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252/254)

* * *

백기하가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온통 먹을 것투성이였다.

온 바닥에 늘어진 간식의 향연에 놀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미리 입덧을 대비하고 있었어요.”

치화의 입에서 먼저 대답이 나왔다.

“입덧? 어의가 준 주의 사항에는 한 달 반 이후 즘에 올 거라던데.”

“헌데 의녀들을 불러 알아보니 의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의녀의 말로는 이르면 한 달 이전부터 입덧이 올 수 있대요. 그 경우 마마님들이 예민하다는 인상을 주게 될까 봐 어의들께는 숨기셨다나 봐요.”

“한 달? 벌써 한 달은 넘었는데. 그러면 당장 오늘부터 시작될 수도 있는 건가?”

“네. 그래서 입덧에 좋은 음식들 중 미리 세화가 좋아할 만한 걸 고르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백기하 역시 들고 온 것을 세화의 앞에 펼쳐 놓았다. 그가 직접 따 온 산열매들이었다.

아무리 환석의 비가 온 산천을 회복시켰다지만, 가뭄 때 풀었던 양식들을 다시 저장하고 진상해 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때에 초대도 없이 찾아와 머무는 중이면서 이게 먹고 싶다 저게 먹고 싶다 요구할 수도 없고.

하여 백기하는 이른 아침 세화가 지나가는 말로 산열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은 후, 직접 나가 열매들을 찾아 가져온 참이었다.

비록 궁인들이 신경 쓴 풍성한 다과들 덕분에 그의 그런 배려는 조금도 티 나지 않았지만.

영력으로 깨끗이 한 열매들을 늘어놓자 세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치화에게도 권했다.

“아니야. 난 괜찮아. 헌데 벌써 이런 것이 먹고 싶은 것을 보면 이미 입덧이 시작된 것 아니야?”

“응? 아니. 원래도 먹기 편하여 과일을 더 좋아했어.”

“그래? 그래도 입덧 같은데. 나도 뭘 아는 것이 없으니.”

그러며 치화의 시선이 방 곁에 늘어선 궁인 중 한 명에게 향했다. 시선을 받은 궁녀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궁녀는 모두 전하의 여인이라 저희는 남정네를 가까이 한 적도 없는걸요.”

이 말에 백기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그럼 이 나라의 왕은 대체 부인이 몇이나 있는 것이냐?”

그의 오해를 눈치챈 궁녀가 사색이 되어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전하께서 저희 모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셨다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의미로써-.”

그렇게 의미가 맞지 않는 말들아 오가는 사이, 의녀와 태의가 알려준 주의사항들을 비교해본 정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부분은 의녀들이 더 자세히 알고 있네. 다른 마마들의 경우도 예시로 적어 준 것이 있으니 이것만 미리 준비하면 되겠어.”

“호들갑 떨 것 없어. 아직 아무 일도 없는데 뭐. 시작해도 적당히 지나가겠지.”

“아니야. 네가 하늘에 계속 머물렀다면 내가 뭘 챙길 기회도 없었을 것 아냐. 곧 태어날 조카를 위해서라면 이 이모가 뭐든 할거라고.”

“그러는 넌.”

“응? 나? 나 뭐?”

“그 왕의 아들이란 사내와 뭔가 있는 것 같던데. 아니야?”

태연한 얼굴로 기함할 만한 말을 하는 친구의 모습에 정치화가 단번에 강하게 부인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야!”

“하하. 알았어. 하도 내 일에만 신경 쓰니까 그냥 얘기해 본 거야.”

“진짜 아니야. 오해하지 마.”

“응, 알겠어. 나도 알아, 너 그간 고생 많이 한 거. 뭘 생각할 시간 없이 정신없었던 거.”

“…….”

“그렇게 고생해 놓고 너무 나만 챙기잖아. 너도 그만 네 곁도 돌아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서 장난쳐 본 거야. 아닌 거 알아. 미안해.”

“…….”

