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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2/109)

11화

“늦게 왔네요, 씨시. 다음번에는 하워드 공이 텃세를 부리시려는 순간 후딱 뛰어와요. 잘못 걸리면 골로 가는 수가 있어요.”

“하워드 공은 원래 자주 저러신가요?”

“아뇨. 오늘 특히나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봐요. 표정이 굳은 게, 딱 봐도 불쾌한 일이 있으셨던 듯하던데요.”

“얼굴이 왜 그래요, 씨시? 뭔가 아는 거라도 있어요?”

“아…… 아녜요. 그, 그냥 엉덩이가 좀 아파서…….”

이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게,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가 왜 기분이 나쁜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녀와 닿아서 그런 거다.

퀸터에서 떨어지는 이리아를 잡아 줄 때, 그녀의 옆구리와 손이 닿아서.

덱스터 하워드가 왜 급하게 손을 놓았었는지 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손이 이리아의 옆구리를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거다.

깨달은 순간, 불쾌감이 들어 손을 놓은 거지.

이리아는 문득 억울해졌다. 그녀는 덱스터 하워드에게 몇몇 실언을 내뱉긴 했지만, 몸이 닿는 것까지 싫어할 정도로 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었다.

“흥! 너만 나 싫어하냐? 나도 너 싫거든…….”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씨시?”

“아,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이리아가 또 한 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 수다스러운 간호사들에게 덱스터 하워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절대, 하늘이 열두 쪽이 난다 해도 말할 수 없었다.

나날이 지날수록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가 더 싫어졌다. 그는 요한이 이리아에게 귀여운 장난을 치려고 할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요한을 끌고 가기 일쑤였다.

마치 지금처럼.

‘이번에도 또……!’

요한이 뒤에서 이리아의 볼을 살짝 찌르려는 찰나, 덱스터 하워드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 그의 귀를 잡았다. 이리아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요한을 끌고 가는 덱스터 하워드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덱스터 하워드가 등을 돌리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내리깔았다.

‘덱스터 하워드는 나를 군부대의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려고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게서 요한을 빼앗아 갈 리가 없잖아…….’

괜히 서러워진 이리아가 옷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터덜터덜 떠나가는 그녀의 걸음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리아의 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졌다. 덱스터 하워드는 그녀가 다른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할 때마다 나타나 말을 가로챘다.

그의 훼방 덕분에 이리아는 요한과 콘라드 메이필드를 포함한 그 어느 군인과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짜증 나!]

막사에 돌아온 이리아는 분통을 터뜨리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덱스터 하워드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싫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조사를 나갔던 군인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한참을 부들부들 떨던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를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하며 막사를 나섰다.

하늘이 이리아의 기도를 들어준 걸까, 돌아온 군인들 사이에 덱스터 하워드는 없었다. 그는 종종 콘라드 메이필드와 함께 숲에 남아 마물 조사의 후처리를 하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어디 가요, 씨시?”

“숲이요. 근처에 과일나무가 있는지 살펴보려고요.”

“얼마 전에 숲 남서쪽에서 마물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자, 위험하니 총이라도 챙겨 가세요.”

“어…… 고마워요.”

“너무 멀리 가지는 마세요!”

이리아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줄리에타가 건넨 소총을 품에 안았다.

그녀는 서늘한 총신을 쥐고서 군인들이 자주 다니는 오솔길을 따라 검은 숲을 파고들었다.

숲은 노을이 지고 있어 생각보다 훤했다. 이리아는 부대가 보일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숲 나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그중 열매가 난 나무는 없었다.

비센티움 사람들 사이서 유일하게 채식을 하는 이리아에게 과일은 몹시 중요했다. 가끔 도심으로 심부름하러 가는 군인들이 과일을 한 바구니씩 사 오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요즘 동이 나는 중이었다.

“이쯤에서 돌아가야 하는데…….”

부대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아는 ‘조금만 더’를 중얼거리며 깊은 숲속에 발을 디뎠다. 과일나무를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노을은 빠르게 내려갔다. 이리아는 하늘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다급히 뒤를 돌았지만, 부대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리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휘저으며 틸다를 찾았다. 하지만 죽은 틸다가 그녀의 곁에 있을 리 없었다.

검은 숲속에서, 이리아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아…… 안 돼.]

이리아가 라이터를 켜 부대로 향하는 길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숲의 동서남북이 모두 비슷한 탓에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검은 숲은 이리아의 생각보다 더 어둡고 넓었다. 언제 어디서 들짐승이나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이리아가 가진 무기라고는 딸랑 줄리에타가 준 다섯 발의 볼트액션 소총뿐이었다.

철컥. 이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총탄을 장전했다.

두려움에 빠진 이리아의 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제자리서 동이 틀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까도 생각했지만, 나무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화들짝 놀라 뛰고 말았다.

