 등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덱스터의 외면은 길었다. 그는 며칠 후 토벌전 종결을 선언할 때까지, 이리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의 종결은 이리아를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비센티움 도심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며 덱스터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덱스터가 황실로 보낼 전언을 쓰는 사이, 그의 막사를 정리하는 건 간호사들의 몫이었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옷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녀는 그의 커다란 튜닉 셔츠부터 시작하여 제복 바지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개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며, 손으로는 다른 일을 하는 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덱스터의 셔츠 하나를 찢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기겁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