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254/254)

* * *

정치화가 헛걸음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들러 외출을 알린 후, 백기하와 세화는 변용을 한 채 사람들 사이를 잠시 걸었다.

인계에 막 도착했을 때 불안 불안한 표정들을 보아서 그런가. 정비가 되고 있다는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었는데.

“정말 다들, 얼굴이 밝네요.”

너른 길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이들의 안색은 의외로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시장은 벌써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듯 보였고, 가장 중요한 식료품도 조금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바쁘게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 외에 담장을 고치거나 기와를 다시 올리는 등 부지런을 떨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먼 행상을 준비하는지 커다란 수레가 잔뜩 줄지어 들어가는 상단도 보였다. 그 활기찬 사람들을 보며 세화가 설풋 웃었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인계에 있을 때 조금 재미있었어요.”

백기하도 그 말에 조용히 웃었다.

“맞아. 나도 인간들의 이 활기참이 좋더라. 그래서 이곳에 와 있던 거였거든.”

“이곳에? 아, 당신이 인계에 있던 거요?”

그러고 보니 그는 그때 어떻게 인계에 와 있던 거지? 그때도 전시 상황이었는데.

“인계로 넘어올 때 주가의 경비들과 싸움은 붙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신수였는걸. 신수는 결계에 잡히지 않으니 몰래 문을 넘었지.”

“왜 그랬는데요? 다른 때야 인계에 쉬러 왔다고 해도, 전쟁 중이었는데 왜 와 있던 거예요?”

“음…….”

어려운 질문이라곤 생각 안 했는데, 그는 의외로 목소리를 삼키며 대답을 망설였다.

“……?”

그런 그를 세화가 조금 의아하게 응시할 때였다.

백기하의 시선이 문득 제가 스쳐 지나온 어느 곳에 고정됐다. 갑자기 멈춰선 백기하를 따라 세화도 고개를 돌렸다. 북적이는 거리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득해 그가 뭘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에요? 거기 뭐 있어요?”

백기하는 지금 제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눈까지 좁히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요.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장난감, 아니 장식품 같은 건데, 좀 희한해서. ……장식품이겠지? 저걸 설마 진짜 사용하는 건 아니겠지?”

장식품? 장난감?

“뭘 본 건데요?”

“아니야. 음, 그냥 잘 만든 것 같길래 잠깐 본 거야. 당연히 장식품이겠지. 가자.”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걷던 백기하의 발걸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또다시 이상한 것을 본 듯 그의 다리가 한 번 더 멈칫했다.

뭐지? 다시금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거리엔 워낙 여러 가지 물건들이 늘어져 있어 이번에도 그가 뭘 보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또 무언가를 가늠하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 이후로도 백기하의 시선은 종종 시장 어딘가에 머물렀다.

마음에 들었으면 샀을 텐데, 그런 건 아니니 그저 특이한 무언가를 본 거겠지. 그렇게 여기다가도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답답해진 세화가 손을 잡아끌었다.

천천히 도성을 돌아보겠다는 계획은 취소하고 성 바깥을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 * *

성벽을 나서자마자 백기하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신수로 변화했다.

비옥해지고 생명력이 움트는 땅들. 그 땅을 빼곡하게 물들인 단풍과 무르익어 가는 곡식들을 지나쳐 그들은 가볍게 날았다.

인간의 걸음으로 이틀이 걸린다는 목적지까지는 신수의 능력으로 한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 수관촌이 보이기 직전, 인적이 드문 곳에 내려앉았다. 모습을 바꾼 백기하는 발을 땅에 디디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자마자 보일 거라 했는데 안 보이네. 그 토끼바위.”

“마을 입구는 저 멀리 있잖아요. 벌써부터 그걸 찾아요?”

“인간들이 말하는 입구 근처가 어느 정도 범위인지 모르잖아. 여기도 근처라고 생각할 수 있지.”

그 열정이 우스웠던 세화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딸이 좋아요?”

“응, 딸.”

“아들이면 어떻게 하려고요.”

