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2부) (251/254)

도성 사람들은 벌써 며칠째 천도재에 관한 화제로 들뜬 기색이었다. 언제 성익권에 대한 불만을 입에 올렸냐는 듯. 하늘이 우리 전하를 보우하신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뿐일까. 누군가와 마주치기만 하면 천도재 때의 상황을 반추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전하가 아니셨다면 우리 같은 범인들이 어떻게 천인들이 주관하는 천도재에 참석할 수 있었겠어. 그 신령스럽고 거대한 백호의 모습을 보고는, 나는 오금이 저려 나자빠질 뻔했는데 전하께서는 멀쩡하시더라고!

제문을 읊는 천인의 목소리는 또 어땠고. 그 고운 음성에 어찌 그리도 웅혼한 기운이 담겨있을 수 있지? 게다가 마치 그 천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처럼 하늘이 갈라질 때는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렸지 뭐야.

그 빛의 폭포가 제단을 향해 쏟아져 내라는 광경은 또 어떠했나. 우리는 운도 좋지. 아니라면 살며 어찌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었겠어.

목관과 제단 틈새로 작은 풀과 꽃들이 빼곡히 자라는 것도 보았지? 아 그럼 그럼. 당연히 보았지. 오래전에 꺾여 다듬어진 나무 기둥 위로도 여린 잎과 작은 열매들이 자라더라고.

희생자들의 유품과 관을 감싸 안는 것 같은 그 광경이 혼을 정말로 안식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 같아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자연으로 돌아간 거야. 이제 주위에 가득한 푸르른 것들 사이에서 편안히 쉬다가 또 언젠간 윤회에 들겠지.

이미 천도재 때 그것을 느끼고 펑펑 울었던 이들은 만나는 이들에게마다 같은 말을 번복하며 대화했다.

하지만 똑같은 말을 이미 백 번을 들었다 한들 그 화제는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거나 들을 만큼 들었다고 막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천도재에 참석지 못했던 궁인들은 세상 다시 없을 진귀한 광경을 목격하지 못한 것에 한탄스러워하며 참석한 이들에게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 졸랐다.

그렇게 누구 하나 이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불민한 소문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자 성익권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이불 위로 몸을 편히 눕혔다.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오늘은 일찍 쉬어야겠어.’

그런 마음으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눕긴 했는데.

“…….”

차라리 바쁘게 일할 때가 낫지. 깜깜한 방안에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들.

나에게도 그 천인들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흑룡의 파편 따위 단번에 밟아 소멸시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하늘을 열고 가엾은 영혼들을 인도하는 그런 능력들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판의 일도 이런 식으로 소란을 키우며 처리하진 않았겠지.’

깊은 한숨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이판이 이미 몇 개나 되는 파편을 손에 넣었다는 말에 마음이 급했다.

게다가 영현군에게 듣기로 사람을 죽여 파편에게 먹이는 방법으로 힘을 키우고 있다 하니 더더욱.

그것들을 사용해 또다시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일을 이 나라에 벌이게 될까 봐 겁을 먹었다.

하여 한시도 망설일 수가 없어 천도재를 열겠다 공표한 날 이판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무얼 더 생각해볼 시간 없이 일을 벌였다.

모든 문무대신들은 의무로 참석해야 했으니 저택은 비어있을 테고. 자신이 식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테니 식 이외의 상황은 방심할 거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사실 이판이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확실한 증좌를 모아 공정하게 수사하여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이판이 파편을 품에 안고 뛰어나오도록 영현군이 가져온 파편을 사용해 저택에 불을 크게 질렀고.

일부러 저택 내부, 불길이 닿지 않을 만한 지점까지 도성민들을 심어 두어 증인으로 삼았으며.

‘……다짜고짜 관병들을 앞세워 마치 역모라도 꾸미고 있던 양 이판을 거세게 몰아붙였지.’

막무가내식으로 그리 일을 진행시켜놓고나니, 뒤처리를 하고 있는 지금 커다란 자괴감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제 작디작은 깜냥을 모두의 앞에 까발린 기분? 혹은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듯한 수치스러움?

