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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3/109)

12화

덱스터가 황급히 이리아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이리아의 왼쪽 종아리는 찢어진 피부와 피로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이리아를 낚아챌 때, 마물의 발톱이 남긴 상처였다.

“이런…….”

덱스터는 부대가 있는 숲의 남쪽과 이리아의 종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마음을 굳혔는지 망토를 찢어 이리아의 허벅지에 단단히 묶었다.

그가 허리춤에서 은빛 술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보드카야. 감염되기 전에 빨리 소독해야 해.”

이리아는 공기 중에 희미하게 풍겨 오는 알코올 냄새를 맡자마자, 보드카가 독한 술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덱스터 하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주저하던 덱스터는 술을 쏟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아파도 참아.”

그리고 술이 쏟아져 내렸다.

이리아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고통은 빠르게 시작되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콸콸 술을 쏟아붓는 동안, 울며불며 발작을 일으켰다.

종아리의 상처가 불에 타들어 가는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사지를 비틀며 그만하라고 애원했지만, 덱스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술병이 바닥날 때까지, 보드카를 모조리 들이부었다.

고문과도 같던 소독의 시간이 끝나자, 이리아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눈꺼풀 아래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양의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덱스터는 망설임 없이 흉갑과 견갑을 벗어 던졌다. 그는 흐느끼는 이리아의 등 뒤로 망토를 묶은 후, 그녀를 조심스럽게 업었다.

덱스터의 어깨와 목덜미는 이리아의 눈물로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그가 이리아를 살짝 고쳐 업으며 일렀다.

“그만 울어. 산짐승들이 듣겠어.”

하지만 이리아의 흐느낌은 잦아들지 않았다.

덱스터가 그녀를 혼내듯,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일렀다.

“그만 울라니까!”

이리아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물기 무섭게, 이번에는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흐느낌은 어찌어찌 참을 수 있었지만, 딸꾹질이 튀어나오는 건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덱스터는 긴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리아를 혼내지는 않았다.

이리아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덱스터의 목덜미에 뺨을 파묻었다. 그의 맥박 소리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안정을 취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덱스터는 어둠 속에서 기척이 들려올 때마다 긴장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둘은 고요한 숲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덱스터는 나침반 없이도 북쪽과 남쪽을 귀신같이 알아맞히었다. 그 덕에 이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씨시?!”

숲 앞에서 덱스터를 기다리고 있던 콘라드 메이필드는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이리아를 보자마자 펄쩍 뛰었다.

그가 다급하게 입에 물고 있던 담뱃불을 껐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총소리의 원인이었어. 마물로 인해 다리를 심하게 다쳤더군.”

“야, 그…… 그게 무슨 개소리냐…….”

줄곧 덱스터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이리아가 눈물범벅인 얼굴을 들어 올렸다.

콘라드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쯔쯔 혀를 찼다.

“저녁에 숲은 왜 들어간 거야? 할 짓이 그렇게도 없었냐?”

“과…… 과일나무를 찾으려고 들어갔는데…… 그, 그렇게 멀리까지 갈 생각은 없었어요…….”

“어이구, 이 말썽꾸러기 아가씨야. 과일나무 찾다가 목숨이 날아가겠다!”

“죄송해요…….”

“상태를 보니까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겠군. 절뚝거리면서 반성해, 인마.”

콘라드가 땀과 흙으로 엉겨 붙은 이리아의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어뜨렸다. 이리아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 작게 미소 지었다.

덱스터는 이리아를 보자마자 파랗게 질린 간호사들에게 그녀를 넘겨준 후,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갔다.

이리아는 간이침대에 누워 뒤늦게 다리의 상처 부위를 치료받았다. 상처가 크고 깊은 탓에 마취 주사를 두 번이나 놓아야 했다.

‘루퀼렘이었다면 마법으로 치료를 해서 흉터도 남지 않았을 텐데…….’

이리아는 실들이 흉하게 자리 잡은 종아리를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

틸다도 목덜미에 흉터를 가지고 살아갔던 만큼, 그녀는 다리의 흉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긴장이 풀린 이리아에게 잠기운이 몰려왔다. 이리아는 줄리에타가 붕대를 감아 주는 와중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줄리에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반쯤 잠이 든 탓에 대답할 수 없었다.

***

이리아는 불편한 간이침대에서도 상당히 긴 시간 잤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덱스터 하워드를 포함한 군인들은 이미 조사를 나가고 없었다.

간호사들은 일제히 이리아가 지난 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리아는 과일나무를 찾으러 숲에 들어갔는데 마물을 만났고, 덱스터 하워드가 극적으로 나타나 구해 줬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간호사들은 덱스터 하워드가 너무 멋있다는 이유로 온종일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간호사의 호들갑을 영 이해할 수 없던 이리아는 그들을 피해 절뚝절뚝 계곡으로 도망갔다.

계곡은 여느 때와 같이 한산하고 조용했다.

이리아는 너른 돌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아픈 다리를 콩콩 두드렸다.

그가 싫든 좋든 상관없이, 덱스터 하워드는 이미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리아는 간호사들에게 간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전했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덱스터 하워드한테 생명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 피차 어색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은데…….’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리만큼 어색하고 껄끄러운 기류가 느껴졌다.

이건 절대 안 돼. 이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리아는 오랜 고민 끝에 그녀 나름의 방법으로 감사를 전하기로 했다. 그녀는 다리 한쪽을 절며 남몰래 덱스터의 막사로 들어갔다.

