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1.
[스무 살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축하드립니다, 아델리어 님.]
대마법사를 모시는 성기사단의 단장, 루 아휜이 축하의 말을 건네자 주변의 모두가 그를 따라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두 무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기사단 사이를 걸어갔다. 이리아가 태어난 날은 7월 중반의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그녀의 생일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1월 1일.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그날이 바로 ‘만들어진’ 이리아의 생일이었다.
모두가 진짜라고 믿지만, 사실은 가짜인 생일을 맞이한 이리아의 머리 위에는 화관이 씌어 있었다. 가녀린 목과 어깨, 주먹만 한 얼굴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화관이었다.
생일도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생일은 맞은 이리아의 일과 또한 법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오전 6시가 되자마자 침상에서 일어나 성스러운 우물 ‘룬타’에서 몸을 씻는다. 그 후, 여왕과 함께 식사를 하며 덕담을 나누고, 식사를 마치면 탑의 마법사들이 모인 광장에 가서 마법의 왕국 ‘루퀼렘’을 위하여 기도를 한다.
정오가 되기 전에 여신을 위한 축배를 들기 시작하여 오후 6시가 될 때까지 하얀 조랑말 ‘틸다’를 타고 거리에 꽃잎을 흩뿌린다. 오후 6시가 되면 성으로 돌아와 오로지 과일로만 이루어진 식사를 한다. 6시에는 새해를 맞이한다는 기념 글을 써 여왕과 선생들에게 첨삭을 받은 후에 각 집에 배달한다.
우물 룬타에서 또 한 번 몸을 씻은 후, 10시가 되기 전에 침상에 든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일정이었다. 대마법사로 태어난 이리아는 그녀의 만들어진 생일도, 정해진 일정도, 온종일 머리에 쓰고 다니는 거대한 화관과 어딜 가든 따라다니는 기사단까지도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이번 스무 번째 생일은 지난 열아홉 번의 생일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그’ 날이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출일.
7년을 넘게 꾸며 왔던 계획을 드디어 실행하는 날!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이리아는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두 무녀는 그녀를 침실까지 모신 후,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이리아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화관을 냅다 집어 던졌다. 그리고, 침대 아래 숨겨 두었던 대륙 지도와 옷, 마법석들을 꺼냈다.
쓸데없이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대마법사의 옷을 벗어 던진 이리아는 평범해 보이는 하급 성기사의 차림을 한 후, 주머니에 최대한 많은 마법석들을 쑤셔 넣었다. 대마법사가 만들어 낸 최고급 마법석들이었다. 상점에 팔면 돈깨나 될 테지.
이리아는 지도를 펼치고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는 남쪽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비센티움 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국경선을 맞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아의 모국인 마법의 왕국 ‘루퀼렘’과 전사의 제국 ‘비센티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루퀼렘 왕국민들은 비센티움의 전투적 성향과 과격한 국민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검과 총을 주로 사용하는 비센티움 제국민들은 루퀼렘 왕국민들의 평화지향성과 여신을 받드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했다.
루퀼렘 왕국민들은 비센티움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불렀고, 비센티움 제국민들은 루퀼렘 사람들을 ‘여신 따까리’라고 불렀다. 물론, 둘 다 비꼬는 단어이다.
루퀼렘 왕국민은 비센티움 제국에서 절대 환영받지 못한다. 설령 이리아가 비센티움 제국으로 도망친다 해도, 그녀는 금방 국경선에서 거부당할 터였다.
하지만 이리아는 다 생각이 있었다.
이리아가 공작새의 피와 장미꽃을 섞어 만든 잉크로 발등 위에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외형을 바꾸는 마법진은 루퀼렘 왕국민의 특징인 새하얀 피부와 머리카락, 황금빛 눈동자를 없애주었다.
“좋아.”
이리아는 거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피부는 생기 돋는 살구색으로, 새하얗고 곧았던 머리카락은 강렬한 붉은빛의 곱슬머리로 변했다. 황금빛의 눈 또한 마법의 힘을 받아 진한 녹빛이 되었다.
