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09)

14화

‘윽-이런 걸 왜 마시는 거야?’

이리아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생애 처음 마셔 본 술은 쓰기만 했다.

혹시 이 술이 특별하게 이상한가 싶어 이리아는 다른 술들도 하나씩 따라 홀짝여 보았지만, 하나같이 썼다. 과일주면 분명 과일 맛이 나야 할 텐데, 과일 맛은 안 나고 괴상한 소독약 맛이 났다.

이리아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병째로 들이켜고 있었다. 덱스터의 다리 밑에도 벌써 거대한 술병 네 개가 나동그라진 채였다.

‘……나 혼자만 못 마시는 건 싫어.’

이리아는 괜한 오기를 부려 쓰디쓴 술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안주도 없이 마신 탓에 술기운이 도는 건 금방이었다. 조금 알딸딸한 기분이 드니, 쓰기만 했던 술이 서서히 달아지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네 번째로 잔을 채우며 줄리에타에게 물었다.

“이…… 이거 은근히 맛있네요? 이건 이름이 뭐예요?”

“화이트 럼(*White Rum: 럼주의 한 종류, 색이 투명한 게 특징)이에요. 비교적 약한 도수의 럼주죠.”

“와…… 완전 내 취향인데, 이거……?”

잔을 단번에 비운 이리아는 급기야 다른 군인들처럼 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시작만 어려웠지, 취하고 나니 술이 쑥쑥 들어갔다.

캬아-. 병을 비운 이리아가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줄리에타가 두 번째 병나발을 부는 이리아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씨시,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아, 아…… 아직 한 병밖에 안 마셨어요! 아직 취, 취하지도 않았다구요!”

“이미 취한 것 같은데…….”

원래 취한 사람은 자기 상태를 모르는 법이다.

이리아의 얼굴에 술 취한 사람 특유의 행복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안주도 없이 순식간에 두 번째 병을 끝낸 이리아가 딸꾹질을 하지 시작하자, 한쪽에서 ‘쟤 말려야 하는 거 아냐?’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들이 딸꾹질하는 이리아에게 여러 안줏거리를 챙겨 주었다. 하지만 육식을 주로 하는 비센티움 사람들 사이에서 채식주의자인 이리아가 먹을 수 있는 안주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아몬드와 피스타치오를 조금씩 주워 먹다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아. 수…… 술이 없네.”

술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리아는 술병 끄트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럼주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비센티움에서 처음으로 술맛을 깨달은 이리아에게는, 적당할 때에 그녀를 멈춰 줄 루 아휜이 없었다. 이미 잔뜩 취한 이리아의 머릿속은 5살짜리 어린아이만큼이나 단순해졌다.

술이 다 떨어졌네. 그럼 더 가지고 와야지.

이리아가 음정이 다 틀린 루퀼렘의 동요를 흥얼거리며 가장 술병이 많이 놓인 자리로 향했다. 그곳은 군부대의 단장과 부단장인 덱스터 하워드와 콘라드 메이필드가 있는 곳이었다.

콘라드 메이필드는 이리아와 마찬가지로 딸꾹질을 하며 담배를 말고 있었다. 너무 취한 탓에 담배를 제대로 말지 못하자, 그는 못 해 먹겠다고 소리치며 말던 담배를 모닥불에 던져 버렸다.

이리아가 씩씩대는 콘라드의 어깨를 턱 잡았다. 콘라드는 짜증을 부리다가도, 이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는 체를 했다.

만취한 이리아는 콘라드의 옆에 앉아 있는 덱스터 하워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콘라드의 어깨를 조물조물하며 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 두, 두…… 두 병만 줘 바.”

“두 병씩이나? 너 그지냐? 두 병은 안 돼!”

“아, 빠…… 빨리 줘 바!”

이리아가 콘라드를 짤래짤래 흔들었다. 순간, 술기운이 위로 올라온 콘라드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다행히 토는 하지 않았다.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두 술주정뱅이는 한창 딸꾹질을 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대안을 제시한 이는 콘라드였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냈다.

“좋아. 여기 앉아 있는 일곱 명이 한 명씩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더 많이 나오면 너 줄게!”

“지, 진짜지? 그럼 빠, 빨리 너부터 더…… 던져!”

이리아가 콘라드의 옆에 앉아 있는 군인을 손가락으로 떡 가리켰다. 그녀는 평소 같으면 감히 시도조차 못 할 삿대질을 몹시나 당당하게 하고 있었다.

군인들 또한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기에, 이리아의 삿대질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콘라드가 말한 대로 돌아가면서 동전을 던졌다. 몇몇 군인들은 떨어지는 동전을 제대로 받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던져야 했다.

덱스터의 순서가 다다랐을 때 결과는 3대 3, 동점이었다. 오로지 그의 손에 승패가 달린 셈이었다.

이리아는 커다란 눈망울을 애처롭게 끔뻑이며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덱스터는 잠시 초점이 풀린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동전을 집어 들었다.

그가 가볍게 동전을 허공으로 튕겨 올렸다. 그리고, 그만큼 가볍게 낙하하는 동전을 잡았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손바닥을 들어 동전을 확인하기 바로 직전, 조금의 기대감이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앞면 나왔으면 조, 좋겠다!”

순간, 덱스터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가 동전을 감싸고 있던 손바닥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동전이 스르르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쨍그랑. 동전이 바닥에 놓여 있던 술병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이런, 다시 던져야겠군.”

실수로 떨어뜨린 사람치고, 덱스터는 무척이나 태연하게 동전을 집어 들었다.

