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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09)

프롤로그

00.

이상하게 온몸이 뻐근했다. 두 팔을 쫙 뻗어 기지개를 켜 보아도 뻐근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보니 머리도 조금 아픈 것 같다.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분위기에 취해 폭탄주를 다섯 잔 정도 들이켠 것 같다. 아닌가, 여섯 잔인가? 기억이 희미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리아는 뒷골을 잡으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천막 안에 나뒹굴고 있는 옷가지들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혀야 했다.

튜닉부터 바지, 속옷까지. 그녀가 입고 있던 모든 옷가지가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었다. 이리아는 다급히 이불 안쪽을 확인했다. 역시나, 완벽한 알몸이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살구색의 피부 위에는 심지어 생애 처음 본 키스 마크까지 새겨져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이리아는 어젯밤의 기억을 되새기려 노력했지만, 완벽하게 필름이 끊겨 버렸었다. 기억 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사실 기억 나는 게 딱 하나 있기는 했다. 차라리 기억나지 않았던 편이 더 나았을, 그런 기억이지만.

‘허리를 조금만 더……. 옳지, 그렇게.’

이리아는 기억 속의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께를 틀어잡았다.

이 목소리, 틀리지 않았다면 ‘그’의 목소리다.

설마, 아니겠지, 라는 마음으로 인기척이 느껴지는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는 어젯밤의 격렬한 정사를 함께한 남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응. 모르는 게 약이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본 이리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겨우 하룻밤의 장난이야. 어차피 절대로, 다시는 침대 위에서 볼 일 없는 남자라고. 이리아는 스스로의 생각에 동의하며 속옷을 찾았다. 속옷은 반쯤 뜯겨 있었지만, 어찌어찌 입을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속옷을 입으려는 순간, 탁. 뜨거운 피부가 그녀의 손목을 감아 왔다.

“나 몰래 도망치게 둘 수는 없는데.”

조금 잠겨 있었지만, 분명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이리아는 끔찍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근육으로 뒤덮인 남자의 팔뚝이 천천히 내려가며,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드러났다. 참 멍청하게도, 이리아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기계적으로 딱 한 문장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어나셨어요……?”

이 상황에서 ‘일어나셨어요’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아침 인사였다.

이리아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불을 한껏 움켜쥐었다.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남성은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은 그녀의 목덜미를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책임져야지.”

“뭐…… 뭘 채, 책임져요?”

“나.”

순간, 이리아는 손의 힘이 풀려 놓쳤던 이불을 재빠르게 끌어 올렸다. 그녀가 대체 무슨 헛소리냐는 뜻을 담아 남성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네가 어젯밤에 내 정절을 빼앗아 갔잖아.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진짜로 책임을 지라는 거다.

‘정절’을 빼앗아 간 책임을.

이리아는 지난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에 새겨진 흔적들과 이상하게 더 뻐근한 허리, 그리고 침대에 묶인 남자의 한쪽 손목을 종합해 보면 자신이 남자를 ‘덮친’ 건 맞아 보였다.

이리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앞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흐트러지며 근육으로 뒤덮인 알몸이 드러났다.

이리아는 애써 아침의 건강한 신체 부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남자를 바로 눈앞에서 맞이했다. 그가 이리아의 턱을 잡으며 한 자 한 자 똑바로 내뱉었다.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어…… 그, 그게…….”

네, 라고 해도 큰일이고 아니요, 라고 해도 큰일이다.

눈앞의 남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마법을 쏘아서라도 도망쳤을 터였다. 그러나 이 남자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마법이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마법을 사용하는 자신을 보는 순간 남자의 칼은 목을 뎅강 잘라 버릴 테니까.

이리아는 잔뜩 울상일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덱스터 하워드.

군대를 이끄는 영웅이자, 가출한 대마법사 이리아의 상사였다.

그래요, 나, 상사랑 자고 말았어요. 그것도 제국의 대(大)공작, 군대의 군단장, 마법을 혐오하여 세상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분과요.

이리아가 시선을 피할 때마다 덱스터는 그녀의 턱을 다시 자신의 앞으로 잡아끌었다. 누군가가 방해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수로 키스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한 병사가 막사 천을 젖히고 들어왔다.

“하워드 공! 큰일 났습니다!”

쯧, 덱스터가 혀를 차며 재빨리 이불로 이리아를 감쌌다. 뜻하지 않게 덱스터의 가슴팍에 코를 박게 된 이리아는 창피해하기도 전에,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을 병사에게 들키지 않도록 꼼꼼히 모아야 했다.

알몸의 상태로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군단장을 맞닥뜨린 병사는 잠시 주춤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덱스터가 품 안의 이리아를 더 강하게 안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씨시 힐데어라는 간호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개를 풀어 부대 밖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곧 나타나겠지.”

씨시 힐데어는 신분을 숨긴 이리아 아델리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들은 사라진 이리아를 찾고 있었다.

