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109)

17화

옆에 앉아도 된다는 허락도 하지 않았건만, 콘라드는 이리아의 옆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더더욱 일그러지는 이리아의 미간을 살피며 그가 사과했다.

“어제는 미안해. 잠깐 심술이 나서 그랬어.”

“하나도 재미없었어요.”

“알아. 다시는 그런 농담 안 할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인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내뱉은 사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리아의 일그러졌던 미간은 사과를 받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풀렸다.

콘라드가 씩 잇몸을 보이고 웃으며 이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러나 그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이리아가 잔뜩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올리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어느덧 심각해진 표정과 함께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너 손톱이 왜 그래? 대체 어디에 다친 거냐?”

“바늘통에 걸려서 부러졌어요. 긴 손톱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더니…….”

“그걸 왜 방치해? 자르면 되잖어.”

“손가락 다칠까 봐 차마 단도로는 못 자르겠어요. 저 칼 잘 못 다루는 거, 부단장님도 아시잖아요.”

“그래……? 우리 부대에 손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자르는 인간이 있는데, 소개해 줄까?”

“‘손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자르는 인간’이요? 누군데요?”

“따라와.”

콘라드가 이리아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리아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갔다.

콘라드는 그녀를 부대 뒤편의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지, 이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찰나, 콘라드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온 부대를 울렸다.

“덱스터 하워드! 씨시가 손톱 잘라 달란다-!!”

쿵. 심장이 땅끝까지 떨어지며, 간담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이리아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 콘라드를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아…… 안 자를래요. 저,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싫어요, 안 자를래요.”

“왜 그래? 너 나 못 믿냐? 저 양반이 손톱 하나는 진짜로 잘 자른다니까?”

“그, 그래도 싫어요. 그냥 아……안 자를래요!”

하지만 늦었다. 콘라드의 외침을 들었던 건지, 부대 뒤편에서 쉬고 있던 덱스터는 이제 모닥불에 은 단도를 지지는 중이었다.

그가 울상인 이리아에게 무덤덤하게 턱짓했다.

“앉아.”

차마 덱스터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리아가 꼴깍, 침을 삼켰다.

그녀는 쭈뼛쭈뼛 다가가 덱스터의 옆에 조심스레 궁둥이를 붙였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먼저 손을 줄 때까지 기다렸다.

이리아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쓱쓱 문대고서는,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콘라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덱스터는 손톱을 무척이나 잘 잘랐다. 그의 손길에는 오래도록 검을 다루었던 군인의 세심함이 흠뻑 배어 있었다.

그가 이리아의 오른손 검지를 가르치며 일렀다.

“여기, 반창고 다시 붙여.”

“……네.”

이리아는 처음에는 제자리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차츰 진정되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이제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덱스터의 손으로 향해 있었다.

덱스터의 손은 이리아의 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크고 험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손등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한때 뼈가 부러졌었는지,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조금 휘어 있기까지 했다.

이리아의 시선이 찬찬히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이제 덱스터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덱스터는 앞모습만큼이나, 옆모습도 매력적이었다. 그의 콧대는 높으면서도 곧았으며, 이어지는 입술 선은 부드러웠다. 비센티움 최고의 장인이 만든 조각상의 옆모습 같았다.

낮게 깔린 속눈썹 안쪽으로 덱스터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이리아는 이 순간, 덱스터의 속눈썹이 상당히 길고 예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콘라드는 어느덧 가고 없었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는 오로지 덱스터와 이리아, 둘뿐이었다.

이리아가 덱스터가 잡고 있지 않은 왼쪽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주인을 찾지 못했던 새빨간 사과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사과에 관해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꽃잎은 덱스터에게 사과에 관해 묻지 말라고 했지만, 이리아는 진실로 사과의 주인을 알고 싶었다.

그녀는 긴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긴장 때문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저, 저기 혹시 사…… 사과…….”

하지만 이리아는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하고 말았다. 덱스터가 손톱을 자르다 말고 그녀를 바라본 것이다.

하하. 덱스터가 힘이 다 빠져 버린 웃음을 내뱉었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덱스터는 한없이 처연한 얼굴을 하고서 이리아의 턱을 살짝 쓰다듬었다. 몸이 굳어 버린 이리아는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덱스터의 시선은 어느덧 촉촉한 이리아의 입술에 가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기억 못 하는구나.”

이리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덱스터가 고개를 돌려 버리는 탓에 묻지 못했다.

덱스터는 이어 이리아의 열 손톱을 모두 예쁘게 잘라 주었다. 그가 손을 놓아주기 무섭게, 이리아는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수그렸다.

“가…… 감사합니다.”

덱스터는 후다닥 도망치는 이리아를 잡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리아는 곧장 막사로 돌아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굴이 이유 모르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책상 위에 놓인 새로운 사과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사과 꼭지에는 조그마한 쪽지가 묶여 있었다. 이리아는 의아함을 느끼며 쪽지를 펼쳐 보았다.

<좋아해, 씨시. 친구가 아니라 남자로서.>

이번 사과는 전과 달리, 발신인이 명확했다.

요한의 쪽지를 읽은 이리아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쪽지를 책상 한쪽에 놓아두고, 우선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요한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사과는 별로였다. 제대로 무르익지 않은 사과였기에 상큼한 맛보다는 쓴맛이 더 강했고, 끝도 텁텁했다. 주인 모를 첫 번째 사과가 훨씬 맛있었다.