“우리 학관에서 공부할 때 들었잖아. 혜선국에서는 집안에 상이 있으면 그 가문의 여식은 몇 년간 혼인할 수 없다고. 이 나란 그렇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야.”

“…….”

“나도 네 일을 많이 염려하고 있어. 그러니 너도 네 일만 생각해. 네가 혼인할 땐 가족 자리엔 내가 있을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을 정치화가 잠시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쌀쌀맞기만 한 친구였는데.

“나도 네 일을 많이 염려하고 있어. 네가 혼인할 땐 가족 자리엔 내가 있을 거니까.”

마음속에 자신을 들이고 난 이후로는 어쩌면 이리도 따뜻하고 다정한지. 정다운 말을 듣고 있으니 괜히 눈가가 시큰거려 정치화가 오히려 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분은 정말 아니야. 여기서만 하는 말이지만 나 사실 그분을 함정에 두 번이나 빠뜨린 채 온밤 내내 방치했단 말이야. 벌을 주지 않으셔서 그렇지, 문제로 삼으셨으면 나는 역모라고.”

“함정? 무슨 함정?”

“왜 너 왔을 때 봤던 거 있잖아. 벽 따라 깊이 땅을 파 둔 거.”

“거기 빠졌었다고? 그 사내가? 왕의 아들이?”

“그뿐만이 아니야. 심지어 날 구해 주려고 한 거였는데, 나는 그런 분의 머리를 깨버리겠다며 물동이까지 집어던졌지 뭐야.”

‘그러고 보니 그 함정엔 영현군뿐 아니라 전하께서도 홍 내관과 함께 빠지셔서 곤욕을 치르셨었지.’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전하께서 자비롭게 넘어가 주셨으니 망정이지, 정말로 역모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말씀 없으신 걸 보면 벌하지 않기로 하신 거겠지. 뭐, 용서받았으면 장땡이지.’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정치화는 의녀가 두고 간 주의사항을 읽고 있던 백기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헌데 백 도련님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이세요?”

“간다고? 어디를?”

“응? 둘이 어디 안 가세요?”

“우리가 어딜 가야 하지?”

백기하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이번엔 세화를 향해 물었다.

“정말 어디 안 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우리가 어딜 가야 하는데?”

“아니, 난 네가 회임한 채로 인계까지 내려왔길래 좋은 것, 맛있는 것 찾아서 구경하려고 온 줄 알았지. 아니었어?”

“……아.”

차마 회임한 사실을 들키면 안되어서 도망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니고. 가뭄에 피해가 극심했었으니까……. 그냥 잘 복구되었는지. 사람들은 모두 건강한지. ……그런 것을 보러 온 거지…….”

“헉. 그럼 쉬러 온 게 아니라 네가 구한 나라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부족한 건 없는지 그걸 살피러 온 거였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정치화의 눈썹이 감동으로 꺾여졌다.

차마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던 세화가 눈을 피했다.

“……음. 뭐, 그렇기도 하고 ……천도재가 있다고 하니 그것도 도울 생각이었고.”

“천도재? 천도재 얘기를 하늘에서 미리 알았다고? 어떻게? 전하께서 서신이라도 보내셨던 거야? 인계에서 천계로 서신을 보낼 방법이 있어?”

“…….”

결국 말문이 막혔다. 백기하가 냉큼 지원에 나섰다.

“그것은 아니고. 그때 혈호에서 한 줌 핏물로 변한 시신들이 많으니 우리가 그 혼들을 위로해 주고자 한 것이지. 마침 천도재를 지낸다고 하기에 그것을 주관하기로 한 거고.”

“아, 세상에. 어찌되었건 저희들을 위해 일부러 와 주셨던 거군요. 이리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회임에 몸도 힘들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우릴 먼저 생각해 주다니. 세화 너한테도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너무 고마워.”

“그러게요. 역시 천인의 자비심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궁인들을 대표해 저희도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치화를 위시해 그곳에 있던 궁녀들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한 듯, 감동으로 일렁이는 시선들이 해일처럼 날아왔다.