병사는 군대의 서열에 맞추어 덱스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덱스터가 숨죽이고 있던 이리아를 놓아주었다.

“당신 때문에 병사들이 개를 풀겠어. 아쉽지만 이쯤에서 보내야겠군.”

이리아는 자유가 되자마자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덱스터가 보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토록 빠르게 옷을 입은 적은 지난 21년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처음.

덱스터는 어느덧 단도로 끈을 잘라 두 팔이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이리아는 그가 나가도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엉성한 인사를 하며 도망갔다.

책임을 지든 뭘 하든, 일단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는 게 먼저였다. 그녀는 완벽하게 신지 못한 신발을 바닥에 찍찍 끌며 간호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대 한가운데로 향했다.

사람들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멀리서 개를 다시 묶으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한 여성이 죽을상의 이리아를 보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씨시!”

“줄리에타.”

“아침부터 대체 어딜 갔었던 거예요! 한참을 찾았잖아요!”

“미, 미안해요. 화장실이 급해서…….”

“아침부터 장운동이 참 활발하네, 씨시.”

병사와 간호사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리아는 평소였다면 사람들의 놀림에 얼굴을 붉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차라리 화장실에 밤새 처박혀 있던 게 훨씬 나았다. 덱스터 하워드와 한 침대에서 뒹굴 바에는, 차라리 밤새 장을 비우는 게 훨씬 나았어!

개를 풀었던 병사들이 이리아를 지나치며 한마디씩 핀잔을 던졌다. 이리아는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사실 딱히 죄송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끝났으니 부대는 다시 제국 도심으로 돌아가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사와 병사들은 말을 타고, 간호사와 조무사들은 당나귀가 이끄는 수레를 탔다.

이리아는 수레 끄트머리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선 고민하기 시작했다.

덱스터 하워드와 ‘잤다’. 술에 취해 생각은 잘 안 나지만, 분명히 자기는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덱스터 하워드가 자신의 정절을 빼앗았다고 책임을 지란다. 대체 어떤 책임을 지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임을 지란다.

‘정절을 다시 되돌려 줄 수도 없고! 아니, 그렇게 치면 나도 내 처음을 빼앗겼다고! 책임은 덱스터 하워드, 너도 져야지!’

하지만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이 말을 덱스터 하워드 앞에서는 할 수 없겠지.

이리아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손 틈새로 덱스터 하워드를 노려보았다. 그는 풍채 좋은 등허리를 자랑하며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가능만 하다면 저 남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이리아의 허리가 점점 더 뻐근해졌다. 다리 사이도 쓰라린 것이, 수레를 오래 탔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이리아에게 줄리에타가 물었다.

“어디 불편해요?”

“아, 아니에요. 그냥 머리가 조금 아파서…….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그럴 만도 하죠. 폭탄주를 일곱 잔이나 들이켰잖아요! 안주도 없이!”

이리아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줄리에타가 숙취는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차마 동감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건 숙취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덜컹거리는 수레에 앉아 있기만 해도 힘이 들었다. 이리아는 식은땀에 젖어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푹 수그린 허리를 들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저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몰고 있는 덱스터 하워드가 더 싫어졌다.

부대는 조그마한 강줄기를 만나자 멈춰 섰다.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며 생각보다 긴 고향길에 불평을 터뜨리고 있을 때, 이리아는 기지개조차도 켜지 못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는지 온몸이 끈적였다. 그녀는 줄리에타에게 목적지를 알린 후, 비틀비틀 강가로 걸어갔다. 마음만 같아서는 강에 풍덩 빠져 식은땀을 전부 씻어 내고 싶었지만, 현재의 이리아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손과 팔을 닦아 내는 것뿐이었다.

“힘들어…….”

이리아는 시든 풀 위에 주저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구경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넋을 놓고 앉아 있었을까, 뒤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부대가 출발하는 건가 싶어 몸을 일으키는 순간, 한쪽 볼에 미지근한 물병이 닿아 왔다.

“자. 마셔.”

“아…….”

덱스터 하워드가 물병을 잡고 서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알몸으로 봤던 남자가 군단장 제복을 멀끔히 차려입고 있으니 더 무서워졌다. 마법을 혐오하여 세상 모든 마법사의 ‘멱’을 따는 게 목표라는 군단장.

이리아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물병을 받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밤새 함께 뒹굴었던 여자를 챙겨 줄 정 정도는 있다는 건가. 이리아는 미지근한 물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물병만 챙겨 주고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던 덱스터 하워드는 그녀가 물을 마시는 걸 제자리서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아는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물병을 드는 척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머리 위에서 놀랍도록 낮고 강인한 덱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책임을 질지는 생각해 봤나?”

이리아는 순간,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래, 내가 틀렸다. 이 남자는 밤새 함께 뒹굴었던 여자를 챙겨 줄 정 정도도 없다. 그냥, 어떻게 책임을 질지 대답을 듣기 위해서 ‘겸사겸사’ 물을 챙겨 온 것이다.

