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09)

5화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토벌부대에 처음 나온 간호사로서, 이리아는 배울 지식과 정리할 일들이 산더미만큼 많았다.

이리아를 포함한 다섯 간호사는 요한과 함께 진영 주변의 지형을 익혔다. 부대의 북쪽은 마물의 숲과 산이었고, 남쪽은 암석지대였다. 서쪽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계곡이 흘렀다. 동쪽은 원래 숲이었지만, 현재는 군인들이 불을 질러 없앤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저녁이 되자 각 간호사에게는 조그마한 개인 막사가 배정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잠을 잘 공간이었다.

이리아는 통밀빵과 당근 샐러드로 간단하게 입가심을 한 후, 양동이를 챙겨 계곡으로 향했다. 땀과 흙먼지로 절은 얼굴을 씻어 낼 시간이었다.

계곡에는 먼저 온 손님이 하나 있었다.

“신삥! 빨간 머리 씨시!”

“아,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콘라드 메이필드가 이리아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이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수도원에 왔을 때는 그저 막무가내인 군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콘라드는 덱스터 하워드의 군부대 부단장이었다.

“신삥은 내가 한눈에 알아봤지. 너처럼 찌인한 빨간 머리는 드물다구.”

이리아는 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콘라드에게 팔의 부상은 괜찮냐 물었고, 콘라드는 소매를 걷어 올려 상처 부위를 직접 보여 주었다. 흉터는 남았지만, 다행히 상처는 잘 아문 상태였다.

콘라드가 이리아 대신 나무 양동이에 신선한 계곡물을 퍼다 주며 물었다.

“그래서, 토벌부대에 처음 온 소감이 어때?”

“아직은 첫날이라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앞으로 일이 꽤 많겠구나 싶은 정도……?”

“첫날은 원래 다 그렇지. 내가 소감을 너무 빨리 물어봤군.”

“이…… 일주일 후에 다시 물어보세요. 그때는 더 길게 들려드릴게요.”

신입 간호사의 재치 있는 대답에 콘라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났을 때처럼 조그마한 초콜릿을 이리아의 주머니에 넣어 준 후, 새빨간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계곡에 홀로 남은 이리아는 콘라드가 만지고 간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더듬었다. 루퀼렘에서는 남자가 여인의 머리를 만지는 건 엄청난 무례인데, 비센티움에서는 아닌가 보았다.

이리아는 얼음장처럼 차디찬 계곡물로 드러낼 수 있는 신체 부위를 최대한 꼼꼼히 닦은 후, 막사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머릿속에 제대로 보지 못한 덱스터 하워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리아는 또 한 번 그의 눈에 절대로 띄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

첫날은 맛보기였다. 부대는 두 번째 날부터 진정한 지옥의 직장이 되었다.

줄리에타의 고함 덕분에 오전 6시에 기상한 간호사들은 눈곱을 떼기도 전에 의약품부터 정돈해야 했다. 이리아는 주사기를 손보면서도 꾸벅꾸벅 조는 대담함을 보였다. 잠결에 바늘로 손을 찌르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비센티움 동쪽의 아침은 쌀쌀했다. 이리아는 틸다의 목을 축여 주기 위해 함께 아침 바람을 뚫고 계곡으로 향했다. 틸다는 차가운 아침의 계곡물도 곧잘 마셨다.

이리아가 틸다의 하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목덜미에는 비센티움의 뒷골목에서 생겼던 상처가 길게 남아 있었다.

이리아가 루퀼렘어로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예쁜 목에 흉터가 생겨 버렸어, 틸다…….]

루퀼렘의 성이었다면 이런 흉터는 평생 생기지 않았을 텐데.

이리아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틸다의 긴 갈기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푸르릉. 이리아의 뒤편에서 다른 말의 콧김 소리가 들려왔다. 낙엽을 밟는 단조로운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섰다.