‘이 나라엔 위대한 대왕들이 많았는데. 내가 그런 그분들의 업적을 망가뜨리는 꼴이구나.’

장수들도 나라를 위해서 목숨 아끼지 않기를 당연시하는데.

‘나란 놈은 공정함보다는 일신의 안위에 급급해, 증좌도 모으기 전에 대신의 집을 태우고…….’

한숨이 깊어질수록 남자 천인과 함께 걸었던 그 난리 통 속 시간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혹시 어의를 불러 줄 수 있겠느냐는 천인들의 질문에 아예 궁에서 머무시는 것이 어떠한지 권유했고, 그렇게 궁까지 함께 걸어갔던 그 시간이.

눈 한쪽이 성익권의 머리보다 큰, 압도적인 크기의 신수와 함께 걷는 것은 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길거리에 늘어선 도성민들이 함지박만 한 눈으로 거대한 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내려서 걸을게요.”

여자 천인이 그렇게 말을 할 때마다 신수는 근육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그녀가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가 성익권이 안내한 궁의 전각의 앞에서 변화했다.

새하얀 털은 섬세한 자수가 놓인 새하얀 의복으로 바뀌었고, 길어진 검은 머리가 허공에 출렁임과 동시에 거대한 짐승은 장신의 사내로 변모했다. 허공으로 띄워 올린 여인을 두 팔로 가볍게 안아 들며 그가 물었다.

“그래서 내가 밟아 부순 그것이 교룡의 악기에서 나온 부산물이었다고?”

“예. 저희는 흑룡의 파편이라 불렀습니다.”

“그 난리를 겪고도 그걸 챙겨 두었다니. 인간은 정말 겁이 없군.”

“일부 무지한 이들의 짓입니다.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인들이 인간을 구해 준 일을 후회하게 될까 봐, 성익권은 곧장 그의 말을 부인했다.

“어쨌거나 그대로 두면 언젠가 분명 문제가 되었을 터인데. 잘 처리했구나.”

“저 역시 시간을 조금도 더 끌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급히 해결하긴 하였으나, 나머지 파편들도 모두 이판의 손으로 들어간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염려하던 참입니다.”

“그것은 이제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왔으니.”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나머지는 내가 해결하도록 하마.”

듣는 이를 절대적으로 안심시키던 그 음성. 성익권의 밤을 괴롭히는 것은 그 음성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왔으니.”

나도 내 나라 백성들에게 그리 말할 수 있다면. 힘들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그리 안심시키고 그리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평생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있지 않느냐.”

내가 해결할 테니 염려 말아라. 내가.

그 바람의 말을 입속에서 되뇌자니 문득 실소가 새어 나왔다.

‘감히 천인이 부럽다면 내가 미친 거겠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야겠구나.’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 아닌가.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지우려 눈을 감았다.

하지만 불은 꺼졌고, 밤도 깊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성익권은 또다시 아침이 올 때까지 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 * *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새벽이 찾아오면 그가 할 일을 해야 했다.

‘이런 모자란 왕도 왕이라고 따라 주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노력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가뭄이 끝난 이후부터 늘 그랬듯, 주변국에서 보내온 서신들이 탁자 위에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혹여 재앙이 자신들에게도 옮겨질까 두려워하며, 지난 가뭄 때는 성익권의 원조 요청을 모르는 척했던 나라들이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 천인을 뵙고 싶다고, 방문 요청을 해?’

마음 같아서야 어림없는 소리를 한다며 단칼에 잘라내고 싶었지만, 이는 엄연히 천인들의 일. 성익권은 이 일의 결정을 천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보고는 매시간 듣고 있었지만. 슬슬 직접 가서 뵙는 편이 좋겠지.’

그리 결정한 성익권은 천인들이 아침 식사를 마쳤다는 보고가 올라올 즘 해서 주변국들의 서신을 들고 대전을 나섰다.

홍 내관이 그런 성익권의 뒤로 바짝 따라붙으며 천인들의 상황을 보고했다.