“…….”

“…….”

세화와 백기하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어쨌거나. 그럼 세화 넌 이 이후 딱히 할 일이 없겠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갈 데가 많아.”

“갈 데?”

“응. 도성문을 나서서 서쪽으로 하루 정도 떨어진 곳에 의온산이라고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정상에 작은 우물과 전각이 있거든. 그 전각에서 하룻밤 별을 보고 우물의 물을 마시고 돌아오면 꼭 아들을 낳는다잖아. 하여 가뭄이 오기 전엔 그곳에 여인네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어.”

“난 딸이 좋은데.”

백기하가 그리 끼어들자 정치화가 눈을 빛냈다.

“딸이 좋으세요? 그럼 거길 가셔야지요. 저기 남쪽으로 이틀 정도 내려가면 아두 지방에 수관촌이라고 마을이 하나 있거든요. 그 마을 입구에 토끼처럼 생긴 작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를 만지고 돌아오면 꼭 예쁜 딸을 낳는다지 뭡니까.”

“정말인가?”

“그럼요! 이 두 곳은 하도 유명하여 그 영험함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오.”

“그리고 도성 동문 쪽에 을선사라고 절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오면 꼭 문제없이 순산한다지 뭡니까.”

“헉. 그런 곳이 있어?”

“예, 가뭄 때에는 치안이 무척 흉흉했지만, 지금은 관병들이 발 빠르게 정리하고 있으니 이왕 가실 거면 거기도 한번 들러보세요. 세화 덕분에 산천이 모두 회복되었으니, 지금은 낙엽이 불꽃처럼 타오를 때라 경관이 더 기가 막힐 겁니다.”

눈을 빛낸 백기하가 “그것뿐만이 아닌 듯한데, 혹시 아는 바를 모두 적어 줄 수 있겠나.” 하고 묻자 정치화가 단번에 대답했다.

“그럼요!”

하여 갑자기 작성된 ‘이 나라에서 꼭 가 봐야 할 곳’ 목록을 백기하는 진지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이왕 인계에 왔으니 좋은 것 맛있는 것 많이 보고 먹고 가. 알았지?”

“그래.”

뿌듯한 얼굴로 붓을 내려놓은 정치화는 그 후에도 한참동안 그들과 대화하다 돌아갔다.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온 세화가 여전히 방 곳곳에 놓인 주의 사항들이나 입덧이 시작될 시 먹을 만한 것들의 종류, 꼭 가 봐야 할 곳의 목록들을 보며 또 웃었다.

“왜?”

“고마워서요.”

“뭐가?”

“누군가의 일이 자기 일처럼 느껴진다는 게요. 부친상을 당한 그 애 앞에서는 차마 먼저 얘기할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좋아해 주다니.”

“좋은 동무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서 그대는 이 중에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야?”

“네?”

“방금 당신 친구가 길게 적어 준 것 있잖아.”

무슨 말을 하나 눈을 동그랗게 뜨던 세화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천도재가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왕은 저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공무를 보는데, 우리만 팔자 좋게 유람 다녀오겠다고 하기는 좀…….”

“오히려 왕은 우리가 궁에만 머무는 것 보다 좀 나가 주는 것을 더 좋아할걸? 내도록 여기 머무르면 얼마나 신경쓰이겠어. 그리고 내가 이미 내단을 줬어.”

“신수의 내단을 줬다고요?”

“응. 그것이 있으면 교룡의 파편이 얼마나 남았든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 그러네요. 그 생각을 왜 못했지. 진작 얼마라도 나눠줄 것을. 당신이 잘했네요.”

“그럼 나가는 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아직 가뭄의 흔적들이 모두 정비되지 않아 뭐 딱히 볼 게 없을 것 같은데. 정말 가게요?”

“응. 꼭 가야 해. 가서 꼭 만져야 해.”

“뭘요?”

백기하가 비장한 눈빛을 하고 대답했다.

“만지면 딸을 낳는다는 그 토끼바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