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03.
이리아는 죽을 것만 같았다.
“씨…… 씨시, 괜찮아요?”
“토할 것 같아요.”
“편하게 앉아요. 그렇게 앉아 있으면 더 울렁거릴 것 같은데…….”
“편하게 앉을 수가 없어요.”
덜컹거리는 짐마차 위에 걸터앉은 이리아는 반쯤 녹아내린 상태였다. 그녀는 마차 바퀴에 돌부리가 걸려 흔들릴 때마다 헛구역질했다.
강력한 숙취였다.
“이쯤에서 조금 쉬었다 가지.”
덱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마차가 멈추었다. 이리아는 단숨에 마차에서 뛰어내려 가장 가까운 참나무로 달려갔다.
한창 나무뿌리를 향해 헛구역질하는 이리아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힘겨워하는 이리아의 등을 약하게 두드려 주었다.
“쯔쯔, 그러니 적당히 마셨어야지.”
이리아가 옷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콘라드를 돌아보았다.
분명 비슷한 수준으로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콘라드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숙취의 ‘숙’ 자도 느끼지 않는 듯한 콘라드의 모습에 괜히 억울해진 이리아가 따지듯 물었다.
“왜…… 왜 부단장님은 그렇게 말짱해요? 왜, 왜 나만…….”
“나는 항상 술을 마시잖냐, 씨시. 그리고 난 원래 숙취 없어.”
“그럴 수가…….”
“좀 토했냐? 보통 숙취는 토하면 괜찮아지는데.”
이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콘라드는 또 한 번 혀를 차며 이리아의 등을 열심히 두드려 주었다.
헛구역질만 수없이 반복하던 이리아는 결국 토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선 마차로 돌아갔다. 두통까지 들기 시작하니 힘들어 미칠 것만 같았다.
숙취에 띠든 이리아가 마음에 걸렸는지, 콘라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지근한 물과 함께 그녀를 다시 찾아갔다.
“이거라도 마셔. 좀 나아질 거다.”
“감사해요.”
이리아는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물과 함께 헛구역질이 좀 내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콘라드가 이리아의 옆에 걸터앉았으며 물었다.
“숙취는 먹고 싶은 음식 먹으면 단번에 낫는다던데. 먹고 싶은 거 없어?”
“있으면 구해다 주시게요?”
“내가 구해다 줄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사과 먹고 싶어요.”
1초도 고민 없는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과일이 떨어진 이후로부터 이리아는 줄곧 사과가 먹고 싶었다.
루퀼렘 성 후원에는 거대한 사과나무가 하나 있었다. 그 사과나무는 아주 어렸을 적의 이리아가 심은 것이었다.
영원한 새벽인 루퀼렘에서는 식물들이 사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지 않았기에, 루 아휜은 매년 봄이 되면 이리아를 위해서 사과나무에 마법을 불어 넣어 주었었다. 사과나무는 루의 마법을 받아 수많은 열매를 맺었고, 이리아는 홀로 팔짝팔짝 뛰며 사과를 땄었다.
나무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이리아가 열두 살이 되었을 즈음에는, 그녀가 팔을 있는 힘껏 뻗어 보아도 닿지 않을 정도로 높게 자랐다.
이리아는 손이 닿지 않는 나무의 사과들을 어떻게 딸까 매일 고민했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어느 날, 키가 멀대같이 큰 외국인 아저씨가 나타났다.
이리아는 성 발코니 아래서 담배를 태운 외국인 아저씨와 일주일 만에 친해졌다. 그녀는 아저씨에게 후원 사과나무의 사과를 하나만 따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이리아의 말대로 사과를 ‘딱 하나’만 따왔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 아저씨가 따 준 사과 하나는 이리아의 인생에서 맛본 사과 중에서 제일 달콤했었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맛을 기억할 정도로.
이리아가 반가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예전에 집 앞에서 담배 피웠던 외국인 아저씨가 사과 하나를 따 준 적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과가 너무 맛있었어요, 지금까지도 종종 생각날 정도로.”
