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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7/109)

16화

다른 간호사들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며 기뻐하는 동안, 이리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선 앞날을 걱정했다.

이리아에겐 돌아갈 집이 없었다. 부대가 해체되면, 그녀는 또다시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이번에는 운 좋게 줄리에타를 만나 어찌어찌 부대에 들어왔지만, 줄리에타와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기대할 순 없었다.

이리아는 속이 울렁거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계곡 앞에 주저앉아 흘러가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씨시?”

“요한.”

요한은 이리아의 심상찮은 상태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는 외투를 벗어 이리아의 등 뒤에 둘러 준 후, 그녀의 옆에 함께 앉았다.

“이런 곳에 왜 혼자 있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이리아가 요한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알리는 게 창피했지만, 이리아는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나…… 난 돌아갈 집이 없단 말이야.”

“그럼 전쟁 전에는 어디서 살았는데?”

“그, 그냥 이…… 이곳저곳 돌아다녔어. 요한 너는 전쟁 끝나면 뭐 할 거야?”

요한이 과거를 캐물을 낌새가 보이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요한은 이리아가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는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군대에 뼈를 묻어야 해. 아버지께서 내가 뒤를 잇기를 원하시거든.”

“군대에 뼈를 묻는다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뭔데?”

“우리 아버지 국방 경비대 사령관이셔.”

이리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비센티움에서 국방 경비대 사령관은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군인이었다.

이리아는 비센티움의 언어를 익힐 적, 비센티움의 군사학을 함께 배웠었다. 군사력이 출중한 비센티움이 혹여 루퀼렘을 침략했을 때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군사학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센티움의 국방 경비대 사령관은 총 다섯 명이다. 네 명이 각각 비센티움 국경선의 동, 서, 남, 북을 맡고, 나머지 한 명은 네 국경선을 총괄한다. 다섯 명의 사령관 사이에 위계는 없으나, 총괄하는 한 명이 국경 방위에 관해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셈이다.

이리아는 다섯 사령관들의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투로 요한에게 물었다.

“아…… 아버지가 어디 경비대 사령관이셔?”

“아르테논 산맥 아래 경비대. 루퀼렘 국경선 쪽이지.”

“그래……? 그곳에 ‘엘로이스’ 성을 가진 장군은 없던 것 같은데…….”

“‘엘로이스’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씨야. 어머니가 귀족이셔서, 가문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야 했어.”

경비대 사령관 아버지와 귀족 어머니 사이의 막내아들. 요한 엘로이스는 이리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집안의 자제였다.

실상은 한 왕국의 군주이지만, 이제는 일개 간호사가 되어 버린 이리아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스무 살의 동갑내기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요한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요한은 그런 이리아의 반응을 잘못 해석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리아가 울먹거린다고 오해한 요한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 씨시,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으로 올래?”

“됐어. 나도 염치가 있지, 친구 집에 얹혀살고 싶지는 않아.”

이리아가 투정 부리듯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요한의 표정이 순간, 미묘해졌다.

요한이 흘러내린 옷을 정리하는 척 이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이리아의 팔을 타고 미끄러져,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손아귀에서 요한의 온기가 느껴지자, 이리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리아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떨리는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기나긴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씨, 씨시. 사실 나는 너를…….”

“엘로이스.”

익숙한 목소리가 요한의 말을 싹둑 잘라 버렸다. 요한과 이리아는 그들 뒤에 서 있는 덱스터 하워드를 보자마자 황급히 맞잡았던 손을 뗐다.

덱스터는 평소보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가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요한을 향해 턱짓했다.

“콘라드가 찾더군.”

“예. 지금 찾아뵙겠습니다.”

요한은 콘라드에게 뛰어가면서도 이리아를 여러 차례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리아는 차마 그와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대화를 끊어 버린 덱스터가 원망스러웠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마웠다.

이리아가 손바닥을 쫙 펼쳐 보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요한이 흘린 땀으로 흥건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한들, 고백하기 일보 직전 남자의 마음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앞으로 요한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이리아는 몹시 난감했다.

요한은 단순한 동갑내기 친구였다. 친구인 그의 고백은 받고 싶지 않았다.

덱스터는 오로지 자신의 손바닥에만 시선을 박은 이리아를 날카롭게 흘겨보고선, 자리를 떴다. 평소 한없이 우아했던 그의 발걸음이 난폭해져 있었지만, 요한에게 정신이 팔린 이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리아는 시간이 지나도 계곡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부대로 돌아가면 요한을 다시 맞닥뜨릴 테고, 그럼 고백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리아는 그의 고백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계곡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뒤에서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리아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여-빨간 머리 씨시!”

그녀는 콘라드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이 아니구나.

막 담배를 태우고 오는 길인지, 콘라드의 옷에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거리낌 없이 새로운 담배를 말며 이리아에게 물었다.

“장군님 표정이 오늘따라 별로다? 요한 그 자식도 별로고, 덱스터 그 새끼도 표정이 별로던데, 단체로 똥이라도 먹은 거냐?”

“그……그런 거 아녜요.”

“그럼 뭔데? 너희 셋 다 기분이 나쁘면 사이에 낀 내가 제일 고생한다, 인마. 빨리 털어놔 봐.”

“그, 그럼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부단장님만 알고 있어야 해요?”

