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콘라드는 담배를 입에 물고선 이리아가 내민 아밍 소드를 가져갔다. 자기는 힘겹게 끙끙거리면서 들고 왔는데, 그는 한 손으로 가벼이 아밍 소드를 다루는 게 이리아는 조금 짜증스러웠다.
이리아는 단번에 덱스터 하워드의 시선이 화살촉에서부터 그녀로 옮겨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는 덱스터 하워드를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콘라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콘라드는 담배를 제대로 문 후, 바지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물건을 꺼내 입가에 가까이 댔다.
그가 물건의 가장 윗부분을 누르자, ‘찰칵’ 소리가 나며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의 등장에 이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거 뭐예요?”
“뭐가? 담배?”
“아, 아뇨. 부…… 부단장님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뭐예요?”
“……이거?”
콘라드가 살짝 물건을 들어 보이자 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커져 있었던 그녀의 두 눈동자는 콘라드가 물건 끝 버튼을 눌러 불을 만들어 내자 더더욱 커졌다.
콘라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너 라이터 처음 봐?”
“라이터요……?”
라이터가 대체 뭔가. 그런 이름은 책에서도 본 적 없었다.
콘라드는 처음에 이리아가 장난을 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자, 배를 잡고 깔깔 박장대소했다.
“너, 엄청난 깡촌 출신이었구나, 씨시? 라이터를 처음 보다니!”
한참을 웃던 콘라드가 넋이 빠진 이리아의 손에 직접 라이터를 쥐여 주었다. 그가 장난기가 살짝 섞인 엄중한 목소리로 일렀다.
“자, 이건 너 가져. 군대에서는 라이터 하나 정도는 주머니에 항상 들고 다녀야 한단다, 신삥.”
그는 이제 담배를 피워야 하니 후딱 가라며 손짓했다. 이리아는 여전히 반쯤 넋이 빠진 채로 터덜터덜 부대를 가로질렀다. 가슴팍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는 콘라드가 준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이리아는 부대 한가운데 우뚝 서 라이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콘라드가 했던 대로 끝을 누르니, 둥그런 구멍에서 불이 튀어나왔다.
이리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던 요한이 그녀의 멍한 얼굴을 확인하고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씨시? 표정이 왜 그래?”
“아…… 벼, 별일 아냐. 그냥 오늘 늦게 자는 게 싫어서…….”
“힘들면 내가 대신 보초 서 줄까?”
“아냐, 괜찮아.”
이리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한은 이리아의 곁을 잠시 서성거리다가, 갑작스러운 선임의 부름에 펄쩍 뛰었다. 그는 이리아에게 따뜻한 물이 든 물통을 건네준 후, 부대 뒤쪽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얼굴은 귀엽게 생겼건만, 행동은 완벽한 군인이었다.
이리아는 라이터를 치마 주머니 깊은 곳에 쑤셔 넣고선 보초 근무 준비를 했다.
간호사들은 보통 보초를 서지 않지만, 이 부대에서는 특별히 간호사들도 돌아가면서 보초를 선다. 밤늦게까지 약초를 손질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바람을 쐬기 위해 열정적으로 건의한 결과였다.
대부분의 마물은 조사를 나간 군인들이 처치해 버리기 때문에, 마물들이 부대 안쪽까지 침범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리아는 함께 보초를 서고 있는 다른 군인들을 믿고, 나무 밑동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이리아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찰칵, 불을 켰다.
그녀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루퀼렘에서의 지난 삶을 회상했다.
지난 20년 동안 성안에 갇혀 마법석들을 만들었다. 20년 동안 만들었던 수만 개의 마법석들 중 반 이상이 불꽃을 창조해 내는 마법석이었던 것 같다.
