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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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의 모습으로 가면 그곳까지 한 시진도 걸리지 않겠지만 나라의 상황이 조금 궁금하긴 했다.

돌아온 첫날엔 도로에 깔린 관병들과 회임 여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뭘 자세히 볼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치화가 말한 것처럼 도성과 주변을 좀 돌아보려 했다.

신분을 숨긴 채 사람들 사는 것을 보고 싶다는 계획을 왕에게 알리자, 성익권은 크게 웃으며 중인의 옷을 준비해주었다.

변용술사에게서 받은 변용술이 아직 유효했기에 얼굴을 드러내고 외부로 나가는 일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길이 잘 든 순한 말들이지만 혹시 모르니. 혹여 문제가 생기면 주변의 병관 어디든 들어가셔서 이 패를 보여 주신 후 말을 바꾸시면 됩니다.”

대단한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기에 조용히 다녀올 생각이었건만, 성익권은 마치 이 외유가 나라의 중대한 행사라도 되는 양 그들의 편의를 직접 챙겼다.

“잠시 다녀오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 하셨지만, 혹시 몰라서 가지고 계시면 요긴하게 쓰실 만한 것들 몇 가지와 간단한 먹거리, 술 정도만 준비하였습니다. 짐스러우실 땐 버리고 돌아오시면 되니, 괜찮으시면 지금은 가져가시지요.”

어떻게 해서든 뭐라도 챙겨 주려는 그 마음을 알기에 세화가 멋쩍게 대답했다.

“너무 신경 쓰게 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많을 텐데. 도움은커녕 이리 폐만 끼치고 있으니.”

“폐라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를 살려 주신 은인분께서 그 무슨 말씀을요. 게다가 내단이라는, 그 무엇보다 상서로운 귀한 구슬까지 제게 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소매 속에 넣어둔 내단을 움켜쥔 성익권이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늦은 밤 불쑥 남자 천인이 자신을 찾아왔던 날을.

당황해 황급히 상석을 비우려는 그를 고개를 저어 그대로 앉힌 천인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듯 성익권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제 속을 낱낱이 읽어내는 듯했는지.

성익권은 제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듯한 압박감에 등이 온통 젖도록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 후, 천인은 성익권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것은, 어떤 구슬이었다. 흠 하나 없이 뽀얀 흰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가 훤히 보일 듯 투명해 보이기도 하는 신비한 구슬.

“내 내단이다.”

“내단, 이요?”

“내 힘이 담긴 구슬이라는 뜻이야.”

남자 천인은 가볍게 대답했으나 이어진 말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반경 백 리 안의 삿된 것들은 저절로 소멸할 것이다. 일전처럼 감히 혈호를 요구하거나 하는 놈들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구슬에 담긴 신수의 기운을 느끼고 경계하며 쉬이 다가오지 못할 테고.”

“예?!”

그, 그런 귀한 것을! 성익권의 손이 반사적으로 내단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감히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일까 염려되면서도 차마 사양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강한 힘을 가진 귀물인 만큼, 그것이 다른 마음을 품은 인간의 손에 넘어갔을 때의 위험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그런 성익권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남자 천인이 무겁게 덧붙였다.

“나 역시 그것을 인계에 남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확신할 수가 없구나. 좋은 일이 될지. 또 다른 재앙의 씨앗이 될지.”

“…….”

“하지만 너를 믿고 내어 주기로 결정했으니, 소지자의 품성에 대한 기준은 네게 가장 무겁게 적용될 것이다. 네가 긴 재앙 앞에서 얼마나 힘겨워했는지를 알아 이리하는 것이니, 너는 앞으로도 애민과 중용의 마음을 결코 잊어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 말 속에 담겨있던 위엄과 말의 의미가 전해주던 책임감의 무게를 떠올린 성익권이 세화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무어로도 갚을 길이 없는 은혜에 비하면 제가 준비한 이런 것들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니, 은인께서는 절대 신경 쓰시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빈약한 것들만 내어 드리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부지런히 궁 안도 정비하여, 돌아오셨을 땐 더욱 정성을 들여 모실 것입니다.”

“아니야. 이미 덕분에 잘 쉬고 있는 것을. 그럼 다녀오마.”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이미 자신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보았으면서 그리 염려를 거듭하는 모습에 세화가 조금 웃었다.

“가요. 가다가 치화에게도 들려서 언질을 주려면 서둘러야겠어요.”

“그래.”

백기하 역시 경쾌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화가 말에 실린 짐에 대해 궁인들에게 안내를 들으며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의 발걸음은 멈춰 있는 채였다.

이윽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슬쩍 세화의 기색을 살핀 그가 성익권에게 조용히 붙어섰다. 그 은밀한 기색에 성익권이 일순 긴장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또 무슨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기라도 하시는 걸까?

이 남자 천인에게선 아직 회수하지 못한 흑룡의 파편의 기척이 꽤 있는 듯하다 미리 언질 받은 이후였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내단이라는 귀한 것까지 넘겨받았었고.

하여 그런 부분을 염려하는 성익권에게 백기하는 긴장된 얼굴을 한 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자네 돈 좀 있나?”

“……예?”

“여기서 쓰이는 돈 말이네.”

“아, 노잣돈이라면 그것도 제가 저 짐 속에 넉넉히 넣어 두었습니다.”

“그랬나? 역시 생각이 깊군.”

“아, 감사합-.”

“좀 더 주게.”

“예?”

“혹 먹고 싶다는 게 있을 때 사주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지 않겠나. 먹을 것 이외에도 가다가 우리 아이가 사용하면 딱 좋을 장신구라든지, 장난감이라든지, 비단옷이라든지.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고. 아, 물론 그냥 달라는 것은 아니네. 대신 이걸 받게. 내 내단일세.”