“그럼 그 외국인 아저씨를 다시 불러와야겠네. 그 아저씨가 따준 사과가 맛있었다면서.”
“그렇죠. 그런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아저씨를 다시 불러올 수는 없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대가 출발하기 전에 하나라도 더 피워야 한다며, 급히 담배를 말고선 떠났다.
이리아는 한결 나아진 몸 상태로 여정을 계속해 나갔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던 부대는 해가 떨어지고 난 후에야 목표 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이리아를 포함한 간호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들은 저녁을 먹을 시간도 없이 개인 막사에서 각자의 짐을 정리한 후, 자정 전까지 의약품 소독을 마쳤다.
이리아는 찌뿌둥한 어깨를 콩콩 두드리며 새로운 막사로 들어왔다. 저녁도 안 먹고 정리했건만, 막사에는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짐이 산더미였다.
‘이것들을 언제 다 정리하지?’
이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막사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시야 끄트머리로 문득 못 보던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저게 뭐야……?]
이리아가 바닥에 널브러진 빨랫감들 사이를 총총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렇게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사과였다.
새빨갛고 싱싱한 사과.
이리아가 황급히 막사 밖으로 튀어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항상 보던 군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리아가 사과 이야기를 한 이는 콘라드 메이필드밖에 없었다. 그녀는 콘라드가 놓고 갔다고 생각하여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사과는 놀라울 정도로 달콤하고 싱그러웠다.
이리아는 주먹만 한 사과를 게눈감추듯 해치웠다. 겨우 사과 하나에 그녀의 기분이 단숨에 머리끝까지 올랐다.
***
행복한 표정과 함께 잠자리에 든 이리아는 다음 날 아침에도 행복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평소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깬 그녀는 군인들이 조사에 떠나기 전, 콘라드를 찾아갔다.
“부단장님, 사과 잘 먹었어요.”
콘라드가 말 고삐를 채우다 말고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리아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사과? 그거 내가 준 거 아닌데.”
“네……?”
이리아는 얼떨떨해졌다. 그녀가 사과 이야기를 한 사람은 하늘에 맹세코 콘라드밖에 없었다. 부단장님한테만 말했는데, 부단장님이 준 게 아니라니?
이리아가 콘라드를 힐끔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질문했다.
“그, 그럼 대체 누가 준 걸까요?”
“글쎄, 난 잘 모르겠네. 장군님이 한번 찾아보셔. 생각보다 금방 찾을걸?”
콘라드가 익살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이리아가 단서를 더 달라는 뜻을 담은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말에 올라타는 콘라드의 망토가 멋있게 펄럭였다. 이리아는 군인들과 함께 조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떠나는 게, 참 지독한 심보였다.
이렇게, 이리아의 ‘사과 주인 찾기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리아가 두 번째로 찾아간 이는 요한 엘로이스였다.
“요한,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음? 뭔데?”
“호, 혹시 사과 네가 둔 거야?”
“사과? 무슨 사과?”
요한은 아냐. 이리아의 머릿속, 요한의 이름 위에 빨간 줄이 쫙 그어졌다.
그녀가 요한의 옆에 있던 줄리에타를 돌아보았다. 줄리에타 또한 사과에 대해서 처음 들어 보는 눈치였다.
줄리에타도 아냐. 이번에는 줄리에타의 이름 위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사과를 줄 만한 사람들이 모두 사과를 주지 않았다. 그럼 대체 누가 사과를 준 걸까. 혼란에 빠진 이리아는 돌멩이를 툭툭 차며 부대를 거닐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부대에서 나를 남몰래 짝사랑하는 사람이 사과 이야기를 엿들었던 게 아닐까……?’
이제는 부대의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이리아가 총을 손질하고 있던 군인 한 명을 다짜고짜 붙잡았다.
“저, 그, 혹시…….”
“뭐야?! 바쁜데!”