마법사들과 무녀들은 이리아가 더는 못 만들겠다고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마법사들이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마법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밀어붙였다. 바깥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이리아는 그들의 말을 굳게 믿었고, 마법석 만들기가 힘겨울 때마다 왕국민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대체 뭔가. 이리아는 마법사였고, 라이터라는 물건은 마법석 없이도 그녀의 손짓 한 번에 혼자서 불을 피워 내고 있었다.
루퀼렘 사람들은 이 물건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만일 알고 있었다면 왜 말을 해 주지 않았지? 왜 날 방 안에 가두고 수만 개의 마법석을 만들게 시킨 거야?
‘아니야, 몰랐을 거야. 만약에 알았으면 루가 신기한 물건을 가져왔다며 내게 보여 주었었겠지.’
하지만 정말로 몰랐을까? 이리아는 루퀼렘 사람들이 라이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의심을 도무지 거둘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일부러 자신을 방 안에 가두고, 마법석 제조를 강요했다는 의심 또한.
모국을 향했던 신뢰와 진심이 와장창 깨져 버렸다. 이리아의 지난 20년 세월이 조그마한 라이터 하나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리아는 아무도 없는 동굴에 틀어박혀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루퀼렘을 낡아빠지고 융통성 없는 나라라고 들먹이던 비센티움 사람들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들을 이해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흘러가는 마음은 바꿀 수가 없었다.
커다란 녹빛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리아는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근무 도중 펑펑 울어 버렸을 것이다.
“근무 제대로 안 서나?”
대체 언제 온 건지, 덱스터 하워드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군단장 제복이나 갑옷을 입었던 평소와 달리 가벼운 포엣 셔츠(*poet shirt: 소매의 끝이 펑퍼짐한 모양의 셔츠)와 리넨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카락도 조금 헝클어져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자다 나온 모양새였다.
덱스터 하워드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푹 꽂아 넣은 채로 이리아가 라이터를 끌 때까지 기다렸다.
이리아는 황급히 라이터를 끄고선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죄, 죄송합니다…….”
어둠 속에서 훌쩍이는 이리아를 가만히 응시하던 덱스터 하워드는 이내 조용히 떠나갔다. 밤눈 어두운 이리아는 그가 진작 떠났다는 사실도 모르고서는, 있는 힘껏 눈물을 참았다.
새벽 3시가 되자마자 이리아의 보초 근무는 끝났다. 그녀는 나무 밑동에서 엉덩이를 떼는 순간부터 참았던 눈물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캄캄한 주변과 시야를 가린 눈물 때문에, 이리아는 자신이 잘못된 막사에 들어섰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리아는 막사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코를 박고 울었다. 정신없이 흐느꼈다. 그녀는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지난 20년의 기억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싶다며 여신에게 기도했다.
이리아가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는 성기사단장 루 아휜의 두 팔에 안겨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루 아휜이 분명했다. 지금껏 루 아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을 이토록 부드럽게 안아 주지 않았으니까.
이리아는 잠결 속에서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있잖아, 루……. 다 부질없었어. 지난 20년이 다…… 다 부질없었단 말이야. 나, 난 대체 뭘 했던 거야? 지난 20년 동안…… 난 뭘 한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리아는 그녀의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혀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루 아휜은 다정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고,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도 정리해 주었다.
그는 한참 이리아의 뺨을 쓰다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이리아는 아침이 될 때까지 다른 꿈을 꾸지 않았다.
이리아의 얼굴은 당연히 부었다. 짓궂은 군인들은 하룻밤 만에 얼굴 크기가 두 배가 된 이리아를 두고 낄낄 웃으며 놀려 댔다. 그 군인들에는 당연히 부단장인 콘라드 메이필드도 포함이었다
“여-신삥 씨시. 어젯밤에 울었냐? 얼굴이 약간 빡친 빨간 고슴도치 같다?”
“알레르기예요.”
“원래 신삥들은 자주 울어. 쪽팔려 할 필요 없단다, 아가.”
“알레르기라니까요!”
