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02.
이리아가 비센티움에서 생활하며 느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들은 어딜 가나 똑같다’이다.
“너희 둘은 또 붙어 다니냐? 잉꼬가 따로 없다, 야.”
“그럴 바에는 그냥 공개 연애해라, 씨시.”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친구라고요!”
“미안하지만,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단다? ‘야’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는 거야, 인마.”
“자꾸 그러시면 정말로 화내요! 요한이 민망해하잖아요!”
“……저게 민망해하는 거냐? 좋아 죽겠다는 표정인데?”
어딜 가든, 사람들은 이성이 함께 다니면 연인 관계로 엮는다. 그리고 그건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리아가 씩씩대며 요한을 돌아보자,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둘의 시선이 만나자 군인들의 환호성은 더 커졌다.
그 어떤 행동을 해도 불난 집에 기름 붓기 꼴이었기에, 이리아는 그냥 자리를 피해 버렸다.
흔히 사람들은 이성끼리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리아에게 요한은 정말로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와 자신을 연인관계로 엮는 게 너무 불편했다.
[짜증 나…….]
이리아가 돌멩이를 툭툭 차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틸다의 갈기를 빗겨 줄 시간이었다.
이리아는 조랑말 틸다가 예쁜 꼬리를 살랑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틸다는 바빴다. 그녀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이나 다른 말과 열심히 교미하는 중이었다.
[왜 교미를 해도 하필 저 말이랑…….]
이리아는 허무맹랑한 얼굴로 퀸터와 틸다를 바라보았다. 덱스터 하워드가 제발 자신의 흑마와 틸다가 ‘이렇고 저런 사이’인 걸 모르기를 바라며, 건초 보관 상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군인들의 놀림을 듣고 왔기 때문일까, 틸다와 퀸터의 교미 장면이 괜히 짜증스러웠다. 상자에 앉아 둘을 구경하고 있는 자신이 웃기고 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참 다행스럽게도, 교미는 금방 끝났다. 이리아는 퀸터를 옆눈으로 흘끔거리며 틸다에게 다가갔다.
주인을 금세 알아본 틸다가 제 갈기를 이리아에게 들이밀었다.
[그…… 틸다. 하는 건 상관없는데, 망아지는 절대 생기면 안 된다?]
망아지 생기면 상황 복잡해져. 이리아가 틸다의 갈기를 빗기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틸다는 성격이 온순하나 애교는 없는 조랑말이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멀어져 가는 이리아를 잡지 않았을 텐데, 성공적인 교미를 마쳐서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이며 졸졸 따라붙었다.
이리아는 옆구리에 콧잔등을 비비는 틸다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후, 막사로 돌아갔다. 막사는 어김없이 군인들의 피 냄새로 진동했다.
“씨시, 유통기한이 넘어간 약들이 보이던데. 정리 좀 해 주시겠어요?”
“네.”
피 냄새도 이제 익숙해졌다. 이리아는 다쳐도 싱글벙글한 군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후, 약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도심으로 자주 나가지 못하는 군부대의 특성상, 간호사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약을 한 번에 대량으로 가져온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약들의 유통기한이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관리하는 일도 간호사의 몫이었다.
이리아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을 잔뜩 품에 안고선 가까운 모닥불로 향했다. 불 앞에는 콘라드 메이필드가 앉아 있었다.
그의 왼쪽 발목엔 못 보던 붕대가 감긴 상태였다.
“또 다치셨어요?”
“응. 이번에는 발목. 말 타는데 한눈팔다가 떨어졌어.”
“낙마했는데도 크게 안 다치셔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나름 군인인데, 그 정도로 크게 다치면 안 되지.”
콘라드가 호탕하게 웃는 사이, 이리아는 불 속에 약들을 와르르 쏟아 넣었다. 기한이 지난 알약들은 함부로 버리면 동물들이 먹거나 환경이 오염되기 때문에, 태워서 없애 버려야 했다.
아주 잠시 이리아와 콘라드 사이서 흔치 않은 침묵이 흘렀다.
콘라드는 타들어 가는 약들을 한참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씨시, 너는 전쟁이 끝나면 뭐 할 거야?”
“글쎄요. 전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부단장님은요?”
“나? 나는 귀농 계획 중.”
“귀…… 귀농이요? 부단장님이!?”
“가끔은 허무맹랑한 계획이 사는 데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어, 씨시. 어차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거든.”
“그런가요?”
“고럼, 당연하지.”
콘라드가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이리아에게 앉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아는 마다하지 않았다.
허무맹랑한 계획이 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가끔은 기분전환 겸 세워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허무맹랑한 계획이 뭐가 있을까. 이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저는 결혼이나 할래요!”
저 멀리서 ‘악! 물을 왜 다 뱉어 내세요, 단장님!’이라고 기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는 등을 살짝 돌렸다가 덱스터 하워드의 뒷모습을 보고선 곧장 바르게 앉았다.
콘라드가 말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끄트머리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그는 이리아에게 이미 익숙한 모습이었다.
“담배 그만 피우세요. 몸에 안 좋아요.”
“나도 피우고 싶어서 피우는 줄 아냐? 이 쪼그마한 걸 끊을 수가 없어.”
“처음부터 시작을 안 하셨으면 됐잖아요.”
“말은 쉽지……. 알고 보면 이게 다 덱스터 하워드 때문이야. 그놈이 피워서 나도 피우기 시작했는데, 나는 골초로 만들어 두고 치사하게 자기는 쏙 끊었다니까?”
“하, 하워드 공이 담배를 태우셨었어요?”