이리아는 자신의 모습을 앞뒤로 철저히 확인한 후, 방을 나섰다. 그녀는 이제 그 누가 봐도 확실한 비센티움 제국민이었다.
루와 여왕님에게는 잘 살 테니 부디 찾지 말라는 편지까지 남겼다. 20년 동안 감금 생활을 했던 이 성과는 완벽한 안녕을 고할 시간이 왔다.
루퀼렘의 대마법사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신비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성에 갇혀 살아간다. 그리고 이리아는 그런 자신의 삶을 증오했다.
‘대마법사의 성복을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있어.’
루가 아침에 텅 빈 방을 확인한 순간, 아마 성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여신을 향한 예배도 중단되고, 루퀼렘은 더 단단히 국경을 닫겠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루퀼렘에는 유능한 마법사들이 많고, 루 아휜과 여왕님도 있으니까.
‘여유 부리면 안 돼, 이리아 아델리어. 빨리 나가자.’
성 복도 저편에서부터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리아는 널따란 복도의 좌우를 한 번 확인한 후, 후다닥 달음박질쳤다.
루퀼렘 성에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를 지키기 위한, 그리고 이리아 아델리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 결계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무리 대마법사라 하여도, 이리아가 모든 결계를 일일이 찾아내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대신, 결계들을 잠시 멈출 수는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그녀는 주문을 읊을 필요조차도 없었다. 이리아가 발을 한 번 쿵, 구르자, 끊임없이 흘러가던 성의 시간이 우뚝 멈추었다.
외형을 바꾸는 마법은 상당히 까다롭기에, 다른 마법을 발동하는 그 즉시 풀려 버리는 부작용이 있었다. 빨간 머리에서 본래의 하얀 머리로 돌아오게 된 이리아는 황급히 성 복도를 가로질러 뛰었다.
시간을 멈추는 마법은 오래도록 지속할 수 없지만, 성을 빠져나가기엔 충분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루퀼렘의 새벽하늘 위에는 두 개의 달이 휘황찬란하게 떠 있었다. 마법의 왕국 루퀼렘은 영원히 새벽이었다. 그곳에는 아침과 낮, 밤이 없었다.
여신을 모시는 루퀼렘 사람들은 불필요한 살생을 저지르면 안 되기에 고기를 먹지 않았다, 모두가 채식주의자인 루퀼렘인들은 마법으로 작물을 기르기 위해서 태양을 없앤 대신, 두 개의 달을 만들어 내 왕국이 영원한 새벽을 맞게 했다.
[틸다! 와 있었구나!]
낮에 일러 주었던 대로, 성 정문에는 하얀 조랑말 틸다가 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아는 단번에 틸다에 올라탔고, 틸다는 이리아가 등에 타자마자 조용히 달음박질쳤다. 대마법사의 축복을 받은 조랑말은 보통의 조랑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멈추었던 성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을 즈음, 이리아 아델리어는 이미 왕국의 남쪽 국경선 부근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완벽한 붉은빛이 되어 있었다.
비센티움 제국에 다가갈수록 가짜 달들이 사라지고, 진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화책에서만 보던 ‘밤’을 맞이했다.
루퀼렘과 닿은 비센티움 북쪽의 성벽은 다른 성벽들보다도 훨씬 더 삼엄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틸다와 이리아가 오자마자 그들의 앞에 창부터 들이댔다.
“어디서 온 누구냐.”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과 피부색을 철석같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비센티움 제국민’인 이리아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센티움 제국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했다.
“씨……씨시 힐데어예요. 아침에 부모님을 따라 약초를 캐러 국경을 넘었는데, 길을 잃어 지금 돌아왔네요.”
“약초꾼인가? 그럼 약초는 어디 있지?”
