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리아는 전쟁을 이론으로만 배웠다. 그녀는 전쟁터가 얼마나 위험하고 가슴 아픈 장소인지 몰랐기에,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루퀼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만 느낄 뿐이었다.
다섯 간호사들은 병사들의 보호 아래 조그마한 수레를 타고 부대로 향했다. 수레를 끄는 말들 사이에는 조랑말 틸다도 있었다.
부대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말을 빠르게 몬다고 하여도 도착하는 시간은 무조건 다음 날 아침이었기에, 간호사들은 몸을 웅크리고선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덜컹거리는 수레 때문에 여러 번 잠에서 깼던 그들은 퀭한 눈 밑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칙칙한 밀색 머리칼을 가진 간호사가 가져온 화살집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화살을 조금 더 챙겨 올 걸 그랬나? 부대에 도착하면 화살을 만들 시간도 없을 텐데, 금방 다 써 버릴 것 같아.”
“우리가 가는 부대는 소규모 토벌부대라 안전할 거야. 마물과 기동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잖아. 그놈들이 진영까지 올 일은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진영에 직접 가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얘, 뭐가 걱정이니? 우리한테는 덱스터 하워드 공이 있는데!”
밀색 머리칼을 가진 간호사 옆에 앉은 이가 깔깔 웃었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 공’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루퀼렘 성에서 정치학을 배울 때 들어 본 이름인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주…… 줄리에타. 덱스터 하워드 공이 누구예요?”
“비센티움의 대공작이에요. 황태자 전하의 이종사촌이시죠. 지금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군단장으로서 마물을 처치하고 있어요.”
간호사들이 어떻게 덱스터 하워드도 모르냐면서 이리아에게 장난스러운 야유를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게, 비센티움은 귀족들이 다스리고 먹여 살리는 엄격한 봉건제 사회였다. 아무리 귀족 사회와 거리가 먼 평민이라도, 대부분 제국의 공작 가문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수레에 앉은 네 간호사들은 모두 덱스터 하워드의 열정적인 추종자였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덱스터 하워드로 넘어갔다.
“하워드 공이라면 도망간 마법사도 금방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루퀼렘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아신다던데.”
“그건 소문이지. 설마 냄새만으로 루퀼렘인을 맞추시겠어?”
“마법을 지독하게 싫어해서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고 하셨잖아! 굳이 냄새를 통해서가 아니라도 루퀼렘 사람은 보자마자 알아차리시겠지!”
“불쌍한 것. 비센티움 제국으로 들어오면 그 마법사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쯔쯔, 그러니 왜 루퀼렘을 벗어나서. 한 간호사가 덧붙였다.
이리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지금 수레를 타고 ‘마법을 지독하게 싫어해서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덱스터 하워드의 부대로 향하고 있었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불나방 꼴이었다!
‘안 돼!’
이리아가 철렁 가라앉은 가슴팍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옆에 앉은 줄리에타는 이리아의 심상찮은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씨시, 왜 그래요?”
“아…… 그, 그냥 긴장이 좀 돼서요…….”
“그럴 수 있죠. 씨시는 아직 진영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간호사잖아요. 너무 긴장하지는 말아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으니까.”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기는 개뿔, 생각보다 더 위험했다.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이리아의 마법은 완벽했다. 빨간 머리카락과 살굿빛 피부, 녹색 눈동자를 가진 간호사 ‘씨시 힐데어’는 완벽한 비센티움인이었다.
이리아는 간호사의 말대로 부디 덱스터 하워드가 ‘냄새’로 루퀼렘인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없기를 기도했다. 겉모습은 완벽한 비센티움 사람이니, 덱스터 하워드가 그 능력만 없다면 충분히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
이리아는 군부대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생전 처음 보는 막사와 거대한 말들이 일렬로 놓여 있음에도, 그녀는 오로지 덱스터 하워드에게만 신경이 가 있었다.
이리아가 식은땀 가득 맺힌 손으로 줄리에타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물었다.
“그…… 하, 하워드 공은 안 계시는 건가요?”
“가까운 곳에서 마물의 흔적을 발견해서 조사하러 가셨다네요. 곧 돌아오시겠죠.”
영원히 돌아오지 말아라. 그냥 마물한테 콱 물려 죽어 버려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덱스터 하워드는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는 만큼 엄청난 전투의 귀재였다. 진영에 있는 군인과 간호사 모두가 그의 복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아는 진영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간호사들과 함께 의약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쟁터의 막사는 수도원과 달랐다.
바닥에 나뒹구는 붕대들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고, 바늘과 칼들은 간호사의 손자국들로 엉망이었다. 다치는 군인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망가진 의약품들이 손수 보여 주고 있었다.
덱스터 하워드에 대해 잠시 잊을 만큼, 이리아는 간호사들과 함께 피가 말라붙은 칼들을 정신없이 닦아 냈다.
태양과 더위가 익숙지 않은 그녀에게 막사 안은 찜통이었다. 얼마나 일했다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이리아는 새빨개진 수건을 나무 양동이에 던져두고선 침상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그런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물컵을 내려놓았다. 고운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군인이었다.
“혹시 네가 씨시 힐데어……?”
“씨시 맞아요. 무슨 일이세요?”
“아! 난 요한 엘로이스야!”
엘로이스? 어디선가 들어 본 성씨였다.
이리아는 요한의 밤색 머리카락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짝 손뼉을 쳤다.
요한과 이리아가 동시에 서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줄리에타!”
줄리에타 엘로이스. 요한 엘로이스. 요한은 군에 복무하고 있다는 줄리에타의 남동생이었다!