물을 들이켜는 걸 멈추고 물병을 잠갔다. 이리아는 최대한 늦게 물병 꼭대기를 돌리며 생각할 시간을 끌었다.

‘보통 남의 정……절을 빼앗았을 때는 무슨 책임을 지지? 원하는 액수의 돈을 주나? 시종 제도가 있는 비센티움 제국이니 평생토록 시종이 되어 발을 닦는 건가? 아, 아니면 주…… 죽음으로 갚나?’

덱스터는 귀족이며, 귀족 중에서도 대공작이었다. 정절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귀족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다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었다. 정절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마땅한 ‘책임’을 지라고까지 할 줄이야.

이리아는 그냥 눈앞의 강에 몸을 던져 나뭇잎과 함께 멀리 흘러가 버릴까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설령 그런다고 해도, 덱스터 하워드는 다시 잡아 오겠지. 대륙의 모든 강을 메꿔서라도 잡아 올 거야.

물병이 온전히 잠기고, 생각할 시간도 끝났다. 이리아는 손에 잡히는 낙엽을 만지작거리며 없는 용기를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사, 사실 저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그…… 도대체 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

이리아는 말을 하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덱스터 하워드가 제발 허리춤의 검만 뽑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전쟁 영웅인 덱스터 하워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였다. 정절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목 하나 자르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덱스터는 긴 시간 대답하지 않다가, 잔뜩 움츠린 이리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살짝 집어 만지작거렸다.

“방법은 쉬워. 내가 알려 줄까?”

“고, 공이 그러시겠다면…….”

덱스터가 이리아의 얼굴을 반쯤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이리아는 귀를 스치는 그의 손길이 곧잘 목으로 내려와 그녀를 조르기 시작하리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이리아는 사실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이 남자의 입에서는 돈, 죽음, 노예 중 하나가 나올 거라고. 그 셋 중에서도 죽음이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이리아의 확신이 틀렸다.

덱스터 하워드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죽음’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랑 결혼하면 돼.”

결혼.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이리아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덱스터의 강렬한 눈빛은, 그가 방금 ‘결혼’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는 사실을 손수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옳게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리아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덱스터는 새하얗게 질려 버린 그녀의 뺨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해 줄까? 나랑 결혼하면…….”

“아, 아니에요! 완전 잘 들었어요!”

당황스러움이 이성을 먹어 버렸다. 이리아는 자신이 소리를 지른 것에 대하여 덱스터 하워드에게 거듭 사과했다. 그녀는 덱스터 하워드 앞에서 거의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리아가 반쯤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 아, 아무리 제가 공의 정, 정절을 빼앗아 갔다고 해도 결혼은 너무 갑작스러운데…….”

“갑작스럽다면 적응할 시간을 주지. 몇 달이 필요해? 한 달? 두 달?”

적응할 시간이라니. 한 달, 두 달이라니!

‘너같이 괴팍하고 무서운 남자와의 결혼에 어떻게 적응을 해?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너와의 결혼에는 적응할 수 없어. 한 달, 두 달은 무슨, 백 년, 이백 년을 줘도 못 해!’

하지만 아무리 대마법사 이리아라도 목숨은 하나이기에, 이 말을 덱스터에게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이리아는 결국, 무척이나 소심하게 두 달에서 한 달을 더 추가하여 손가락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세 개.

즉, 석 달을 달라는 뜻.

덱스터 하워드는 마법으로 꾸며 낸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이리아가 눈을 질끈 감을 때까지 그녀와 시선을 맞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정확히 석 달을 주지. 하지만 석 달 후에는…….”

덱스터가 가죽 장갑을 벗어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여전히 숫자 3을 보이는 이리아의 손을 펴 조그마한 엄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드시 나와 결혼해야 할 거야.”

반지는 딱 맞게 들어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듯이.

덱스터는 더 긴 말 없이 일어나 부대로 돌아갔다. 등을 보인 그는 부대로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이리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리아는 멀어지는 덱스터 하워드의 등을 눈물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엄지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는 있는 힘껏 당겨 봐도 빠지지 않았다.

이리아는 대체 왜 덱스터 하워드가 자신과 결혼을 하라고 조건을 내밀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그녀를 진절머리 나게 싫어했다.

몸 한 번 닿는 것도 혐오할 정도로, 눈앞에서 죽여 버리겠다고 고함칠 정도로.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이리아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날 혐오하는 남자가, 왜 어젯밤엔 함께 몸을 섞었던 걸까. 왜 어젯밤엔 나를 돌려보내지 않아 이 사달이 나도록 한 걸까.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절대 덱스터 하워드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평생 가둬 두었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출한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결국 제자리서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방대한 가출 계획에 이런 건 없었어.

덱스터 하워드와의 결혼 같은 건 없었단 말이야!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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