그가 두 번째로 동전을 던졌을 때, 결과는 앞면이었다. 동전의 앞면을 본 이리아는 곧장 함박웃음을 짓고선 두 다리를 방방 굴러 댔다.

콘라드는 이리아가 여유롭게 술병들을 품에 안는 동안, ‘이 새끼 조작했어!’라고 소리치며 덱스터에게 덤벼들었다. 이리아는 시답잖은 말싸움을 시작한 두 남자를 깔끔히 무시하고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간호사들은 딸꾹거리며 돌아온 이리아를 보자마자 일제히 기겁했다.

“세 병이나 더 가져왔어요?! 그 독한 걸 다 마시려고요?”

“벼, 별로 안 독한데.”

“그거 보드카예요, 씨시! 럼주랑 차원이 다른 술이라고요!”

“보…… 보드카?”

언젠가 들어본 술 이름이었지만, 정확히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이리아는 바보처럼 머리를 긁적이다가 술병을 땄다.

하지만 그녀가 술병에 입을 대기 무섭게, 누군가가 병을 휙 낚아챘다.

덱스터였다.

“몸 상하니까 적당히 마셔.”

술에 취한 이리아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술병을 빼앗은 덱스터의 뒤를 쫓았다.

술판을 빠져나간 덱스터는 곧바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계곡에 가 술과 모닥불 냄새가 밴 손을 씻어 내기 시작했다.

다리 상태가 좋지 않은 이리아는 뒤늦게 계곡에 도착했다.

덱스터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선 나직이 질문했다.

“왜 따라왔어?”

“그, 그 술 내…… 내 건데 가져가니까…….”

“어차피 넌 마시지도 못해.”

덱스터가 손을 털며 일어났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술병을 보자마자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있는 힘껏 꼭 껴안았다.

“이, 이리 내……. 내…… 내 거 가, 가져가지 마아-.”

이리아가 덱스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20년 만에 알아낸 그녀의 술주정은 다름 아닌 ‘탐욕’이었다.

이리아의 몸이 덱스터의 몸과 빈틈없이 단단하게 붙었다. 덱스터는 사지가 순식간에 얼어 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그는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리아가 갓 태어난 여린 짐승처럼 덱스터의 가슴팍에 양 뺨을 문질렀다. 그녀는 아주 긴 시간 굳어 있는 덱스터의 온기를 만끽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위아래서 뜨겁게 휘감겼다.

덱스터의 옆구리에서 술병이 떨어졌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보드카가 이리저리 튀었지만,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이리아가 감기에 걸렸던 그날처럼, 덱스터는 그의 품을 파고든 이리아의 얼굴과 목덜미를 애타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몽롱한 이리아는 덱스터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피부를 쓰다듬는 느낌이 좋아, 까르르 웃었다.

덱스터가 고운 분홍빛으로 물든 이리아의 양 뺨을 감쌌다. 이리아는 처음에는 가만히 그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가, 차츰 열이 오르는지 덥다며 칭얼거렸다. 취기가 그녀를 더위에 민감하게 만든 듯했다.

이리아는 반쯤 초점이 사라진 눈망울로 덱스터의 입술을 힐끗거렸다.

독한 술 냄새 사이서도, 그 특유의 박하 향은 어김없이 선명했다.

덱스터에게서는 언제나 시원한 박하 향이 난다. 그러니 그와 입술을 맞대면, 배 속을 태워 버릴 듯한 이 더위가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이리아의 머릿속엔 보통의 상식마저도 깡그리 없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고민할 틈도 없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뽀얗고 자그마한 뒤꿈치가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덱스터의 뺨을 감싸고선, 취기가 흠뻑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 움직이면 안 돼…….”

이윽고, 서로의 입술이 살포시 맞닿았다.

맞닿은 두 입술 사이서, 이리아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덱스터의 잇새서 풍기는 박하 향을 느끼고 난 후, 조금 촉촉해진 입술을 떼어 냈다.

곧이어 이리아의 시야에 들어온 덱스터는 그 어느 때보다 멍청한 얼굴이었다. 이리아는 자신이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선, 덱스터를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너 지금 어, 엄청 바…… 바보 같아!”

덱스터는 무척이나 뒤늦게 정신을 다잡았다. 그가 두 팔을 뻗어 이리아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손길에 이끌려 그의 가슴팍에 다시금 뺨을 푹 파묻고 말았다.

덱스터가 그녀의 새빨간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너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을 때 날 안아. 그리고 다음 날이면 깨끗하게 잊어버리지.”

그가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점이, 정말로 나를 미치게 해.”

이리아는 덱스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팍에 묻힌 뺨을 힘겹게 움직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아마 이것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거야.”

덱스터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는 이어, 밖으로 드러난 이리아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번엔 덱스터의 차례였다.

그가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서로의 입술을 맞대었다.

이리아의 아랫입술에서는 독한 술이 느껴지고, 이리아의 윗입술에서는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맛이었지만, 덱스터는 서로의 입술을 아주 긴 시간 맞대고만 있었다.

입술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떨어졌다.

덱스터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뒤로 돌아섰다. 그건 술에 취한 이리아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이자, 그의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그는 이리아를 흘겨보지도 않고선 떠나갔다. 이리아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멀어지는 덱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덱스터가 막 왔다 간 입술을 혀로 쓸어 보았다. 두 번의 입맞춤은 이리아의 입술에 그 특유의 농밀한 박하 향을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게 했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향기가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서 입술을 매만지다가, 절뚝거리며 줄리에타에게로 돌아갔다.

다음 날, 덱스터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이리아는 모든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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