“아들도 좋지. 그렇지만 그대가.”

“나요?”

“그대, ……어머님을 많이 닮았더라고.”

“뭐, 어머니시니까요. 근데 그게 왜요?”

“그러니까. 그거 때문이야.”

“?”

“난 그대 어릴 때 모습을 못 봤잖아.”

지금도 이렇게 사랑스럽고 멋지고 귀엽고 다하는데 어릴 때는 또 어땠을지 궁금하다고.

“딸이 태어나면 그대랑 똑 닮았을 텐데. 분명 엄청 귀엽겠지.”

시집도 안 보낼지 몰라. 나보다 약한 놈은 절대 사위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장인어른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겠어. 혼인 적령기로는 쉰도 좀 빠르지.

진지하게 하는 얼빠진 말에 황당해진 세화가 또 조금 웃었다.

그러는 사이 둘은 벌써 마을의 목상 앞에 도착해 있었다.

도성 밖의 치안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수관촌은 한 번도 엉망이 된 적 없었던 것처럼 도성만큼이나 멀끔한 상태였다.

인계의 지방 마을들은 보통 담이 없다고 했는데, 이곳은 흙으로 얼기설기 쌓은 담장이 제법 커다란 마을 전체를 빙 두르고 있었다.

담 안쪽, 저 멀리엔 아낙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산열매를 칼로 깎아 다듬으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잠시 보고 있는데, 농기구를 한 손에 단단히 움켜쥔 덩치 큰 사내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뭡니까. 들어올 거요? 신분패는 있습니까?”

“여기 있네.”

백기하가 성익권이 내어 준 신분패를 품 안에서 꺼내 내밀었다.

“뭐야? 양반님도 아니면서, 다짜고짜 왜 반말이야?”

그제야 자신들이 지금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걸 깨달은 백기하가 멋쩍게 웃었다.

“이 마을에는 어쩐 일인데. 지나가는 길인가?”

“우리는-.”

“그걸 묻긴 뭘 물어! 딱 봐도 부부구먼. 젊은 내외가 여기 올 목적이 하나밖에 더 있어?”

어느새 다가온 마을 아낙 하나가 괜한 겁을 준다며 문지기의 등을 찰싹 때렸다. 반가움을 듬뿍 담은 눈초리로 세화와 백기하를 훑어내렸다.

“그런데 희한하네. 보통 한 셋째까지는 아들을 원하니까 새댁처럼 젊은 사람들은 이 마을에 잘 안 오는데.”

백기하가 나는 그 의견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들도 좋지만 첫째는 꼭 딸인 편이-.”

“으잉? 새댁이 아니라 신랑 쪽이 원하는 거였어? 아이고, 내 뭔지 알겠네, 알겠어. 예쁜 색시를 꼭 닮은 여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뭐 이런 거지? 내 그 맘 잘 알지. 우리 신랑도 그랬거든.”

“그런데 그 토끼바위라는 건 정말 효과가-.”

“효험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 이 마을이 그걸로 먹고 살던 곳인데. 그런데 둘은 언제 혼인한 거야?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일찍 했나? 아직 배는 전혀 나온 것 같지 않은데 몇 달이나 됐어?”

아낙은 백기하가 미처 대답을 꺼내놓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랑이 참말로 훤칠하네. 뭐 하는 사람이야? 어쩜 이리 잘생긴 신랑이랑 이쁜 아가씨가 혼인했어? 어떻게 만났는데? 둘 다 형제자매는 있어? 다들 혼인했고? 아니지. 내 정신 좀 봐.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아이 가진 사람을 이리 세워 두었네. 얼른 이리로 와 앉아서 좀 쉬어. 목은 안 말라? 어디서 온 거야? 식사는 하고 왔어?”

세화의 손을 덥석 잡아챈 아낙이 그녀를 자신이 앉아있던 평상으로 이끌었다.

여기, 여자 만용이가 있구나.

백기하는 아낙의 질문이 실제로 대답을 바라고 나오는 물음이 아니라는 걸 익숙하게 파악했다.