입맛에 맞지 않아 이리아는 차마 요한의 사과를 끝까지 먹지 못했다. 그녀는 반이 넘게 남은 사과를 대충 양피지에 싸매 놓은 후, 요한을 찾아 막사를 나섰다.

요한은 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평소 그녀가 자주 가는 계곡 앞에 앉아 있었다.

“요한.”

요한이 무척이나 천천히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앳된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요한이 긴장할수록 이리아는 더더욱 미안해졌다. 고백에 대한 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상태였다. 그가 아무리 이리아를 좋아한다 해도, 이리아는 고백을 받아들일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지. 머릿속에서 한참 생각을 정리한 이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과 잘 먹었어. 그…… 그런데 말이야, 나는 너를 친구로만 생각해. 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런 의미로는 아니야, 요한.”

“……거절이 너무 빠르다, 씨시.”

“미안해. 어…… 언젠가 이런 건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다고 들어서.”

“희망 고문도 없다는 뜻이구나.”

요한의 입 안이 씁쓸해졌다. 그의 속상한 미소를 본 이리아가 다급히 횡설수설했다.

“나…… 나랑 사귀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어! 나는 갈 데도 없고, 부모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도 아니야. 나에 대해 알면 실망하게 될걸?”

“상관없어. 난 조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널 좋아해, 씨시.”

“내 말은 단순한 조건의 의미가 아냐. 나…… 나는, 나는 사실…….”

나는 사실 루퀼렘 사람이야, 요한. 내 원래 이름은 ‘씨시 힐데어’가 아닌 ‘이리아 아델리어’, 가출한 대마법사이지. 이 모습도 전부 가짜야. 나는 빨간 머리가 아닌 하얀 머리를 가지고 있고, 눈동자도 녹색이 아니라 노란색이라고.

요한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턱 막혀 버린 목구멍 때문에 목소리가 흘러나오질 않았다.

이리아가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방금 요한의 고백을 거절했다. 시중에서 흔히 파는 로맨스 소설책에 따르면, 남녀의 고백이 거절당하는 순간 그들은 어색한 남남이 되어 버린다.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이리아는 요한과 남남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한, 우리 친구 관계는 이제 끝인 거야……?”

“네가 날 불편해한다면, 그렇지. 불편한 동갑내기와 친구를 할 수는 없잖아.”

“난 너랑 계속 친구 하고 싶어. 너…… 넌 내 인생 첫 번째 이성 친구란 말이야.”

요한이 작은 미소를 머금고선 이리아의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려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이내 요한은 그의 습관적인 행동을 후회하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고백을 거절당하기 전이었다면 이리아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헝클어뜨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리아는 요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가 먼저 요한의 손바닥에 정수리를 들이댔다. 요한은 아주 잠깐 당황한 낌새를 보였다가,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씩 웃으며 새빨간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우리 전쟁이 끝나고도 볼 수 있을까, 씨시?”

“네가 원한다면, 아마도.”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요한은 그것마저도 좋은지 귀를 붉혔다. 이리아는 달아오른 그의 귓불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계속 친구로 지내기로 하기는 했으나,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생겨 버렸다. 루퀼렘의 대마법사인 이리아는 실연 따위 당해 본 적 없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관계가 원래대로 회복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

다음 날, 이리아는 요한의 사과를 처리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마구간으로 향했다. 맨땅에 버려진 사과를 보면 요한이 상처를 받을까 싶어, 말 퇴비에 남몰래 섞어 놓을 계획이었다.

이리아를 발견한 퀸터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퀸터는 이리아의 손아귀에 들린 사과를 향해 콧잔등을 들이댔다.

“……먹고 싶니?”

그가 대답 대신 바닥에 침을 뚝뚝 떨어뜨렸다. 어차피 버릴 사과, 이리아는 퀸터에게 사과를 주기로 했다.

퀸터는 사과를 게걸스레 뜯어 먹었다. 그가 사과를 반 이상 먹었을 때, 멀리서 덱스터가 걸어왔다. 조사 준비를 위해서 퀸터를 데리러 온 참이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손아귀 속 사과를 보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입가가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퀸터의 고삐를 낚아챘다. 그리고, 이리아에게 거칠게 고함을 내질렀다.

“퀸터에게 이상한 것 먹이지 마라!”

이리아가 깜짝 놀라 몸을 크게 떨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덱스터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덱스터의 얼굴을 본 순간, 이리아는 말을 잃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덱스터는 상처받은 여린 짐승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퀸터가 우악스럽게 뜯어먹은 사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이리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덱스터의 감정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이리아는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끝내 사과의 말만 전할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덱스터가 등을 돌리려는 찰나,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리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망설일 겨를도 없이 이리아는 그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저, 저기……!”

“건들지 마.”

탁. 손이 뿌리쳐졌다.

덱스터는 이리아를 매섭게 노려보고서는, 퀸터와 함께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덱스터의 건틀렛에 맞은 손등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리아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욱신거리는 손등을 문질렀다.

거칠게 고함을 친 덱스터의 모습, 그의 상처받았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린 탓에 그녀는 온종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을 볼 때마다 덱스터가 생각나니, 더더욱 집중이 힘들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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