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이리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루 아휜을 향해 희미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녀가 팔을 뻗어 루의 뺨을 애타게 쓰다듬었다.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봐…….]
루에게는 할 이야기가 참 많았다. 이리아는 당장이라도 루를 옆에 앉히고선 기나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고 싶었지만, 그의 품을 마음껏 만끽하는 게 먼저였다.
이리아는 갓 태어난 짐승처럼 애타게 루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느낀 가슴팍은 변함없이 뜨겁고 부드러웠다.
루는 잠시 주춤하는 듯싶다가, 두 팔로 이리아를 빈틈없이 꼭 안아 주었다.
이리아의 양 볼이 순식간에 고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네 품이 정말 그리웠어…….]
머리 위에서 루가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굳었던 그는 곧 절박한 손짓으로 이리아의 얼굴과 목덜미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뜨겁고 커다란 손바닥이 쓰다듬는 느낌이 좋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커다란 몸을 타고 올라가 서로의 뺨을 문질렀다. 열이 있는 탓에, 얼굴에 맞닿는 뺨이 상대적으로 차갑게 느껴졌다.
뺨을 문지를수록 익숙한 향기가 이리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청아하고도 맑은 향기. 어디선가 맡아 본 것 같았지만, 몽롱한 이리아는 도무지 향의 출처를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이리아가 애교스럽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뺨을 뗐다.
[있잖아, 너한테서 엄청 익숙한 향이 나.]
루가 무어라고 대답을 했지만, 기침이 터져 나온 통에 들을 수 없었다.
세상이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문장을 웅얼거리며 침대에 눕혀졌다.
침대에 눕자마자 루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루의 옷소매를 다급히 붙잡았지만, 그는 끝내 깊은 심연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아는 진짜 꿈속에서 루 아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녀가 부르면 언제나 나타나 주었던 루 아휜이었다. 하지만 가출에 대한 징벌인 건지, 이리아가 목이 터지도록 이름을 외쳐도 루 아휜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마자 이리아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잠에서 깼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줄리에타가 들어와 물을 내밀었다.
“몸은 좀 어때요?”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돌아다니지 말고 쉬어요. 식사랑 약 가져다줄게요.”
“고마워요.”
이리아는 줄리에타가 가져다준 오트밀 죽을 먹었다. 간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맛은 영 별로였지만, 아픈 사람이 먹기에는 최고인 음식이었다.
이리아가 뜨거운 죽을 호호 부는 사이, 약을 고르고 있던 줄리에타가 물었다.
“그런데요, 씨시. 하워드 공이 어젯밤에 안 들어오셨나요?”
“공이 왜요?”
“막사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시길래 들어온 줄 알았죠.”
“……제 막사 앞에서요?”
이리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덱스터 하워드가 그녀의 막사 앞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이리아는 끝끝내 두 문장을 툭 던지듯 말했다.
“절 감시하느라 그러셨나 보죠. 제가 또 숲에 가면 안 되니까.”
감시하지 않아도 그 숲에는 다시 갈 일 없을 텐데. 덱스터 하워드는 참 쓸데없는 일을 하는 인간이었다. 그 시간에 퀸터 빗질이나 더 해 주지.
휴식을 즐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리아는 막사에서 온종일 시체처럼 누워 있으려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군인들이 아침 조사를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 간호사들은 두 눈 돌릴 틈 없이 바빴다. 혼자서 쉬는 게 미안해진 이리아는 간단한 약 정리라도 하기 위해 막사에 들어섰다.
간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리아가 한창 약 정리를 하고 있을 찰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팔목에 감을 붕대를 찾기 위해 다가온 덱스터 하워드였다.
이리아는 그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덱스터가 제자리에서 붕대를 감으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몸은 좀 어때?”
“어…… 거, 걸을 만해요.”
“그것 말고. 감기는?”
열심히 움직이던 이리아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가 덱스터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덱스터는 손목 붕대를 감으면서도 이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아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주춤주춤 물러나며 눈꺼풀을 떨었다.
“그…… 제, 제가 감기 걸린 건 어떻게…….”
왜일까, 갑자기 지난밤의 익숙한 향기가 기억났다.
청아하고도 맑은 향기. 그건 분명 덱스터의 향기였다.
이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대체 왜 꿈속의 루에게서 덱스터 하워드의 향이 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루는 단언컨대, 단 한 번도 덱스터 특유의 박하 향을 풍긴 적 없었다.
하. 이리아의 반응을 눈치챈 덱스터가 한숨 섞인 실소를 내뱉었다.
그는 실망한 것 같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한 것 같기도 했다.
“괜찮다면 됐어.”
언제 눈을 마주쳤냐는 듯, 덱스터는 이리아를 흘겨보지도 않고선 막사를 떠났다. 남은 이리아는 그가 떠난 자리를 힐끔거리면서 약 정리를 이어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리아에게, 덱스터의 반응은 이상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오늘은 덱스터 하워드가 조사에 나가지 않는 날이었다. 이리아는 부대에서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막사로 줄행랑쳤다.
그녀가 한창 침대에 누워 틸다의 갈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장난스러운 ‘똑똑’ 소리와 함께 요한이 들어왔다.
“씨시.”
“……요한!”
이리아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요한이 마주 웃어 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 들었어. 괜찮아?”
“응. 어제보다 훨씬 나아.”
요한이 이리아 앞으로 조그마한 사기그릇을 내밀었다. 대체 이게 뭔가. 이리아는 내용물을 보기 전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요한이 그릇 뚜껑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릇에 담긴 건, 이리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꿀이잖아! 꿀을 대체 어디서 구했어?”
“누나가 가지고 있던 거 조금 슬쩍 했어. 이르진 마. 들키면 나 죽어.”