이리아는 간단한 아침 인사를 건네기 위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두꺼운 강철 흉갑이었다. 어리둥절한 이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맞닥뜨렸다.

덱스터 하워드의 새까만 눈동자와.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벌름거리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빨리 계곡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틸다가 아직도 물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최대한 고개를 낮게 수그리고선 그를 힐끔거렸다.

가까이서 마주한 덱스터 하워드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무시무시했다. 이리아가 조그마한 조랑말 틸다라면, 덱스터 하워드는 그의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우람한 흑마였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도 덱스터 하워드의 머리끝에는 절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덱스터 하워드에게서 옅은 박하 향기가 풍겨왔다. 이리아는 제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새빨간 머리카락을 풀어 헤쳤다.

덱스터 하워드의 박하 향이 사라지고, 향긋한 머릿비누 냄새가 그 자리를 메꿨다.

이리아가 틸다의 목덜미를 흔들며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 마셨으면 빨리 가자, 틸다.”

틸다가 고개를 들자마자 이리아는 얼른 고삐를 쥐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너무 급해서 덱스터 하워드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덱스터 하워드는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남자였다. 키가 어찌나 큰지, 군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검은 머리는 언제나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의 머리칼이 보일 때마다 겁먹은 아기 토끼처럼 간호사들 틈에 숨었다.

다행히 덱스터 하워드는 이리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군대의 군단장인 만큼, 아침 일찍 부대를 나서 해가 완벽하게 떨어진 후에 돌아왔다.

군대의 간호사 생활은 힘들었지만, 덱스터 하워드가 없으니 할 만했다.

이리아는 여느 때와 같이 자리에 쭈그려 앉아 피 묻은 수건을 빨고 있었다. 부대에서는 모닥불에 끓이지 않는 이상 따뜻한 물을 구할 수 없었기에, 간호사들은 언제나 차가운 계곡물로 빨래를 했다.

이리아는 마법을 쓰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투정 부리면서도 꿋꿋이 빨래를 해냈다.

그녀가 마지막 수건을 물에 던져 넣었을 때, 줄리에타의 목소리가 부대를 가르고 쩌렁쩌렁 울렸다.

“씨시! 어깨 부상자야!”

“지금 가요!”

조사를 나갔던 군인들이 돌아왔나 보다. 이리아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막사로 향했다. 이리아는 막사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군지 꿈에도 모르고선,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디뎠다.

훗날 생각해 보면,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덱스터 하워드와 질긴 악연의 시작이.

‘……아…….’

이리아는 간이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덱스터 하워드를 보고 말을 잃어버렸다. 그의 흉갑은 반으로 쪼개진 상태로 발밑에 나뒹굴었고, 받쳐 입었던 튜닉 셔츠는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의 어깨에서 철철 흐르는 핏물을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피가 온 상체를 적실 정도로 흐르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덱스터 하워드는 이리아가 맨 어깨에 손을 올릴 때까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이리아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상처 부위를 닦아 냈다. 핏물이 사라지고 드러난 근육질의 상체에는 작고 큰 흉터가 가득했다. 이리아는 형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구 뒤섞여 있는 흉터들을 보고 꼴깍 침을 삼켰다.

“이…… 이, 이제 꿰맬게요.”

이리아는 이 순간,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걸 죽도록 후회했다. 덱스터 하워드의 시선이 그녀의 옆얼굴에 단단히 못 박혀 있었기에.

머리를 풀었다면 머리카락으로라도 얼굴을 가릴 수 있었을 텐데. 이리아는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실을 꿰어 넣었다.

지금껏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을 정도로 이리아의 의술 실력은 뛰어났지만, 긴장 때문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억지로 움직여 상처 끝에 바늘을 쑤셔 넣었다.

그녀가 상처를 반 정도 꿰맸을 때 즈음, 놀랍도록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수전증이 있나?”

“네?!”