“아, 아무것도 아녜요.”
일단 이 군인은 아냐. 군인이 신경질적으로 총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이리아는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이후에도 그녀는 지나가는 군인들을 몇 명 찔러 보았지만, 사과의 주인은 찾지 못했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의미의 얼떨떨한 표정, 혹은 빨리 꺼지라는 의미의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이리아는 터덜터덜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퀸터가 있었다. 최근 퀸터가 발굽을 다친 탓에, 덱스터는 조사에 다른 말을 대동하는 중이었다.
퀸터는 단번에 이리아를 알아보았다. 그가 풀을 뜯어 먹다 말고 이리아에게 다가갔다.
“대체 누굴까, 퀸터? 부단장님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줄리에타도 아니고…….”
이리아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퀸터는 그녀에게 갈기나 빗기라는 듯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이리아는 흥,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퀸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퀸터는 거대한 덩치와 달리 인간을 배려할 줄 아는 말이었다. 20년을 함께했던 틸다만큼은 아니지만, 이리아는 퀸터를 상당히 좋아했다. 틸다를 잃은 이후로, 그녀는 마구간에 올 때마다 덱스터 몰래 퀸터의 털을 빗겨 주곤 했다.
이리아는 퀸터와 함께 새로운 부대를 둘러보았다.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다 보니, 이번에도 부대의 옆에는 조그마한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퀸터가 계곡물에 코를 박고서 물을 들이켜는 사이,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던 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틸다가 살아 있었을 그 시절, 이리아는 틸다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덱스터는 퀸터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그녀의 옆에 다가왔었다. 이리아는 덱스터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순간, 그를 거대하고 무서운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가 거대하고 무섭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이리아를 익숙하게 만들어 준 걸까, 예전만큼 그가 다가가기 힘든 존재는 아니었다.
‘설마…… 덱스터 하워드가 내게 사과를 준 걸까……?’
그럴 리가 없었지만, 이리아는 차마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덱스터 하워드가 사과의 주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리아는 그에게 사과에 대해 질문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사과의 주인이어도 난감했고, 그가 사과의 주인이 아니어도 난감했으니까.
아주 긴 시간 끙끙 골머리를 앓던 이리아는 결국, 그녀의 선택을 꽃에 맡기기로 했다.
“물어본다, 안 물어본다, 물어본다, 안 물어본다…….”
이리아의 손짓에 따라 꽃잎이 하나씩 떨어졌다. 남은 꽃잎의 수가 줄어들수록, 이리아의 말 속도도 느려졌다.
그렇게, 꽃잎이 단 하나만 남은 순간.
“안 물어본다.”
이리아가 마지막 꽃잎을 뜯어냈다. 덱스터에게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난 셈이다.
***
일을 끝낸 간호사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서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았다. 이리아는 모닥불 위에서 돌아가는 산토끼 두 마리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빵조각을 뜯었다.
토끼가 다 구워지고 식사 준비가 끝나자마자, 어김없이 간호사들의 수다는 시작되었다.
“다들 소식 들었어요? 마물들의 근거지를 찾았대요. 그곳만 토벌하면 전쟁이 마무리된다던데, 우리 모두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그래요?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네요!”
“곧 남편을 볼 수 있겠어요. 아이들 학교는 잘 보냈으려나 모르겠네.”
“잘 보냈겠죠, 그래도 애들 아빠인데. 전에 남편이 가게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간호사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나이였기에, 이제 막 스물이 된 이리아가 대화에 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 그들의 수다를 듣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녀가 기겁할 만한 내용이 나올 때는 예외였다. 이리아가 깜짝 놀라 손안의 빵을 떨구었다.
“저…… 전쟁이 끝난다고요? 언제요?”
“이르면 다음 달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하는데…… 자세한 기간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이 부대도 해체되는 건가요?”
“전쟁이 끝나면, 그렇죠. 더 이상 부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리아의 두 눈망울이 순식간에 탁하게 가라앉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