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우산 없는 두 여자는 쏟아지는 소낙비를 흠뻑 맞으며 도시의 대로를 지나, 작고 구불구불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오솔길의 끝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국교가 있는 루퀼렘에서는 모든 국민이 여신을 섬기고 신앙심을 가졌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비센티움에서는 소수의 몇 명만이 신앙심을 가졌다. 이 때문에 비센티움의 수도원은 대부분 규모가 작았다.
이리아는 줄리에타를 따라 생전 처음 보는, 도토리만 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이렇게 작은 수도원이 과연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신탁과 예배당이 있는 걸 보면 크기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예배당 입구에서 빨랫감을 이고 있던 수녀 한 명이 흠뻑 젖은 줄리에타를 보자마자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줄리에타! 왜 이렇게 늦었어? 원장님께서 너를 얼마나 찾으셨는데! 옷은 이게 뭐야?!”
“미안. 잠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었어. 원장님께서는 어디에 계셔?”
“조금 전에 주무시러 들어가셨어. 자기는 자러 들어가면서, 우리한테는 내일 아침까지 약초를 전부 달여 놓으시라더라. 눈도 붙이지 말라는 뜻이지.”
수녀가 줄리에타의 귀에 대고 수도원장의 뒷담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가려져 있던 이리아와 시선이 딱 마주쳤고, 수녀는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줄리에타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이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이방인이셔.”
밖에서 갈기를 털던 틸다가 들어와 이리아의 옆에 붙었다.
줄리에타는 수녀에게 틸다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 부탁한 후, 이리아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이리아의 앞에 밀죽 한 그릇과 반듯하게 잘린 사과가 놓였다. 줄리에타가 이리아에게 나무 수저를 내밀었다.
“미안해요. 수도원이라 고기는 없어요.”
“괘, 괜찮아요. 저 채소랑 과일 좋아해요.”
이리아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소식이었다. 그녀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으니까.
배고팠던 이리아는 밀죽과 사과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녀가 나무 숟가락을 내려놓기 무섭게, 줄곧 앞에 앉아 있던 줄리에타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그…… 내일 아침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씨시? 씨시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지, 집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돌아가면 또다시 저를 가두고 일만 시킬 거라고요.”
“그럼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에요.”
아. 줄리에타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이리아가 드높은 귀족 가문의 하녀라고 오해하고 말았다.
식기를 깨끗하게 정리한 이리아는 밤거리에서 구해 준 보답 겸, 밥값이라도 하기 위해 줄리에타의 약초 달이는 일을 도와주었다. 약초의 껍질을 벗긴 후 진흙과 뭉쳐 동그랗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두 여자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약초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없는 용기를 긁어모은 이리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그냥 저도 여기서 지내면 안 돼요? 저 기도 잘해요! 며, 몇 시간 동안 앉아서 기도만 한 적도 있어요! 제일 잘하는 게 기도예요!”
“미안하지만 안 돼요, 씨시.”
“그, 그럼 청소랑 빨래를 할게요! 그, 그건 잘 못 하지만 배우면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청소랑 빨래를 할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줄리에타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조그마한 진흙 항아리에 손질한 약초들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이방인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그리 좋지 않네요, 씨시.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곳은 수도원의 탈을 쓴 군대 병동이지, 진짜 수도원이 아니에요. 진짜 수도원에서는 간호사가 밤새 약초를 달이지 않는다고요.”
“어…….”
“이곳은 간호사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어요.”
열심히 움직이던 이리아의 작은 어깨가 순간 멈칫했다.
이리아는 줄리에타의 앞에 그녀가 손질한 약초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럼 약학을 배운 사람은요……?”
이리아의 손바닥 위 약초는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줄리에타는 이리아가 내민 약초를 본 후에야 자신이 손질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손질하고 있는 약초는 피가 많이 날 때 지혈하기 위한 응급처치용 나무줄기로, 껍질과 잎을 분리하는 데 나름의 손기술이 필요했다. 방법을 모르면 손질하기 힘든 약초였다.
대마법사는 마땅한 소양을 길러야 한다는 여왕의 언질에 따라, 이리아는 어렸을 적부터 각종 학문을 공부했었다. 그녀는 문학, 약학, 의학, 인문학 등 배우지 않은 학문이 없었다.
“여기에 한 번 들어오면 전쟁이 끝나거나 부친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쉽게 나갈 수 없어요, 씨시. 병원의 간호사와 군대의 간호사는 완전히 달라요.”
“상관없어요! 저, 저는 지낼 곳만 있으면 돼요!”
갈 곳 없는 이리아에게는 당장 먹고살 문제가 중요했다. 그녀는 줄리에타와 시선을 맞추며 열정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줄리에타는 영지에서 도망친 일꾼을 수도원에 두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이리아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차마 거부하진 못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뜨면 수도원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이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직 수도원에서 지내도 된다는 확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허벅지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잘했어, 이리아 아델리어. 거봐, 혼자서도 할 수 있잖아.
피곤했던 이리아는 해가 뜨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줄리에타는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선, 약속대로 수도원장을 찾았다.
수도원장은 이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다. 그는 제 역할을 잃어버린 수도원에 큰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이리아의 이름조차도 물어보지 않고선 허락부터 내렸다.
이리아는 줄리에타에게 수도원장의 허락을 전해 듣자마자 방방 뛰었다. 무녀들과 루 아휜의 도움 없이, 제일 큰 문제였던 의식주를 혼자서 해결한 셈이었다.