“오, 오는 길에 가방끈이 끊어져서 다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이리아는 이 순간, 자신의 비센티움 제국어 실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퀼렘 언어를 익힌 후에 바로 배우기 시작한 언어가 비센티움 제국어였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리아가 만들어 낸 ‘씨시 힐데어’라는 이름은 성에서 나고 죽은 두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이리아는 그들의 죽음에 또 한 번 애도를 표하며, 병사들이 열어 준 성문을 지나쳤다.
그렇게 이리아는 고대하고 또 고대했던 비센티움 제국에 도착했다. 가출 계획의 1단계 성공이었다.
그녀는 꾸깃꾸깃한 비센티움 제국 지도를 펴 가장 가까운 도시를 찾아냈다. 사실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마을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이곳에 가면 마법석을 팔아 돈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이리아는 주머니에 두둑하게 든 마법석들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밤새 이리아를 태운 채로 달린 틸다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한껏 지쳐 있었다. 이리아는 틸다의 등에서 내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침 햇살을 구경하다가, 마법석 상점을 찾아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비센티움 제국과 루퀼렘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상업의 발달이었다. 루퀼렘은 오로지 마법사들을 위한 나라이기에 폐쇄적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했고, 다른 나라와의 교류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애초에 상업과 무역이 발달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비센티움은 달랐다. 마법의 도움 하나 없이 ‘전사’를 키워 내는 비센티움은 외국에 무기와 곡식을 팔아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국가였다. 거래로 먹고사는 나라였기에, 상업과 무역이 엄청나게 발달해 있었다.
이리아는 거리를 빼곡히 채운 상점과 이동 판매대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높은 건물들과 거리에 뿌려진 전단지들은 그렇다고 쳐도, 일렬로 놓인 이동 판매대들은 루퀼렘에서는 곧 죽어도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너무 신기하다, 그렇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온 대마법사 이리아에게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먼저였다. 그녀는 옆에서 푸르르 입을 터는 틸다에게 설렘 가득한 말들을 잔뜩 뱉어 놓았다.
아침 해가 온전히 하늘에 자리 잡자,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루퀼렘과 전혀 다른 생김새, 전혀 다른 복장을 한 신사 숙녀들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비센티움에는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전부 색이 강렬하고 진한 머리카락을 가진 데다가, 피부도 건강한 살굿빛이나 구릿빛이었다.
루퀼렘 사람들과 비교하면 몸집도 훨씬 거대했기에, 이리아는 자신이 동화책의 거인국에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흥미로웠던 행인 구경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아무리 거리를 쏘다녀도 마법석 상점이 나오지 않자, 이리아는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리는 아프고, 목은 말랐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상업의 나라 비센티움에서는 쉴 수도 없고, 물을 마실 수도 없었다. 이곳은 호숫물을 마법으로 정화해서 마시면 되던 루퀼렘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이걸 팔지 못하면 돈도 못 구하는데…….]
이리아가 주머니에 가득 쌓인 마법석들을 뒤적거렸다. 틸다는 시무룩해진 이리아를 빤히 구경하다가, 그녀를 어느 한 가게로 이끌었다.
보석상이었다.
가게 간판을 본 이리아의 낯빛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녀는 천재 조랑말이라고 틸다를 칭찬한 후, 고삐를 거리에 묶어 두고 가게로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보석상 주인은 이리아를 보자마자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침부터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리아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이 모여 있는지 궁금해하며 가게 주인에게로 향했다.
“빨간 머리 아가씨께서는 어떤 일로 이곳을 찾으셨을까요?”
“이…… 이, 이것을 팔려고요.”
실수로 루퀼렘어를 할 뻔했던 이리아는 재빨리 언어를 바꾸어 상황을 무마했다. 그녀가 주머니에 가득 들어 있는 마법석 중 하나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은 반짝거리는 마법석을 보고 잠시 눈을 빛냈다. 그러나 돋보기로 마법석을 들여다보자마자, 언제 눈을 빛냈냐는 듯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