이리아는 요한이 숟가락을 건네주기도 전에 새끼손가락을 콕 찍었다. 꿀을 빨아 먹는 이때만큼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루퀼렘인이었다.
이리아가 행복한 웃음을 실실 흘리며 말했다.
“맛있다. 달아.”
“꿀이 목감기에 좋대. 자, 좀 더 먹어.”
이리아는 요한이 건넨 숟가락을 잽싸게 낚아채 갔다. 손가락으로 꿀을 찍어 먹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숟가락에 가득 퍼서 한입에 삼키는 게 훨씬 맛깔났다.
루퀼렘 성에서 살았을 때는 원할 때마다, 원하는 만큼 꿀을 먹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리아를 길러 온 루 아휜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매일 밤 꿀을 한 단지씩 가져다주었었다.
그토록 꿀을 많이 먹고 좋아했던 이리아였지만, 비센티움 제국에 온 이후로는 꿀을 단 한 방울도 먹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꿀을 맛보는 이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은 이리아는 정신없이 꿀을 퍼먹다가도 요한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웃어 주었다.
진한 갈색 머리 아래, 요한의 귀가 조금 새빨개졌다.
그가 수줍은 듯 고개를 푹 수그리며 속삭였다.
“너 진짜 귀여운 거 알아, 씨시? 너무 귀여워.”
“치, 칭찬인 거지……?”
“응. 당연하지.”
요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서 어슴푸레 장밋빛 기류가 돌기 시작했지만, 오로지 꿀에만 정신이 팔린 이리아는 알지 못했다.
이리아가 사기그릇을 싹싹 긁어 먹는 사이, 요한은 제자리서 한참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수차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침내 원하던 질문을 내던졌다.
“씨시, 너…… 그, 호, 혹시 남자친구 있어……?”
“있잖아. 너.”
“아, 아니. 나 말고, 그…… 애인 말이야.”
“애인은 없어.”
“그래?”
요한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바닥까지 깨끗해진 사기그릇을 가져갔다.
“다음에 또 가지고 올게.”
이리아는 요한이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또 꿀을 가져온다는 말에 기뻐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요한은 참 좋은 친구였다.
달콤한 꿀의 여운을 즐기며, 이리아는 세수를 하기 위해 계곡으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계곡 한구석에서는 콘라드 메이필드가 나무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여어, 장군님. 이제 좀 살아나셨나 봐?”
“왜…… 왜 다들 제가 아팠다는 사실을 아는 거죠?”
“너 쓰러졌다고 소문 쫙 났어. 모르면 간첩이지.”
“아…….”
콘라드의 대답을 듣자마자 막사에서 만났던 덱스터 하워드가 생각났다.
순간, 이리아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민망해졌다.
널리 소문이 퍼진 사실을 가지고 그에게 어떻게 알았냐며 질문했구나. 군단장인 그에게 분명 특별한 관심을 기대한 것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런 기대 따위 한 적 없는데도.
콘라드의 담뱃불이 꺼졌다. 그가 퀴퀴한 냄새로 전 손을 씻기 위해 세수하는 이리아 옆에 쭈그려 앉았다.
둘은 첨벙이는 계곡물 소리 안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씨시. 오늘 밤에 큰 술판을 벌일 거거든.”
“술판이요? 왜요?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요?”
“내일 아침에 부대를 옮길 거야. 다른 사람들이 말 안 해 주든?”
“아뇨. 그, 그런데 멀쩡한 부대를 갑자기 왜…….”
“방금 전 조사에서 마물이 근거지를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거든. 뭐, 달리 방법이 있겠어? 우리도 같이 남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그럼 부대를 옮기는 거랑 술판은 무슨 상관인데요?”
“전통이야, 인마! 군인들은 원래 부대 옮기기 전날에 항상 술 마셔!”
순 억지였다. 몸 상태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데다가 피곤한 이리아는 술판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반드시 와야 해’라는 콘라드의 당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군인들은 술판을 벌인다는 사실에, 간호사들은 찐한 휴식을 취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20, 30대의 젊은 여성들이 대다수였던 간호사들은 오랜만에 칙칙한 간호복을 벗어 던지고 그들 나이에 맞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줄리에타까지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자, 그제야 이리아는 콘라드가 말한 ‘술판’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말만 ‘술판’이지, 사실은 ‘파티’인 셈이다.
루퀼렘에서 빈털터리로 와 옷이 없던 이리아는 간호사들의 원피스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착한 줄리에타는 그녀의 눈빛을 알아채고선, 흔쾌히 원피스를 빌려주었다.
이리아는 줄리에타보다 훨씬 체구가 작았기에 그녀의 원피스는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원피스의 한쪽 어깨가 자꾸만 내려갔지만, 입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오랜만에 예쁘장한 치마를 입은 이리아는 ‘술판’에 참석하기 전,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한쪽 다리엔 두꺼운 붕대를 감고 얼굴도 영 퀭했으나, 원피스를 입으니 모두 괜찮은 듯했다.
밖은 이미 한창 술병을 따고 있었다. 이리아는 저 멀리 앉아 있는 덱스터의 등을 보자마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을 마주 보고 앉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세요, 씨시. 아직 몸 상태가 전부 회복되지 않았잖아요.”
줄리에타가 우려의 말을 하며 잔을 건네주었다.
비센티움의 술은 루퀼렘의 술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루퀼렘에서는 주로 곰팡이나 곡물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지만, 비센티움에서는 과일과 사탕수수, 향신료를 발효시켜 술을 만든다. 그 때문에 비센티움의 술은 루퀼렘의 술보다 더 달고, 색도 화려했다.
비센티움 사람들은 대부분이 애주가라더니, 술잔이 루퀼렘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술에 관해 문외한인 이리아는 단순히 가장 가까이 있던 술을 따랐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