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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9/109)

8화

부대에서 덱스터 하워드를 찾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는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마구간 혹은 무기고에 있었다. 자신의 흑마인 퀸터의 털을 빗기고 무기를 손질하는 게 덱스터 하워드의 전쟁터 속 취미생활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덱스터 하워드는 이번에도 마구간에서 퀸터의 갈기를 손봐 주고 있었다.

이리아는 나무 뒤에 숨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덱스터 하워드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리아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군단장답게 청력은 예민했지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그런 듯했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았던 덱스터 하워드가 계속 말갈기만을 빗고 있자, 이리아는 초조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다가, 처음으로 덱스터 하워드를 입 밖으로 불렀다.

“하…… 하워드 공.”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걸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엄청난 용기를 내서 건드린 것이었음에도 여전히 반응이 없자, 덱스터 하워드가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이리아는 잠시 그냥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다시 한번 없는 용기를 긁어모아 그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분명 꺼지라고 했지!”

덱스터 하워드가 성난 고함을 내지르며 이리아를 뒤로 밀쳤다. 엄청난 힘으로 상체를 밀어내는 뱀브레이스를 이리아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쿵. 그녀는 휘청거릴 틈도 없이, 단번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발치에 넘어진 이리아를 본 덱스터 하워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한참 새까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리아를 일으키기 위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이리아가 어깨를 떨자마자 곧바로 팔을 거두었다.

덱스터 하워드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는 이리아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너인 줄 몰랐어.”

“아…… 아녜요…….”

이리아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언젠가 비슷한 일을 한 번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때는 적어도 이렇게 넘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고개를 숙인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자마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번에는 머리를 묶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어, 어깨 실을 빼내야 하는데…… 그…… 바,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아니야, 하나도 안 바빠.”

덱스터 하워드는 말을 하면서 그의 몸을 감쌌던 갑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건틀렛과 뱀브레이스가 바닥에 떨어지고 견갑과 흉갑까지 풀리자, 그의 상체에 남은 건 얇은 튜닉 셔츠 하나뿐이었다.

셔츠는 단추가 없이 위로 한 번에 벗는 형태였다. 덱스터 하워드가 망설임 없이 셔츠를 뒤집어 벗자, 이리아는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몸이 너무 좋았다.

덱스터 하워드는 한 손에 셔츠를 쥐고선 건초 보관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이리아는 그가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머리카락을 많이 넘긴 후, 어깨의 실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실이 떠난 자리에는 새빨간 실밥 흉터가 남았다.

이리아는 그녀의 옆에 퀸터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이 고요하고 어색한 상황에 덱스터 하워드랑만 있었다면, 실을 빼는 도중 딸꾹질을 하고 말았을 터다.

“다…… 다 됐어요.”

이리아는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덱스터 하워드를 힐끔거렸다.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게 습관인 건지, 덱스터 하워드는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선 이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이리아가 인사답지 않은 인사를 하고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은 가위와 뜯어 낸 실들을 내팽개치고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 쉬는 것마저도 잊고 있었다.

이제 됐다. 이리아는 만일 다음에 덱스터 하워드가 또 어깨를 다쳐 온다면, 그때는 핑계를 대서라도 다른 간호사에게 일을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덱스터 하워드를 상대하고 싶은 간호사들은 넘치고 넘쳤다.

시간은 막힘없이 흘러, 이리아가 새벽 보초를 서는 날이 돌아왔다.

콘라드 메이필드는 그녀가 보초를 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물컵을 쓱 내밀었다.

이리아는 컵 안에 담긴 새까만 액체를 보자마자 식겁했다.

“이, 이게 뭐예요?”

“커피. 넌 어떻게 커피도 모르냐?”

“모…… 모를 수도 있죠…….”

머쓱해진 이리아가 황급히 컵에 입술을 댔다. 하지만 커피를 한 모금 삼키자마자,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침하기 시작했다.

“웩-이런 걸 왜 마시는 거예요?”

“완벽한 어른이 되기는 멀었구나, 씨시. 그걸 즐겁게 마셔야만 진정한 어른이라 할 수 있단다.”

“너무 쓴데. 설탕 한 숟가락만 타면 안 돼요?”

“마시다 보면 달아져, 인마.”

콘라드가 이어서 쭉 들이켜라는 손짓을 취했다. 이리아는 마지못해 또 한 모금을 마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입술을 떼어 버렸다.

이렇게 쓴 음료를 왜 만들어 냈는지, 제조자의 심리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아, 씨시. 나도 커피 잘 못 마셔.”

함께 있던 요한이 웃으며 컵을 가져갔다. 그는 콘라드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이리아의 컵에 설탕을 듬뿍 타 주었다.

이리아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커피를 다시 홀짝이기 시작했다. 설탕이 들어가니 그제야 마실 만했다.

날은 다른 때보다 더 쌀쌀했다. 콘라드와 요한이 밤늦게까지 보초를 서야 하는 이리아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꼼수를 알려 주는 사이, 한 군인이 다가와 종이를 건네주었다.

“부단장님,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이게 뭔데?”

콘라드는 종이를 살피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이야-여기까지 루퀼렘 수배지가 날아들었어? 그쪽 동네에서 어지간히 높은 사람인가 봐?”

“그러게나 말이에요. 보통 여기까지 수배지가 오지는 않는데 말이죠.”