콘라드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이리아에게 바짝 붙었다. 이리아는 주변을 샅샅이 둘러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에게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한이 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걸 이제 알았냐……?”

콘라드는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조금 한심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완벽하게 말린 담배를 입에 물고선 어눌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걔가 너한테 고백했어?”

“아직이요. 그런데 곧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그놈이 고백하면. 사귈 거냐?”

“저는 요한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 않아요.”

“오우-. 방금 너의 발언으로 슬픈 남자 한 명과 기쁜 남자 한 명이 생겼단다, 씨시.”

“……전 가끔 부단장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넌 모르는 게 좋아, 콘라드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뒤쪽에서 작은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둔한 이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콘라드는 단번에 소리를 듣고선 등 뒤를 흘겨보았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확인한 그는 혼자서 한참을 낄낄댔다.

콘라드가 온 사방에 다 들리라는 듯, 이리아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 전에 나한테 전쟁 끝나면 결혼이나 할 거라고 했었잖아. 그냥 요한이랑 결혼하는 건 어때? 그 친구 집안도 참 괜찮아, 씨시.”

“요, 요한이랑은 사귈 일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야, 결혼이랑 연애랑 같냐?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결혼은 연애보다 훨씬 더 간단하고 손쉽게 이루어지는 거야! 남녀 사이에 실수로 연애를 하는 일은 없지만, 실수로 결혼을 하는 일은 생긴다구?”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전 실수로 결혼 같은 거 할 일 절대 없어요!”

이리아가 날카롭게 대답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루퀼렘은 비센티움보다 여성의 정절을 중요시하고, 성적 개방성이 낮은 나라였다. 뼛속까지 루퀼렘인인 이리아는 콘라드의 ‘실수’로 결혼을 한다는 문장을 매우 불쾌하게 느꼈다.

그녀가 짜증 났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듯 발소리를 크게 내며 떠나갔다. 하지만 콘라드는 이리아의 거친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이상한 남자랑 결혼하면 코 꿰인다, 씨시! 술 취한 날 밤을 조심해!”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니까요!”

참 이상하게, 콘라드가 평소보다 더 짓궂었다. 이리아는 그를 매섭게 흘겨보며 제 막사로 돌아갔다.

가출은 했지만, 이리아는 여전히 한 명밖에 없는 루퀼렘의 대마법사였다.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여성의 정절을 강조 받았던 삶을 살아온 만큼, 스스로를 굳게 믿고 있었다.

[술에 취해 남자와 놀아나는 일은 결단코, 설령 세상이 열두 쪽이 난다 해도 없을 거야!]

이리아가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정리하지 못했던 짐들을 마저 정리했다. 그녀는 콘라드의 분탕질 때문에 요한의 고백까지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

이리아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기에, 다음 날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밖으로 나가 보니 군인들은 이미 조사를 떠난 후였다. 요한과 덱스터까지 떠난 걸 확인한 이리아는 친구의 고백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다는 조금의 안도감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씨시, 정리하면서 상한 바늘이 보이던데, 그것들 좀 따로 분리해 주실래요?”

“네. 금방 할게요.”

분명 부대를 옮길 때 오래된 바늘들을 전부 새 바늘로 교체했었는데, 겨우 이틀 만에 바늘들이 상해 버렸다. 이리아는 새삼 부상자들의 수를 체감하며 바늘을 하나하나 골라냈다.

상한 바늘들은 바늘통에 따로 넣어 두어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간호사들 사이의 규율이었다. 이리아가 바늘통의 뚜껑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너무 세게 닫아 놓은 탓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될 것을, 이리아는 괜한 오기가 생겨 바늘통 뚜껑을 두고 고군분투했다. 그녀가 뚜껑을 돌리려는 찰나, 손톱이 통과 뚜껑 사이의 틈에 끼어 부러지고 말았다.

이리아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통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오른쪽 검지를 타고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에요!?”

“손톱이 부러졌어요. 길었던 걸 그대로 방치해 두었더니…….”

“이런……. 다른 손톱도 부러지기 전에 빨리 잘라야겠는데요. 일단 부러진 부분 약부터 발라요. 피가 너무 많이 흐르네요.”

줄리에타가 반창고와 연고를 넘겨주었다. 이리아는 잘 쓰지 않는 왼손으로 엉성하게 반창고를 붙였다. 오른손잡이의 서러움이었다.

사실 이리아는 손톱을 일부러 자르지 않고 있었다. 부대를 아무리 뒤져도 손톱깎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손톱깎이 따윈 필요 없다며 라이터로 살짝 소독한 단도로 손톱을 잘랐다. 하지만 이리아는 차마 무서워서 날붙이로는 손톱을 자를 수가 없었다. 실수라도 삐끗하면 손가락이 잘리기에 십상이었다.

손톱이 부러진 상처는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무언가에 닿을 때마다 아파서, 이리아는 오른손을 거의 못 쓰다시피 했다. 그녀는 숟가락질도 3살짜리 아이처럼 엉성하게 했다.

“여-씨시.”

한 손으로 어색하게 밥을 먹는 이리아의 앞에 콘라드가 나타났다. 이리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말 걸지 마세요.”

“내가 말 안 걸면 요한이 와서 고백할 텐데?”

이리아가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자, 콘라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을 꼬집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행동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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