줄리에타는 불분명한 출신과 신분을 가진 이리아를 처음에는 꺼렸지만, 그녀의 뛰어난 의술 실력을 보자마자 온전히 수도원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비센티움 군대에는 간호사의 수가 현저히 부족했다. 그들에게는 뛰어난 간호사 한 명이 귀했다.
비센티움 군대는 최근 동쪽의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마물들을 토벌하는 중이었다. 이리아는 마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간호사 일을 하며 처음 알았다. 산과 결계로 뒤덮인 루퀼렘 왕국에서는 단 한 번도 마물이 나타난 적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아는 간호사의 일상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대마법사로서 행했던 빡빡한 일정에 비하면, 간호사의 일정은 식은 죽 먹기보다 간단했다.
줄리에타는 수도원을 군대의 병동이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이곳은 군대의 병동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수도원은 제국 경계선 각 부대에 의약품을 보내고, 적절한 간호사들을 배치하는 ‘중앙탑’의 역할을 했다.
물론, 가끔 상처를 입은 군인들이 실려 올 때도 있기는 했다.
“줄리에타! 이쪽!”
“예! 가고 있어요!”
이리아가 재빨리 알코올에 적신 수건을 줄리에타에게 내밀었다. 줄리에타는 찢어진 병사의 팔을 닦은 후, 능숙한 솜씨로 꿰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줄리에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까지 전부 비센티움의 군대에서 근무 중이었다. 줄리에타는 간호병인 어머니에게서 기술을 배워 자연스럽게 간호사가 되었다.
마무리는 이리아의 일이었다. 그녀가 단정하게 꿰매진 상처 위로 붕대를 둘렀다.
“못 보던 빨간 머리인데. 새로 들어온 건가?”
“네?!”
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 군인 또한 놀라 눈을 크게 치켜떴지만, 이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괜히 머쓱해진 이리아가 콧잔등을 비비며 말했다.
“씨, 씨시 힐데어예요.”
“상당히 특이한 이름이네. 씨시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봐.”
“제…… 제 이름이 조금 특이하긴 하죠.”
“나는 콘라드 메이필드야. 덱스터 하워드…… 아니, 단장님 술 심부름을 가고 있었는데 이런 꼴을 당했지 뭐냐?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따로 없지.”
남자가 고개를 흔들며 과장된 한숨을 내쉬자 이리아는 작게 웃었다.
상처 부위가 상당히 컸기에, 그녀는 이제 두 번째 붕대를 감고 있었다.
“마…… 마물은 어떻게 생겼어요? 소문대로 커요?”
“겨울잠을 자는 곰보다도 더 크단다, 신삥 간호사. 보면 충격받아서 뒤로 벌렁 자빠질지도 몰라.”
“겨, 겨우 마물 한 번 봤다고 충격받아 쓰러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요…….”
“그럴 리가. 비실비실한 게, 딱 봐도 약해 보이는구만. 운동 좀 해야 하겠어, 씨시 양.”
“음, 네…….”
붕대 감기가 끝났다. 콘라드 메이필드는 ‘몰래 먹어’란 말과 함께 이리아의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 주었다.
줄리에타는 콘라드에게 팔의 상처가 벌어질 수 있으니 하루 쉬고 떠나라 일렀지만, 그는 붕대를 감자마자 말을 타고 쌩 가버렸다.
이리아는 떠나가는 콘라드 메이필드를 보며 저런 막무가내인 군인도 있구나, 생각했다.
변두리에 박혀 있는 수도원에는 신문이 늦게 배달되었다. 간호사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도착한 신문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한 간호사가 신문 앞면의 기사를 가리켰다.
“이거 봐. 루퀼렘의 마법사 한 명이 성에서 도주했다는데? 비센티움에 기사를 낼 정도면 상당히 고위층인 마법사겠지?”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설마 이곳으로 도망 왔겠어? 만일 내가 루퀼렘 사람이었다면, 여기로는 손에 장을 지져도 안 온다.”
“나도 동감.”
간호사들이 옹기종기 모인 물고기 떼처럼 일제히 다른 기사로 시선을 돌렸다.
루퀼렘의 속보는 비센티움의 간호사들에게 큰 이야깃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 사이에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간호사들과 달리, 이리아는 신문 기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간호사들이 어느 백작의 스캔들로 수다를 떠는 와중, 기사 내용을 전부 읽었다.
성기사단 단장, 루 아휜은 아직 이리아가 비센티움으로 도주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곧 전 대륙에 ‘하얀 조랑말을 가진 마법사’ 수배지를 뿌릴 것이라 예고했다.
루퀼렘이 수배지를 뿌린다면 도시 변두리의 수도원도 위험했다. 의식주를 해결할 장소를 다시 잃는 건 속상했지만, 조만간 수도원을 떠나야 한다.
이리아가 무례한 군인들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어엿한 간호사 분위기를 내기 시작했을 즈음, 수도원에 공문이 날아들었다.
공문은 이랬다.
<동쪽의 마물 토벌부대로 간호사 다섯을 추가로 보내시오.>
줄리에타는 동쪽의 토벌부대에 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흔쾌히 지원했다. 하지만 다른 간호사들은 전쟁터로 나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줄리에타의 기나긴 설득 끝에 3명의 간호사가 지원하고, 끝끝내 한 명의 자리가 남았다.
이리아는 잘린 나무 밑동에 걸터앉아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도 갈래요!”
“……씨시?”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다 바치고 싶어요!”
이리아는 그토록 큰 박수갈채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봤다.
그렇게,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루퀼렘의 수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하는 수레에 스스로를 올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