“예판의 여식이 이 아침부터 와 있다고?”

“네, 하여 궁인들이 다과상을 풍성히 차려 올렸다고 합니다.”

허면 나중에 갈까.

그러다가 오후에 처리해야 할 일거리가 산적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뭔가 요구하시거나 불편하게 느끼시는 듯한 것은 없고?”

성익권은 천인들을 위해 가장 정원이 아름다운 별궁 하나를 비웠다. 대접 역시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천인들의 취향은 소박했다. 그들은 보통 전각 안에만 머물며 모습을 보이는 일도 거의 없었고, 요구 사항이 없어도 너무 없어 궁인들이 오히려 모시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했다.

“예, 전하. 늘 괜찮다고만 하시고, 시중조차도 때론 물리치시니 궁인들의 손이 제법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준비하라 이른 것들은? 어의에게도 기별하였지? 오늘 아침 명했던 것들도 모두 전달하였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주변국에서 친선의 의미로 보내온 선물 중에 회임한 이에게 좋은 약재가 있어 준비해 둘 것을 이른 참이었다.

빠르게 걸어 천인들이 머무는 전각에 도착하자, 저 멀리 어의가 준비된 약재함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함을 열어 내용물의 상태를 확인한 성익권이 곧장 내관을 시켜 고하게 했다.

입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 천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방 한쪽엔 예판의 여식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서 있었다.

다과가 풍성하게 올려진 상이 둘의 앞에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놓여 있었다.

성익권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어의에게 받은 함을 앞으로 밀어 놓았다.

“어쩐 일인가. 이건 또 무엇이고.”

“안행국에서 회임하신 분께 도움이 되는 약재를 보내왔기에 가지고 와 봤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복용해보시지요. 어의가 자세한 효능을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맥을 다시 짚고 복용법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문 앞에서 대기 중인 어의를 향해 눈짓했다.

그때였다. 평소라면 성익권이 왔을 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예판의 여식이 갑자기 천인을 가리키며 입을 막았다.

“너…….”

잠깐의 정적 후 여자 천인이 미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화가 단번에 달려가 천인을 끌어안았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으면서 나한텐 말 한마디 안 하고! 왜 이 좋은 일을 이렇게 늦게 알려 주는 거야!”

“천도재도 있었고-. 넌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나만…….”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텐 이것도 내 일이라고!”

“그래도.”

“네가 내 일에 그러했듯 네 일도 내 일이라니까. 게다가 네 아이면, 내 조카나 다름없는데!”

조카라는 단어에 성익권이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슬쩍 천인을 살피고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여자 천인의 손을 잡고 좋아하던 예판의 여식이 그제야 그런 성익권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송, 송구합니다, 전하. 너무 기쁜 소식에 놀란 나머지…….”

“괜찮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성익권도 좀 어색하긴 했다.

이래서 예판의 여식이 와 있는 시간은 피하려 한 것이다. 천인이야 둘에게 공평하게 하대를 한다지만, 그런 그녀에게 예판의 여식은 평대를 하고 그는 존대를 하자니.

‘함께 있는 자리가 이보다 더 불편할 수 없구나.’

본래는 주변국의 초대 서신에 대해서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직접 묻고 답을 받으려 하였으나…….

‘딱 봐도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지금.’

하여 그는 눈치껏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흠흠. 하오면 저는 동무와의 대화를 방해치 않도록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의도 함께 왔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니 언제고 불러 약재에 대한 설명을 들어 주십시오.”

“신경 써 주어 고맙다.”

“아닙니다. 제 기쁨입니다. 그럼 예판의 여식도 머물다 가시게.”

“예, 전하.”

그렇게 성익권이 나가고 나자 방 안쪽에선 다시 돌고래 비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가 들어선 지 얼마나 되었는지. 천인의 아이는 배 속에 얼마나 있다가 태어나는지.

그런 것들을 묻는 목소리가 높고 즐거웠다.

‘어쨌거나 저 예판의 여식이 있는 이상 천인들의 기분은 딱히 염려치 않아도 되겠어.’

돌아서는 성익권의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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