“……예? 어…….”

성익권이 농을 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 남자 천인의 눈을 한 번. 그가 내미는 새하얀 내단을 한 번. 다시 남자 천인의 눈을 한 번 바라보고는 얼떨떨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인세에 남겨 두는 것이 염려될 만큼 중요한 것이라 하시지 않았었나.

‘그, 그런 걸 이리 전당을 잡는 싸구려 패물마냥…….’

“……이러지 않으셔도 제가 지금 바로 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말 말고. 자자, 얼른 받게. 대신 섭섭지 않게 부탁하네.”

그렇게 말하는 이 남자 천인은 이미 제 부인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이 나라의 모든 관련 용품과 먹거리들을 쓸어 모으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의욕적으로 빛나는 두 눈에 당황한 성익권이 황급히 내관에게 그대로 명령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버리고 돌아오시고 싶어지실 정도로 든든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하여 궁인들과 대화를 하는 세화의 옆으로 백기하가 다가온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그를 보며 세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전혀 없어.”

왕은 그들이 도성 동문 쪽에 있다는 을선사라는 절에 가장 먼저 갈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내준 듯했으나 백기하의 목표는 확고하게 수관촌이었다.

토끼바위. 그것을 떠올리며 백기하가 말에서 내린 짐을 제 손에 들었다. 이틀이나 가야 한다는데 말을 타고 가다니, 안 될 말이지.

‘신수의 모습으로 달려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겠어.’

받을 것을 다 받고 나니 발걸음이 빨라져, 세화를 재촉하며 궁문을 나섰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성익권이 제 손 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안에는 방금 받은 또 하나의 내단이 보기만해도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으며 놓여있었다.

손에 쥐거나 품에 넣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 같은 신비한 구슬.

이것과 그 흑룡의 파편을 비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이 귀보가 몸에 미치는 영향을 체감하고 있자니 이판이 왜 그리 파편을 모으는 데 열심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아니. 내 경우엔 저분과의 대화가 더 특별했었나.’

이 내단이란 것을 처음 받았던 그 밤엔 세상에 다시 없을 귀보를 얻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면서도 조금 어리둥절했다.

눈앞의 천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교룡은 제 힘을 늘리기 위해 벌레처럼 여기는 인간의 한 줌 핏물마저 빨아먹으려고 하지 않았었나.

힘을 얻기 위해 생사를 건 싸움조차 불사했던 것을 보면, 어쩌면 이 내단이란 것은 천인들 사이에서는 목숨보다 귀한 것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런 것을 내줄 수 있다고? 대체 어떻게?’

그것이 궁금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귀하처럼 될 수 있습니까?”

따르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위용. 이런 귀물을 선뜻 나누어 줄 수 있는 배포.

그런 것들을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질문을 들은 천인은 성익권을 조금도 비웃지 않았다.

너는 인간이니 애초부터 나처럼 될 수 없다고 말했어도 이해했을 텐데. 그는 그 물음이 성익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조용하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넌 나처럼 될 필요가 없다. 넌 네 모습 그대로 하면 돼.”

“저는 너무 많은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순간이 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리 행동하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하여 후회하고 있지 않으냐. 그게 중요해.”

“그게 중요하다고요? 이런 후회는 모두가 품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래. 모두가 할 수 있는 생각이지. 하지만 군주는 그렇지 않아.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에선 후회보단 원망과 기약이 더욱 쉬운 법이니까.”

“…….”

“하지만 너는 네 잘못을 먼저 돌아보고 있지. 그러는 동안에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테고. 그것만으로도 너의 시간은 이전과는 다르게 흘러갈 거다.”

“허, 허면.”

코끝이 붉어지던 성익권이 다시 물었다.

“천인께서 보시기엔 이, 이대로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렇게 부끄러운 자가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 네 달라진 미래가 많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

“오래 살아라.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테니. 조금이나마 덜 후회스럽도록 이전과는 다른 삶을 위해 노력해. 그게 네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이자 하늘이 네게 중임을 맡기신 이유일 테니까.”

성익권은 사실 영현군을 다시 만나고 나서 차라리 양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도느라 학문은 조금 부족할 테지만, 그것이야 당분간 자신이 도와주면 될 일이고.

성격이 급하다,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무모하다 하며 혼도 많이 냈었지만.

해야 할 일을 정하면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가는 결단력이라던가. 필요한 일의 우선순위를 즉각 판단하여 일을 결행하는 실행력이라던가.

거기다 이 놈은 오랜 시간 민가의 상황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놈이 아닌가.

하여 부족한 나보단 분명 민생을 더욱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천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의 유예기간을 얻은 듯 했다. 도망치듯 양위를 하기보다 후회스러운 일들을 바로잡을 시간을 얻은 느낌. 게다가 이 귀한 내단을 또 내주시지 않았나.

마치 가치 없는 패물처럼 노잣돈과 교환 조건으로 내미셨을 땐 깜짝 놀랐지만.

‘돈은 넉넉히 넣어 두었으니 정말로 그것이 필요하셨던 건 아니실 테고. 그저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시기 위한 배려였을 테지.’

그래. 저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내 생의 큰 복이지 않나.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암, 당연히 할 수 있고말고.’

그러니 일단 빨리 돌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들을 처리할 생각으로 돌아서던 때였다.

갑자기 그의 뒷덜미가 순간 쭈뼛한 듯했다.

‘음? 뭐지?’

고뿔이라도 오려나? 홍 내관이 나직이 몸을 떠는 성익권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하늘을 한 번 가만히 바라보던 성익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상하게 방문자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뭐 느낌은 그냥 느낌이겠지.

‘내단이 있으니 삿된 것들은 발도 들이지 못할 텐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고개를 저은 성익권이 대전을 향해 바삐 걸어갔다.

제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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