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몸에서 좋은 향이 나서 담배 따위는 평생 입에도 대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콘라드가 조금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깜짝 놀란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름 신사다운 성격을 지닌 그는 이리아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내뿜은 후, 말을 이었다.
“그 양반은 열다섯일 때부터 피웠어, 씨시. 하루에 한 갑은 무조건 태웠지.”
“정말요? 그렇게 중독이 심했는데 어떻게 끊으셨대요?”
“어떤 꼬마애가 끊으라고 혼냈대. 참 웃기지? 의사가 끊으라고 했을 때는 듣는 척도 안 하던 놈이…….”
이리아가 눈초리 끝으로 덱스터 하워드를 흘끔거렸다. 그는 나무에 묶인 사냥개들에게 정체 모를 동물의 고기를 찢어 주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머리칼 위에 나무의 그림자가 더해졌다. 덱스터 하워드의 검은 정수리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이리아는,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불에 덴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떤 꼬마애가 혼냈다라…….’
문득 이리아의 머릿속에 루퀼렘 성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토록 성에 갇혀 살았던 이리아는 자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발코니에 걸터앉아 ‘밖’을 구경하곤 했다.
한번은 그녀가 발코니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던 한 외국인이 1층 후원에 와 담배를 태웠었다. 그는 이리아의 인생에서 처음 보았던 외국인이었기에 기억 속에 더욱 생생히 각인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꺼낸 이리아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예전에 창밖에서 담배 피우던 어떤 외국인 아저씨를 혼낸 적 있어요.”
“그래? 그럼 그 아저씨는 담배 끊으셨대?”
“잘 모르겠어요. 그때 이후로 만난 적 없거든요.”
“그런 인연들이 가끔 있지. 우연히 만난 아저씨인가 보다, 씨시?”
“네, 우연히 만났죠. 생각해 보면 그 아저씨가 하워드 공이랑 비슷한 면들이 조금 있었어요. 머리카락 색도 까맸고, 키도 되게 컸던 것 같고, 말투도 비슷했고…….”
“내 말투랑 어떤 점이 비슷했는데?”
“글쎄요. 오만하고 싸가지가 없었던 게, 하워드 공이랑 똑같…….”
말끝이 흐려졌다.
이리아와 콘라드의 고개가 동시에 위로 올라갔다.
분명 저 멀리서 개에게 간식을 주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온 건지, 덱스터 하워드가 둘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로 드러난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이리아는 쏜살같이 벌떡 일어났다.
“그…… 죄,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선,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뒤편에서 ‘야! 치사하게 혼자서 도망치냐?!’라는 콘라드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를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어머. 식은땀을 왜 그렇게 많이 흘려요, 씨시?”
“아…… 아무것도 아녜요. 그, 그냥 더워서…….”
이리아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헛기침했다. 그녀는 막사 한구석에 조용히 박혀 다시 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약 정리는 한참이 걸렸다. 입맛이 없던 이리아는 저녁을 거르고선 곧바로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계곡물을 맞으니 약 정리 때문에 침침해졌던 눈이 조금 나아진 느낌이었다.
군인들과 간호사들은 계곡 앞쪽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이리아는 가죽이 다 벗겨져 고깃덩어리 신세가 된 산양에게서 시선을 휙 돌려 버렸다. 생고기는 익숙해져도, 가죽이 벗겨진 짐승의 모습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한 간호사가 막사에 들어가려는 이리아를 잡아 물었다.
“씨시, 저녁은요?”
“입맛이 없어서 오늘은 거르려고요. 먼저 잘게요.”
“그래요……? 잘 자요.”
이리아는 간호사에게 작게 웃어 보인 후,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군인들 사이에 덱스터 하워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우람한 체형만큼 많이 먹었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 앞에 쌓여 있는 짐승 뼈들을 보고선 혀를 내둘렀다. 혼자서 고라니 한 마리 정도는 해치운 듯싶었다.
이리아가 커다랗게 하품을 하며 막사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간이침대에 거리낌 없이 몸을 뉘었다.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 피곤했다.
소란스러운 바깥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아는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은 그녀가 깊은 한밤중에 잠에서 깬 이유는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서였다.
“씨시. 씨시 힐데어.”
이리아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흐릿한 시야 안쪽에서 낯선 군인 한 명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네 조랑말이 죽었어.”
일순간, 이리아의 세상이 우뚝 멈추었다.
이리아는 감각이 사라진 다리를 이끌고 군인을 따라나섰다. 군부대의 새벽 3시는 다른 때와 달리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군인들이 눈을 돌린 틈을 타, 마물 한 마리가 부대 안쪽까지 침범한 탓이었다.
이리아는 공중에서 울려 퍼지는 사냥개의 울음소리를 헤치며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썩어 들어가는 낙엽 위에, 새하얀 조랑말 한 마리가 고이 누워 있었다.
틸다였다.
“아…… 안 돼.”
이라아는 단번에 틸다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둥근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티…… 틸다, 틸다. 정신 차려 봐. 눈 좀 떠 봐, 응……?”
하지만 하얀 조랑말은 이미 숨이 멎었다. 이리아가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틸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리아의 손에 검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어느덧 눈물범벅이 된 이리아가 틸다의 피로 물든 자신의 양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홀로 부대를 돌아다니다 마물한테 물린 것 같아. 아까운 말이 하나 죽었네, 쯔쯔.”
이리아를 데리고 온 군인이 혀를 찼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은 이리아를 향해 턱짓했다.
“뭐 해? 비켜.”
“예……?”
“썩기 전에 고기로 남겨 둬야지.”
이리아의 세상이 또 한 번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