이리아는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한 콘라드로부터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콘라드의 옆에 덱스터 하워드가 있었다. 그를 남자로 의식하는 건 아니었지만,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보여 주는 건 괜히 창피했다.
험난한 군대 간호사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침 식사가 필수였다. 한바탕 울자 기분이 나아진 이리아는 꾸벅꾸벅 조는 간호사들 틈에 앉아 식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지난 20년이 무엇이든, 나는 이미 집을 나왔어.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면 돼.’
이리아는 눅눅한 식빵을 우걱우걱 입에 쑤셔 넣으며, 새해 다짐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가 준 라이터는 그녀의 무지함을 처음 일깨워 준 부적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거대한 숲이 붙어 있는 부대에서는 음식이 부족할 일이 절대 없었다. 사람들은 숲에서 사슴이나 토끼를 사냥해 와 삼시 세끼를 거의 고기로 때웠다.
그러나 이리아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다. 사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국교를 믿는 대부분의 루퀼렘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헛된 살생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여신의 규율에 따라 절대 도축을 하지 않았다.
부대에서는 고기보다 채소를 구하기 더 힘들었고, 하루가 다르게 우람해지는 비센티움 제국민들 사이에서 이리아만은 살이 쪽쪽 빠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쪼그마했던 사람이 더 쪼그마해졌다. 이리아가 커다란 빨랫감을 이고선 뒤뚱뒤뚱 걸어 다닐 때마다 군인들은 그녀를 보지 못해 자주 어깨를 치곤 했다.
어깨를 맞을 때마다 속으로 욕을 한 탓에 빠져 가는 살과 달리, 이리아의 쌍욕 실력은 매일같이 늘었다.
“아……!”
“너무 작아서 안 보였어, 씨시. 미안, 미안.”
“목이 제대로 움직이면 아래도 좀 살피고 다녀요!”
이리아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군인들에게 놀림을 받은 탓에 그러잖아도 기분이 별로였는데, 오늘만 네 번째로 어깨를 맞으니 기분이 더더욱 잡쳤다.
이리아는 어깨를 치고 간 군인의 뒷모습을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또 한 번, 다섯 번째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어어……?!”
심지어 이번에는 이리아의 몸 전체가 크게 휘청였다. 양손에 겨우겨우 들고 있던 빨랫감이 떨어지지 않은 게 용했다.
‘……더는 못 참아!’
쌓이고 쌓였던 짜증이 끝끝내 활화산처럼 펑 폭발해 버렸다.
빨랫감 탓에 앞을 볼 수 없었던 이리아는 그녀를 친 군인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 진짜 짜증 나! 목 없어요?! 아래도 좀 살피라니까!”
부대에 온 이후로 그토록 쩌렁쩌렁 소리를 내지른 것은 처음이었다. 군인들은 일제히 소리가 난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참 이상하게도, 소란스러웠던 부대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날 친 놈이 누군지 얼굴이라도 좀 보자! 이리아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빨랫감 옆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덱스터 하워드를 맞닥뜨렸다.
덱스터 하워드는 아침 일찍 조사에 나간 게 아니었던가? 이리아는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덱스터 하워드가 달에 한 번씩 조사를 쉰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모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리아의 등골은 점점 더 싸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용솟음치고 있던 분노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막 세수를 마쳤던 덱스터 하워드가 검은 머리칼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훔쳐 내며 사과했다.
“미안하군. 안 보였어.”
“아…… 아녜요…….”
이리아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덱스터 하워드가 먼저 지나가라는 뜻으로 턱짓할 때까지, 제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쏟아 냈다.
이리아는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욕을 하며 들고 있던 빨랫감들을 냅다 패대기쳤다. 나무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있던 콘라드가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떡 치켜세웠다.
“우리 씨시, 인제 보니 신삥이 아니라 장군이었군!”
이 순간, 이리아는 콘라드 메이필드를 계곡물에 풍덩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있는 힘껏 억눌러야 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