‘과일나무를 찾으러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어. 보이지 않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이리아는 후회를 거듭하며 떨리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는 이리아의 심장을 땅끝까지 뚝 떨어지게 했다. 그녀는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그곳을 향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마물이나 짐승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아는 자신이 부대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숲의 기척들을 피해서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딱! 이리아의 등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자리한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 네 다리로 서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리아는 본능적으로 그 짐승이 말로만 듣던 ‘마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늑대를 닮은 마물의 거대한 몸뚱어리는 털인지, 비늘인지 모를 것들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평범한 짐승과 달리 선뜩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깜빡이기조차 하지 않았다.

마물의 잇새에서 검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이리아가 공격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을 운용했다. 정상적으로 마력이 운용되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하얀 머리와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이리아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마법이 안 된다고……?’

지난 20년을 살며, 마법이 나오지 않는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이리아는 대마법사였고, 마법은 그녀의 손발과도 같았으니까.

사실, 마법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리아가 아주 어렸을 적, 폭주를 예방한다는 이유로 루퀼렘의 성기사들은 그녀의 공격 마법을 봉인해 두었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이러한 내막을 전혀 몰랐고, 마법을 쓸 수 없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리아의 두 눈에 아롱아롱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득한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녀를 옭아매었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살기 위해 총이라도 쏴야 한다.

이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들어 올렸다.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그녀의 머릿속에 마물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먹음직스러워.]

루퀼렘의 언어였다.

이리아의 두 눈이 커졌다. 대체 왜 마물이 루퀼렘의 언어를 쓸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퀼렘과 거리가 아주 먼 비센티움의 산간 지역에서 루퀼렘어를 쓰는 마물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물은 이 상황이 진짜라는 듯 또 한 번, 이리아의 머릿속에 루퀼렘어를 불어 넣었다.

[네게서 짙은 마법의 향기가 나는구나…….]

마물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이리아를 향해 새카만 콧잔등을 들이밀었다. 콧잔등 아래로 엄청난 크기의 송곳니가 드러났다.

저 두 송곳니에 물리면, 이 몸뚱어리는 곧바로 반 토막 난다. 다급해진 이리아는 총구도 제대로 조준하지 않은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거친 총성이 검은 숲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에 찬 마물의 울음소리가 이리아의 머릿속을 메웠다.

마물의 왼쪽 눈에 총탄이 박혔다. 그는 남은 한쪽 눈을 부라리며 다음 총탄을 장전하는 이리아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리아는 손이 떨리는 탓에 총을 제대로 장전하지 못했다.

이리아가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마물이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리아는 매섭게 비명을 내지르며 장전되지 않은 소총 대가리를 마물의 주둥아리에 쑤셔 넣었다. 마물이 이를 악물자, 소총은 단번에 부서졌다.

마물은 도망가려는 이리아의 종아리를 낚아채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이리아의 몸이 거친 흙과 돌멩이에 고통스레 쓸렸다.

정신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이리아의 머릿속에 마물의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이곳은 너무 척박한 땅이야. 마법의 향을 느낀 게 얼마 만인지…….]

이리아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물의 검붉고 기다란 혀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난 줄곧 이 향기가 그리웠어.]

하지만 마물이 이리아의 뺨을 핥으려는 순간, 은빛의 검이 날아와 오른쪽 눈을 꿰뚫었다. 두 눈을 모두 잃은 마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휘청였다.

이리아의 흐릿한 시야 안쪽으로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이리아는 그를 보자마자 더 콸콸 눈물을 쏟고 말았다.

쿵. 덱스터 하워드가 마물의 대가리에 거칠게 주먹을 휘둘렀다.

마물은 단번에 중심을 잃어 넘어졌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 엄청났는지, 그것은 한참을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지 못했다.

오랜 시간 마물을 상대해 온 군단장답게, 덱스터 하워드는 행동 하나하나가 빠르고 깔끔했다. 그는 마물의 오른쪽 눈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고선, 튀어 오른 마물의 주둥이 안쪽으로 뱀브레이스를 욱여넣었다.

그 후, 마물의 이마 한가운데에 검을 찔러 넣어 간단하게 죽였다.

덱스터 하워드는 마물의 심정지를 확인하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은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젠장, 대체 왜 이곳에 네가……!”

그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고, 얼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하던 덱스터는 급기야 눈물범벅인 이리아를 향해 거칠게 호통치기 시작했다.

“너 미쳤어? 하늘이 어두울 때 숲에 들어오는 짓은 자살 행위와도 같다는 거 모르나?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내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마물한테 물려서 개죽음을 당하면 어쩔 뻔했냐고-!!”

마지막 대목을 내뱉자마자, 덱스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울분을 참는 듯 아랫입술을 새게 깨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리는 이리아에게 덱스터의 호통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분노에 찬 덱스터 하워드에게, 그녀가 말할 수 있는 문장은 딱 하나뿐이었다.

“죄…… 죄송해요…….”

하아. 덱스터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리아를 일으키기 위해 팔을 뻗었고, 이리아는 발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두 다리에 힘을 주기 무섭게, 그녀는 거친 비명을 쏟으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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