덱스터 하워드의 막사에서는 그 특유의 청아한 박하 향이 풍겼다. 덱스터는 물건을 이리저리 던지기 일쑤인 이리아와 달리, 정리·정돈을 매우 좋아하는 남자였다. 옷과 무기들이 모두 각에 맞추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리아는 가장 손때가 많이 묻은 단검을 찾아 검집을 분리한 후, 날카로운 은빛의 칼날 위에 주저 없이 입을 맞추었다. 대마법사의 축복을 검에 불어넣는 행위였다.

축복을 마친 이리아가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검집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검집을 보는 순간,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맞이하고 말았다.

뽑을 때는 몰랐는데, 검집의 앞과 뒤가 너무나도 비슷했다.

[어…… 어느 쪽이 앞이더라……?]

처음의 상태와 다르게 끼워 두면 덱스터 하워드가 단검을 누군가가 만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만다.

당황한 이리아가 검집을 앞뒤로 끼워 보았지만, 두 방향 모두 검과 완벽하게 맞물렸다. 이리아는 새빨간 머리칼을 헤집으며 제자리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끝내 아무렇게나 쏙 끼워 버렸다.

그녀는 천운이 도와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검집을 끼웠기를 바라며 막사를 빠져나왔다.

사실 다른 바쁜 간호사들과 달리, 이리아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어젯밤 그녀의 다리를 꿰맸던 줄리에타가 ‘절대 안정’을 수차례 강조하며 업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리아는 간만의 여유를 느끼며 걷는 연습을 했다.

생애 처음 댄 깁스에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발을 디디기 위해 마음속으로 하나, 둘 리듬을 세었다.

그렇게 이리아가 부대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다.

“씨시!”

“까…… 깜짝이야!”

요한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이리아의 볼을 손끝으로 찔렀다.

이리아는 요한을 보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주변을 쫙 훑기 시작했다. 요 며칠 새 요한과 그녀 사이에 훼방을 놓던 덱스터 하워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덱스터 하워드는 없었다.

요한이 두꺼운 붕대를 두른 이리아의 종아리를 확인하며 물었다.

“다리는 좀 어때? 많이 아파?”

“걸을 때 불편한 것 빼고는 괜찮아. 생각보다 통증이 심하지는 않네.”

“그래? 다행이다.”

이리아는 요한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는 부상 때문에 더 짧고 느려진 이리아의 보폭에 자신을 맞추었다.

이리아는 요한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였다. 아무리 군인들이 둘을 남녀관계로 엮어도, 여전히 요한은 이리아에게 가장 편한 친구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리아와 눈을 맞추던 요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가 이리아의 이마 위로 손등을 대었다.

“그런데 너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얼굴이 새빨개.”

이리아가 자신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요한의 말대로 열이 있는지, 얼굴이 뜨거웠다.

이리아는 요한과의 산책을 관두고 곧바로 줄리에타를 찾아갔다. 그녀는 이리아가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다친 다리부터 살폈다.

“다리 많이 아파요, 씨시? 진통제 좀 드릴까요?”

“아…… 아뇨. 진통제 말고 해열제가 필요해요.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어디 봐요.”

다른 간호사들은 한창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리아는 자신이 줄리에타를 방해했다는 마음에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주저 없이 피투성이의 장갑을 벗은 후, 이리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모, 몸이 불덩이잖아요, 씨시! 여태껏 어떻게 돌아다닌 거예요?”

“아……?”

“이 정도 열은 해열제 한 알로는 어림도 없겠어요.”

줄리에타가 깜짝 놀랄 정도로 열이 높은지는 몰랐다. 이리아는 약통을 뒤적거리는 줄리에타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열이 높다고 하니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이리아의 날숨이 열을 받아 서서히 뜨거워졌다.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를 되찾기 위해서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줄리에타의 목소리가 깊은 동굴에서 들려오는 듯 크게 메아리쳤다.

“혹시 밥 먹었어요? 씨시도 잘 알겠지만, 공복에 해열제 두 알을 삼키면 배가 아플 수도 있어서 간단한 간식이라도 먹어야…….”

“주, 줄리에타.”

“네?”

“저…… 저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아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리아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와장창. 간이 트롤리를 짚으려던 그녀의 손이 미끄러져 위에 있던 의료용품들을 쏟았다.

“씨시!”

줄리에타가 황급히 달려가 이리아를 부축했다. 하지만 이리아의 두 눈망울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눈을 뜬 채로 실신한 것이었다.

희미해진 의식 너머로 급히 다른 간호사들을 호출하는 줄리에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이리아의 이름을 외치며 달아오른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리아는 결국, 간신히 잡고 있던 마지막 의식의 끈까지도 놓치고 말았다.

***

새까만 심연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대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두 남녀의 대화 소리가 막사에 나직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설마 감염이 된 건 아니겠지?”

“공께서 소독을 일찍 해 주신 덕에 감염은 아니에요. 간밤에 무리해서 독한 감기에 걸린 듯합니다.”

“감기라 하기에는 너무 힘들어하잖아. 해열제는 몇 알이나 먹은 거지?”

“해열제를 먹기 전에 기절해서, 대신 주사를 놓았습니다. 한 시간 후에도 열이 안 떨어지면 한 번 더 놓을 예정이에요.”

둘 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몽롱한 이리아는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루퀼렘 성에서 마법에 둘러싸여 살아온 이리아는 감기에 걸린 적이 없었다. 이번이 인생의 첫 번째 감기인 만큼, 이리아에겐 치명적이었다. 감기 하나 때문에 죽음과 삶의 문턱을 오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끔뻑이던 이리아는 또 한 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심연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녀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땐, 루 아휜이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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