“루퀼렘이 오랜만에 똥줄 좀 타겠구만.”

어이구, 고소해라. 콘라드가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그는 요한과 함께 수배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수배범은 흰 머리에 노란색 눈이래. 근데 보통 루퀼렘 사람이면 다 흰 머리에 노란 눈이지 않냐? 단서가 너무 부족한데?”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을 수도 있대요. 여기에 쓰여 있는 바로는 루퀼렘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상당히 유능한 마법사라고 하네요.”

“야,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으면 어떻게 찾냐? 비센티움 사람인 척하고 우리 사이에 들어왔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루퀼렘 사람인 티가 나겠죠. 억양이 이상하다든가, 루퀼렘 특유의 오만한 말투가 있다거나…….”

수배지를 피해서 군대로 도망쳤는데, 군대까지 수배지가 날아 들어왔다.

두 군인의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이리아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있는 힘껏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며 손안에 든 커피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콘라드의 입에서 ‘여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번쩍 고개를 들고 말았다.

“이번에 여왕이 쓰러졌다는 소문도 이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에 도심에 잠깐 다녀왔는데, 술집 주인이 루퀼렘 여왕이 뒷목 잡고 쓰러졌다고 하더라고.”

“지, 진짜예요? 저…… 정말로 여왕이 쓰러졌대요?”

콘라드와 요한이 동시에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콘라드가 턱 밑을 쓸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호오, 우리 장군님이 루퀼렘에 관심이 좀 있으신가 봐?”

“그, 그냥 관심이라기보다는 궁금해서요. 그…… 여왕이 정말로 쓰러졌대요?”

“응, 그렇다던데? 두 눈으로는 직접 안 봐서 확실한 대답은 못 주겠네. 비센티움에는 루퀼렘 지라시가 많은 거, 너도 잘 알잖아.”

“아…….”

이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요한이 비센티움 경찰은 유능하니 곧 도망친 마법사를 잡아낼 거라며 안심시켰지만, 이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리아는 ‘그’ 도망친 마법사였고, 여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으니까.

‘나 때문에 여왕님이 쓰러지신 걸까? 내가 성을 나와 버려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루퀼렘의 여왕은 높디높은 하이힐을 신고 성을 뛰어다닐 정도로 정정했었다. 잔병도 앓지 않았던 여왕이 쓰러진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리아 자신밖에 없었다.

왁자지껄한 저녁 시간, 이리아는 군인과 간호사들이 ‘도망친 루퀼렘 마법사’에 관해서 백 분 토론을 펼칠 때도 오로지 여왕 생각뿐이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의 고민을 거친 이리아는 결국 마법을 써서 여왕의 모습을 살피기로 했다.

“오늘도 수고해요, 씨시.”

“오늘따라 바람이 차네요. 날이 추우니까 담요라도 덮고 있어요.”

“네, 그럴게요.”

간호사들이 각자 한마디씩 하며 이리아를 지나쳐 갔다. 이리아는 지난 보초 근무 때와 같이 나무 밑동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어두워진 지평선 위로 함께 보초를 서는 군인들과 덱스터 하워드가 보였다.

이리아는 달이 하늘 꼭대기에 떴을 즈음, 나무 양동이를 들고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양동이에 물을 듬뿍 퍼 담은 후, 군인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계곡을 올라갔다.

[이 정도 왔으면 안전하겠지……?]

이리아는 주위를 몇 번 둘러보고선 제자리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오랜만에 마법을 쓸 시간이었다.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주문 따위 읊을 필요 없었다. 이리아가 양동이를 들여다보자마자 물속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리아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살굿빛의 피부는 새하얗게 변하고, 곱슬거리던 빨간 머리는 곧은 백발로 바뀌었다. 눈동자의 색은 서서히 연해져 루퀼렘인 특유의 황금빛이 되었다.

달의 여신과도 같은 모습의 이리아 아델리어가 물 표면에 더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을 발동시키려는 순간, 가까운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황급히 양동이의 빛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누가 있었던 걸까? 내 모습을 본 걸까? 내…… 내가 마법을 썼다는 것도 알았겠지?’

이리아는 온갖 걱정을 하며 한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풀숲에서 작은 산토끼가 불쑥 튀어나온 후에야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리아가 콧잔등을 킁킁대는 토끼에게 핀잔하듯 일렀다.

[다른 데서 놀아.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이리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토끼는 금세 폴짝폴짝 뛰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리아는 토끼가 사라진 이후에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녀가 불안한 눈망울로 주변을 또 한 번 둘러보았다. 어두운 밤눈 때문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이리아는 뒤늦게 고개를 숙여 빛나는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잔잔해진 물의 표면 위로, 성기사단장 루 아휜의 모습이 나타났다.

[루…….]

이리아는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루 아휜을 지켜보았다. 그는 기나긴 은발을 찰랑거리며 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루 아휜이 복도 끝의 문을 두드렸다. 문 안쪽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우아하고 느릿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왕은 쓰러지기는 무슨, 놀랍도록 건강한 낯빛이었다!

[뭐야, 거짓말이었잖아!]

이리아가 배시시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루 아휜과 여왕의 모습을 잠시 더 바라보다가, 마법을 거두었다.

계곡을 내려가는 이리아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성공적으로 확인을 마친 이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어느샌가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빨간 머리 ‘씨시 힐데어’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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