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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1/109)

10화

저 멀리서 군인들에게 명령하는 덱스터 하워드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에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넋을 놓은 이리아가 비키지 않자, 군인이 팔로 그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버티려고 용을 썼다. 하지만 비센티움 군인의 힘을 한낱 루퀼렘 마법사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단번에 곤두박질쳤다.

차가운 바닥에 넘어진 이리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그녀는 급기야 엉금엉금 기어가 군인의 팔을 껴안고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안 돼요! 틸다한테 뭘 하시려는 거예요! 하지 마요!”

“비켜! 야, 누가 얘 좀 잡아 봐!”

“싫어! 싫어요! 하지 마, 하지 마아-!”

이리아의 눈앞이 새까매졌다. 기계처럼 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발음이 뭉개진 탓에 그마저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방해야, 씨발.”

이리아가 계속해서 일을 방해하자, 군인이 그녀를 향해 상스러운 욕을 뇌까렸다. 그의 주먹이 이리아의 머리를 향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탁. 누군가가 군인의 어깨를 잡았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등 뒤에는 덱스터 하워드가 굳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하워드 공.”

“귀 병신이야? 마물 족적부터 조사하라고 한 말 못 들었나?”

덱스터 하워드의 턱이 분노로 불끈거렸다. 군인은 팔을 움켜쥔 이리아를 거칠게 뿌리치고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리아는 생각할 틈도 없이 덱스터 하워드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녀는 닭똥만 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덱스터 하워드를 향해 고개를 정신없이 내저었다. 제발 틸다만은 건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덱스터 하워드는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흐느끼는 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허리춤에서 술병과 라이터를 꺼내 틸다의 사체 위로 던졌다.

“빨리 태워 버려.”

이리아가 허겁지겁 술을 틸다의 몸에 부었다. 고깃덩어리가 되어 군인들에게 먹힐 바에는, 차라리 뼛가루가 되어 땅에 스며드는 게 나았다.

덱스터 하워드는 이리아가 틸다의 사체를 모두 처리할 때까지 망을 보듯 서 있었다.

불이 타오르는 동안,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를 신경 쓸 틈도 없이 서럽게 울기만 했다. 오랜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 그리고 비센티움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는 외로움이 마음속 깊이 사무쳤다.

이리아는 틸다의 유해를 모아 계곡물에 뿌려 주었다. 이제 이리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새하얀 갈기 몇 가닥뿐이었다.

‘내가 미안해, 틸다…….’

틸다를 루퀼렘에 두고 왔다면 예쁜 목덜미에 흉터가 생길 일도, 마물에 물려 죽는 일도 없었을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틸다에게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어.

틸다가 자신 때문에 겪은 고생들을 생각하자, 이리아는 더더욱 서러워졌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막사로 돌아온 그녀는 틸다의 갈기를 엮어 투박한 팔찌를 만들었다.

‘그 어떤 조랑말도 두 번째 틸다가 되지는 못할 거야.’

이리아는 팔찌를 품 안에 꼭 안고선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개가 짖는 소리와 각종 소음이 들려오는 막사 안에서, 그녀는 틸다와의 추억에 젖어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평소 같았다면 이리아의 퉁퉁 부은 얼굴을 놀렸을 군인들도 간밤에 그녀가 조랑말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침묵을 유지했다. 이리아와 틸다가 단순히 주인과 조랑말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리아에게 틸다가 사라진 아침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계곡물에서 빨래를 하다가도 훌쩍이고, 군인에게 붕대를 감아 줄 때도 훌쩍였다.

차라리 틸다가 생각날 틈도 없이 바빴으면 좋았을걸, 꼭 이런 날에는 환자가 많이 없었다.

이리아는 언제나 반대로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하늘을 원망하며 부대를 거닐었다.

‘평소였다면 이 길도 틸다와 함께 걸었을 텐데…….’

틸다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몰아쳐 이리아를 흠뻑 적셨다.

지평선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던 이리아의 어깨에 뜨거운 살덩이가 닿아 왔다. 화들짝 놀랄 기력조차 없던 이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살덩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덱스터 하워드의 흑마, 퀸터의 콧잔등이었다.

[퀸터……?]

푸르릉. 퀸터가 이리아의 어깨에 콧잔등을 문지르며 콧김을 내뿜었다.

이리아는 혹시 조사를 나갔던 군인들이 일찍 돌아왔나 싶어 부대를 살펴보았지만, 부대는 여전히 조용했다. 덱스터 하워드가 자신의 흑마를 놓고 조사를 나간 것이었다.

퀸터의 성격은 틸다와 정반대였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지는 않으나 애교가 많았다.

이리아는 우악스럽게 주둥이를 들이미는 퀸터의 볼을 살살 쓸어 주었다.

조금 흥분했던 퀸터는 이리아의 온기를 느끼자마자 단숨에 진정되었다. 이리아가 작게 웃으며 새까만 퀸터의 콧잔등에 제 이마를 지그시 맞대었다.

[착해라…….]

퀸터가 마치 이리아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코를 푸르릉 털었다.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 퀸터의 호흡을 느끼다가, 그의 등에 훌쩍 올라앉았다.

틸다의 등에 올랐을 때보다 훨씬 더 높고 넓은 시야가 이리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네 등 위에 앉으니까 세상이 다 작아 보인다, 퀸터.]

덱스터 하워드는 언제나 이런 세상을 보고 있었던 거구나.

퀸터는 이리아를 등에 올리고서 천천히 지평선을 거닐었다.

검은 숲 너머로 주홍빛의 노을이 지고 있었다. 루퀼렘 성에서는 그림으로만 봤던, 아름다운 자연의 광경이었다.