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야 가득히 덱스터 하워드의 얼굴이 들어왔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서, 이리아는 처음으로 덱스터 하워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았다.

덱스터 하워드는 두꺼운 붓으로 거침없이 그려 낸 미남 같았다. 이목구비는 진하고 뚜렷했으며, 비센티움 제국민답게 눈그늘이 짙었다. 날렵한 턱선 위에는 턱 근육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어 거친 남성미를 풍겼다.

이리아는 예상외로 잘생긴 덱스터 하워드의 모습에 단단히 굳어 버렸다. 손끝의 힘이 풀려 바늘을 놓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넋이 나간 이리아의 얼굴을 마찬가지로 빤히 응시하다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썹이 움직이자마자 집 나갔던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이리아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무척이나 뒤늦게 대답했다.

“아, 아뇨. 없어요…….”

이리아가 떨리는 눈꺼풀을 끔뻑이며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는 여전히 후들거리는 손끝으로 치료를 계속해 나갔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데, 상처를 크게 내 와서 붕대를 세 번이나 감게 만든 덱스터 하워드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덱스터 하워드는 붕대로 둘러싸인 어깨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한껏 긴장한 이리아에게 질문했다.

“이름이 뭐지?”

“씨…… 씨시. 씨시 힐데어예요.”

“씨시…….”

덱스터 하워드는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쪼그마한 이리아를 무덤덤하게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한껏 움츠린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와 시선조차도 맞추지 못했다.

그가 이리아를 스쳐 지나가며 나직이 읊었다.

“기억해 두지, 씨시 힐데어.”

이리아는 덱스터가 나가자마자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쿵쿵. 심장이 뒤늦게 벌렁거렸다. 덱스터 하워드를 제대로 치료한 게 가히 기적이었다.

다른 간호사들은 ‘그’ 하워드 공을 상대했으니 떨렸을 만하다며 주저앉은 이리아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이리아에겐 그들의 위로조차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뜨거운 용암에 풍덩 담가진 기분이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분명 날 기억해 두겠다고 했어. 혹시 내가 루퀼렘 사람이라는 걸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덱스터 하워드의 마지막 문장이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다. 이리아는 그 짧은 문장의 의미를 아주 긴 시간 의미를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해석하려 애썼다.

하지만 들인 시간이 무색하게, 의미는 끝내 파악할 수 없었다.

이리아는 이날, 저녁을 걸렀다. 속이 울렁거려서 음식이 들어가면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부대를 돌아다닐 때도 덱스터 하워드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부대는 좁았고, 덱스터 하워드를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거기, 빨간 머리!”

이름 모를 한 군인이 총총 걸어가는 이리아를 불러 세웠다. 이리아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순순히 그에게로 갔다.

군대의 간호사가 힘든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군인들의 심부름이었다. 직접 하면 될 것이지, 군인들은 꼭 바쁜 간호사들을 불러 세워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된 만큼 복잡한 심부름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것 좀 부단장님께 전해 드려.”

군인이 이리아의 키만 한 아밍 소드(*arming sword: 군인들이 주로 쓰는 검, 한 손으로 잡는 장검 형태)를 던지듯 안겨 주었다. 강철로 제련된 아밍 소드는 터무니없이 무거웠기에, 그녀는 힘겹게 뒤뚱거리며 콘라드 메이필드에게로 가야 했다.

이리아는 모닥불 주변에서 담배를 말고 있는 콘라드를 보자마자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옆에 덱스터 하워드가 있었다.

‘어차피 검만 건네주고 오면 되는 거다. 겁먹을 필요 없어, 이리아 아델리어.’

이리아는 애써 어깨를 펴고 콘라드에게로 다가갔다.

다행히, 덱스터 하워드는 통나무에 걸터앉아 단도로 화살촉을 갈아 내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화살촉에만 머물러 있었다.

“어? 신삥 씨시!”

……콘라드가 그녀를 부르자마자 고개를 들기는 했지만.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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