이리아가 있는 동쪽의 토벌부대는 덱스터 하워드가 직접 선택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부대로, 군인들의 평균 나이대가 높았다. 그렇기에 올해 스물인 요한은 부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군인이었다. 그는 그와 동갑인 간호사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아주 기쁜 듯했다.
이리아는 루퀼렘에 있을 때 루 아휜 외의 남자와는 대화를 해 본 적 없었다. 여성인 대마법사는 개인적으로 남자를 만나서도 안 되며, 대화를 나누어서도 안 된다. 루퀼렘의 엄격한 규율이었다.
이리아는 드디어 그녀가 남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날 듯이 기뻤다. 그녀는 먼저 말을 걸어 준 요한 엘로이스가 마음에 쏙 들었다.
요한은 이리아와 함께 조그마한 통나무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약초를 손질했다.
처음 약초를 만져 본 요한은 손질에 영 젬병이었다.
“잘 안 되는데? 이게 보기보다 은근히 어렵네…….”
“손톱으로 껍질 끝을 잡아서 벗겨내면 쉬워. 뱀 비늘처럼 한 번에 나와.”
“뱀 비늘? 식물 껍질을 뱀 비늘과 비유하는 사람은 처음 봐.”
요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리아는 순수한 말괄량이 아가씨답게, 요한을 웃게 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약초 손질을 이어 나갔다.
열심히 씻었음에도, 부대 뒤쪽 계곡 주변에서 채취한 약초에는 벌레가 많이 끼어 있었다. 이리아는 푸른 줄기 위를 뽈뽈 기어가는 벌레를 보고선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흰개…… 흰개미. 흰개미다!”
“겨우 개미 한 마리를 왜 그렇게 신기해하는 거야? 하얀 개미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니고!”
요한은 웃으며 고개를 휘저었지만, 이리아는 흰개미를 ‘처음’ 보는 게 맞았다.
그림으로만 봤던 흰개미를 실제로 보니 너무 신기했다. 모든 개미는 까만색인 줄만 알았는데, 하얀 개미가 존재하긴 했구나!
이리아는 흰개미에 정신이 팔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점점 엄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군인과 간호사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줄리에타가 바보같이 입을 헤벌리고 있는 이리아의 어깨를 다급하게 두드렸다.
“씨시, 씨시! 일어나요!”
이리아는 그제야 변한 부대의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리아는 다른 군인들을 따라 엉성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대 북쪽의 왕성한 나무들 사이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군인들은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가슴에 손을 올리고선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리아는 엄숙해지지는 못할망정, 활짝 웃었다.
수도원에서 이리아에게 초콜릿을 주었던 군인.
인영의 남자는 콘라드 메이필드였다.
콘라드는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부대로 오지 않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아는 뒤늦게 숲에서 나오는 인영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다른 누군가가 커다란 흑마의 고삐를 쥐고선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리아는 그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덱스터 하워드.’
이리아의 미소가 순식간에 스러졌다.
군단장 덱스터 하워드는 이리아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서 가장 거대했고, 가장 새까만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멀리 있어 이목구비는 제대로 살필 수 없었지만, 상당히 거칠면서도 무시무시한 외모인 듯했다.
이리아는 요한의 등 뒤에 숨어 덱스터 하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콘라드에게 말 고삐를 넘기고선 건틀렛(*guntlet: 다섯 손가락을 덮는 장갑, 갑옷의 일부)과 뱀브레이스(*vambrace: 갑옷의 팔 부분, 보통 손목부터 팔꿈치까지를 덮는다)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흉터 가득한 팔뚝과 손이 드러나자,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등허리를 떨었다.
“알폰소의 간호사들이 오전에 도착했습니다, 단장님.”
“그렇군. 총 몇 명이 온다고 했었지?”
“다섯입니다.”
“다섯…….”
덱스터 하워드가 말끝을 흐리며 부대를 돌아보았다. 그의 고개가 돌아갈수록, 이리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었다.
마법을 혐오하여 세상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남자.
루퀼렘 사람은 냄새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남자.
이리아는 저도 모르게 요한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덱스터 하워드가 부디 자신을 보지 않고 지나갔기를 바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정확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두 새까만 눈동자와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쿵. 순간, 심장이 땅끝까지 떨어진 이리아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재빨리 고개를 다시 수그렸다.
이리아는 빨간 머리칼 사이로 덱스터 하워드를 힐끔거렸다.
그녀가 루퀼렘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덱스터 하워드는 아주 긴 시간 이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쿵쿵. 거대한 심장 박동이 이리아의 두 귀를 먹먹하게 채웠다. ‘냄새’만 맡아도 루퀼렘 사람을 알아본다는 간호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무한히 메아리쳤다. 이리아는 혹여 그녀의 숨 냄새라도 퍼질까, 호흡을 참기까지 했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는 이리아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할 즈음에야 시선을 돌렸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의 고개가 돌아간 후에도 주저앉지 않기 위해 요한의 옷자락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새로 온 간호사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선, 군 간부들과 회의를 하러 들어갔다.
이리아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어디 아파? 너 얼굴이 엄청 빨개, 씨시.”
“그……그냥 더, 더워서 그래.”
다행이야. 안 들켰나 봐.
이리아가 관자놀이의 식은땀을 훔쳐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랫배가 찌르르 아파졌다.
이리아는 그녀가 덱스터 하워드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이 하늘의 기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진영에 머무는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절대 그의 눈에 띄지 않고, 주위로 가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