“자, 여기 앉아. 그리고 손 내 봐, 손.”

주변 여인네들의 바구니에서 이것저것 무언가를 꺼내든 아낙이 세화의 손에 그것들을 얹어 놓았다.

얇게 썬 대추, 동글동글한 앵두와 살구, 통통한 산딸기 등이 손안에 오밀조밀 그득 쌓였다.

“새댁네 마을도 그래? 천인분들의 신통력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산천에 봄 열매, 여름 열매, 가을 열매 할 것 없이 계절도 모르고 가지가 부러지게 달렸다는 것 아녀. 배가 터지도록 먹고 죄 따서 다듬어 말리는데도 반절은 썩혀 버리게 생겼어.”

그 말에 열매를 다듬던 다른 아낙이 맞장구를 쳤다.

“정말 천인님들 고맙기도 하지. 삐쩍 골아 당장 숨이 넘어가지 않는 게 이상하던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건강해지고. 먼저 간 사람들만 안됐지. 조금만 더 버텼으면 되었을걸.”

“그런 얘기를 또 뭣하러 해. 그럴 시간에 얼른 저 감에 부채질이나 해.”

“바람이 이렇게 좋은데 왜 계속 부채질을 하래. 부채질하면 보름 걸려 마를 게 이틀 걸려 마르나?”

싸우는 줄 알았던 아낙들은 그게 농담이나 마찬가지였는지 자기들끼리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세화는 뭔가가 가득 올려진 손을 어쩌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그런 그녀의 손 위에서 곶감 하나를 들어 올린 백기하가 그것을 세화의 입술 사이에 끼웠다.

“이왕 받은 거니 한번 먹어 봐. 달아 보이는데.”

“아, 그러네요. 아주 맛있어요.”

세화의 말에 아낙들이 밝은 얼굴로 말을 보탰다.

“내가 봄에 애를 가졌었는데 그때 이게 얼마나 먹고 싶던지. 곡식값이 막 뛰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가진 건 다 팔거나 먹고 없을 때였거든. 그러니 어디서 구할 수도 없고. 그게 한이 돼서 이번 가뭄만 버텨 내면 원 없이 곶감을 말려 먹을 거라고 했잖아.”

“맞아, 맞아. 헌데 땅까지 다 모래처럼 말라서, 가뭄이 끝난다 해도 먹거리 가격이 다시 내리고 곶감까지 만나려면 십 년은 걸리겠네 했건만. 이게 웬걸. 천인님들께서 이렇게 싹 다시 살려 주시니.”

백기하가 세화의 입에 주섬주섬 열매들을 넣어주고 있는 것을 본 아낙이 또 한 번 손 위에 가득 열매를 얹어 주었다.

먹은 것 이상으로 다시 쌓인 열매들이 손 옆으로 톡톡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입이 짧아서 어떡해. 아이를 가졌을 땐 그저 많이 잘 먹어야 해. 그래야 애기도 엄마도 건강한 법이야.”

아낙들이 너무 세화에게 먹을 것을 강요하는 것 같아,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백기하가 끼어들었다.

“아, 그런데 봄에 아이를 가졌었다면 지금은 태어났습니까?”

열매를 계속 얹어 주던 아낙의 표정이 일순 조금 어두워졌다.

“음. 그 가뭄에 먹고 마실 것이 없었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 뜨거워서 사람들도 많이 죽었고. 우리 아이도 같이 갔지 뭐.”

“아…….”

깜짝 놀란 백기하가 사과하려는데 아낙이 먼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뭐 나만 그랬나. 그땐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사람이 죽어 나갔는걸. 우리 옆집 아지매는 어렵게 지킨 아이를 낳다가 같이 잘못되었는데,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남은 사람들은 울 힘도 없었지.”

“…….”

“뭐, 나도 남아 있는 애들이 있으니 슬퍼하고만 있을 수도 없고. 이렇게 산 사람들은 계속 사는 거니까.”

아낙은 그리 말했지만 미안함에 굳어진 백기하의 안색은 풀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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