저 멀리서 조사에 나갔던 군인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리아는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사라진 틸다의 영혼을 따라 저 머나먼 지평선 끝까지 가고 싶었다. 지평선 끝에서는 틸다가 살아 돌아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퀸터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우뚝 멈추었다.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이리아가 있는 힘껏 퀸터의 고삐를 당겨 보았지만, 고삐는 당겨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고삐 앞머리를 잡은 탓이었다.

이번에도 덱스터 하워드였다. 그는 퀸터의 고삐를 잡은 채로 울기 일보 직전인 이리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리아가 허락 없이 퀸터를 타서 죄송하다고 하려 했지만, 입을 여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있는 힘껏 흐느낌을 참는 그녀의 허벅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힘이 들어갔다.

옆구리가 예민한 군마에게 다리에 힘을 주는 행위는 앞으로 돌진하라는 뜻과도 같다.

히이잉! 퀸터가 요란하게 울며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어엇……?!”

이리아의 몸이 옆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덱스터 하워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황급히 땅으로 곤두박질치려는 이리아를 붙잡았다.

서늘한 뱀브레이스로 감싸진 팔이 이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덱스터 하워드의 품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리아는 눈물 어린 눈동자를 크게 치켜떴다.

덱스터 하워드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었다.

막사에서 다친 어깨를 치료했을 때보다도, 더더욱 가까이에.

살짝 열린 잇새로 그의 숨결이 새어 나왔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의 숨결에서부터 박하 향이 난다는 사실을 이 순간 처음 깨달았다.

덱스터 하워드는 흑진주보다도 더 새까만 눈동자로 이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팔에는 서서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리아가 이만 놓아 달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숨결이 입술에 닿아 오는 순간. 덱스터 하워드는 언제 잡았냐는 듯 재빠르게 팔을 풀어 버렸다.

“아야!”

쿵. 이리아는 단숨에 추락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바닥에 주저앉은 이리아를 훑어보지도 않고선, 퀸터를 데리고 쌩 가 버렸다.

이리아는 멀어져 가는 덱스터 하워드의 등을 향해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틸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잡아 주면 끝까지 잡아 줄 것이지, 중간에 푸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덱스터 하워드의 매너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분명 엉덩이에 검푸른 멍이 들어 있을 터였다.

[아파 죽겠네…….]

이리아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부대로 돌아갔다. 퀸터를 데리고 먼저 갔던 덱스터 하워드의 모습은 부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아는 자리에 없는 덱스터 하워드를 향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요한과 함께 앉아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태우고 있던 줄리에타가 이리아를 보자마자 펄쩍 뛰었다.

“씨시, 어딜 갔던 거예요! 한참 찾았잖아요!”

“미안해요. 바람 좀 쐬려고 걷다 보니 상당히 멀리까지 가 버려서…….”

“병사들이 개를 풀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조금만 늦게 왔으면 대대적인 수색이 펼쳐졌을 거라고요.”

개의 목줄을 쥔 병사들이 이리아를 힐난하는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이리아는 미안한 마음에 그들에게 여러 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요한의 옆에 앉았다.

요한이 기다렸다는 듯 이리아의 무릎에 겉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날씨가 변덕스럽네. 여름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겨울이 다가오는 것 같아.”

“난 추운 날씨 좋아해. 더운 날들보다는 훨씬 낫지.”

“그건 나랑 반대구나, 씨시. 나는 추위를 잘 타서 겨울보다는 여름이 좋아.”

“그래……? 그럼 내가 너를 위해서 겨울을 짧게 줄여 줄게!”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한참 황당한 표정으로 이리아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웃음꽃을 되찾아 갔다.

요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이리아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달라붙었다.

“넌 종종 아이 같을 때가 있어, 씨시. 겨울을 줄인다니, 말이 안 되잖아.”

“왜 말이 안 돼? 나는 겨울도 짧게 만들 수 있고, 저 하늘 높이 뜬 태양을 없애 버릴 수도 있어. 세상의 모든 바닷물을 강물로 뒤바꿀 수도, 모래사장의 모래들을 금가루로 바꿀 수도 있지!”

“……더 할 수 있는 건 없어?”

“더 알려 줄까? 난 거대한 코끼리를 새끼손가락만 한 보석함에 집어넣을 수도 있어!”

이리아의 정체를 알 리 없는 요한은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아도 요한을 따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녀가 뒤늦게 애교 섞인 어투로 덧붙였다.

“농담이야. 어떻게 인간이 코끼리를 보석함에 집어넣냐? 말이 안 되지.”

요한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아는 요한과 시시덕대는 통에 정신이 팔려 덱스터 하워드가 돌아왔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멀리서 덱스터 하워드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고서야 요한과의 대화를 멈추었다.

“얼굴에서 여유가 넘치는군. 다들 할 일이 없나 보지?”

말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군인들은 깜짝 놀란 비둘기들처럼 황급히 흩어졌다. 그중에는 당연히 요한도 포함이었다.

그는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슬쩍 귀 뒤로 넘겨 주고선, 후다닥 모습을 숨겼다.

이리아는 도망치는 요한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상사를 보자마자 도망치는 꼴이, 마법으로 장난을 치다가 루에게 걸린 이리아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그녀는 곱게 달아오른 양 볼을 감싸고선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평소대로였다면 틸다의 갈기를 빗겨 줄 겸 마구간으로 도망갔을 테지만, 이제 그녀에게 틸다는 없었다. 이리아는 손목에 단단히 묶인 팔찌를 쓰다듬는 것으로 빗질을 대신했다.

덱스터 하워드의 시선을 피해 들어간 막사에는 이미 간호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이리아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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