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병들의 수신호라던가. 교대 시간 등을 미리 숙지한 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동생에게 모두 서신을 남겼지요. 필요 최소한의 것 몇 개를 짐으로 챙긴 뒤 미리 정해 둔 길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헌데 하필이면 그날 교대 시간이 바뀌었지 뭡니까. 제가 숨어 있는 곳 주변의 궁병들이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요? 들켰나요?”
제 대답이 너무 성의 없이 들리지는 않기를 바라며 치화가 대충 대답했다.
“들키긴 들켰지요. 헌데 그자들에게 들킨 게 아니라 당신 아버지에게 들켰습니다.”
……누구라고?
“제 아버지요?”
“예. 몰래 빠져나가려다 들킨 후 망했다고 두 눈을 질끈 감는데, 그분이 끌고 온 말로 날 가리더니 자신의 하인이라며 그 자리를 무마시켜 주더군요.”
“아버지가 ……왜.”
‘잠깐. 나 지금, 영현군이 궁을 나가는데 내 아버지가 한몫했다는. 그런 얘기를 듣고 있는 건가?’
“그분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제게 그런 말을 하시더군요. 자기도 소중한 이를 위해 악역을 자처한 적이 많다며. 스스로 적군이 되는 경험을 알고 있다고.”
“…….”
“대범하게 궁을 떠나기로 하긴 했지만 그땐 나도 어렸으니. 내 속에도 어떤 서러움이 있었나 봅니다. 그 얘기가 뭐라고, 그 말 몇 마디에 내 속을 다 알아준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날 떠나며 주책없이 펑펑 울기도 했고요.”
그때 나를 감춰줬던 그 순간이 내게 빚으로 남았었다고.
그리 말하는 영현군을 치화는 속이 시끄러웠던 것도 잊고 잠시 응시했다.
목소리에 담긴 일말의 그리움과 어떤 존경같은 것이 그녀에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참 이상하네요. 나한텐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존경이라니. 제 아버지와 한번도 연관시켜볼 수 없었던 단어다.
치화가 그랬던 것처럼, 영현군 역시 그 대답에서 치화가 담아낸 어떤 자조같은 것을 알아챈 듯 했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물었다.
“정말입니까?”
“……예?”
“정말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냐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중한 이를 위해 스스로 적이 되었다는 말. 그거 분명 본인의 이야기였기도 했을 거라서.”
“…….”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는지.”
정치화의 표정이 뚱하게 가라앉았다.
‘뭐야. 그때 한번 마주쳤다고 해놓고 뭘 안다고 저런 말을 한담. 그럼 내 아버지를 내가 모르겠어? 내 아버지는 분명…….’
객관적으로 보아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항상 가족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권력욕이 우선이었고,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데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래. 사람을 그리 많이 보냈는데도 사신 접대가 더 중요하다며 늦은 밤 귀가하셨었지.’
머릿속을 낱낱이 뒤져봐도 그와의 좋은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아바마마께 뭐 한 가지를 들은 듯합니다만.”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영현군이 별것 아닌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남장을 하고 집을 나가 살았다지요? 그림을 그리며, 도성 안에서.”
“그게 왜요?”
“정말로 당신 의사와 관계없이 혼인시킬 생각이었다면 당신이 그러고 있을 때 강제로 끌고 가시지 않았을까요?”
“…….”
“내 사실 백정들과 어울리며 소문을 또 주워들은 것이 있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나가 그린 것이 춘화였다지요?”
“!!”
“사실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것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예판이 강제로 당신을 데려가는 상황이 생겼을 때 아버지의 위신을 깎기 위함이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체면이 중요할 아버지가 미리 당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거나.”
제 속내를 그대로 읽어 낸 듯한 남자의 말에 정치화가 놀라 입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을 놓아둔 것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라고 놓아두신 것 같습니다. 딸을 팔아넘길 생각만으로 가득한 아비가, 여식이 남장을 한 채 학관에 다니게 하고. 같은 도성 안에서 춘화 같은 걸 그려 판매하는 것을 놔뒀을 리가 없으니까요.”
“…….”
“내가 굳이 의미를 두어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내 말에 그다지 마음 두지 마세요.”
“…….”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치화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다가 분명 그냥 일이 바빠 그녀를 신경쓸 새는 없었던 것일테지만.
‘사실이 아니라는걸 알아도 뭔가 저리 말을 하니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네. 하긴. 예전에도 아버지가 날 무척 위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으니까.’
예전 제 아버지는 친척들이 그리 후처를 들이라 강요해도 그러지 않았다.
재취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딸아이가 혼인할 때까지는 하지 않겠다고 못박기만 했고.
그때도 친척들은 아버지가 널 아껴 저러지 않냐며 아버지께 잘 하라는 등 오지랖을 부려댔다.
하지만 그렇게 선언한 딸에게 가져온 혼처가 못내 황당한 곳이라 딸을 아껴 그런말을 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 자신의 혼사마저 내 혼사를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며 투덜대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혼인만 하면 지참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두둑이 준비할 것이라고 여러번 언급하시긴 했다.
아들을 얻으려면 하루라도 더 빨리 혼인하라는 충고에도 후계자 역시 딸아이의 혼인 이후 낳겠다 선언하셨었고.
‘다른 집 같았으면 지참금 배분에 문제가 생길까봐 부친께서 신경쓰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뭔가를 떠올리다말고 치화가 잠시 멈칫했다.
“…….”
그러고 보면 제 아버지는 공부가 하고 싶다는 그녀를 위해 남장을 한 채 학관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녀가 집을 나갔을 땐 같은 도성 안에 있으면서도 다시 데려오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고.
아버지가 그녀를 억지로 다시 끌고 온 것은 세상이 흉흉해지고 저자에 예판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였다.
“…….”
그녀가 손에 닿는 것을 아무렇게나 앞으로 내던졌다.
작은 돌덩이가 난장판이 된 정원 한구석으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혼사를 결정했는지 이유라도 따져 물어볼 것을 그랬나.’
작은 돌 하나를 다시 집어서는 또 한번 앞으로 내던졌다.
탁탁 소리를 내며 앞으로 굴러간 것이 담장 옆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
‘말이 안통한다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오기 전에 붙잡고 따져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겠다고 춘화같은거 그리지 말걸 그랬나.
기우제로 인해 압박이 심하셨을텐데. ……잡혀오기 전에 집에 미리 돌아와 있을걸 그랬나.
시간이 많을 줄 알고 시도해보지 않은 사이, 이제 연유를 물어볼 수도 없어졌다.
……그래.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것을 떠올리는 동안 뾰족하게 깎인 눈꼬리 사이에 고이는 과정도 없이, 눈물이 급작스레 왈칵 넘쳐흘렀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이 눈물의 이유를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번 쏟아내기 시작하니 멈추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사이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여 치화는 마음놓고 끅끅 숨을 삼키거나 아이처럼 통곡하기도 했다.
황폐해진 정원수 사이에 치화의 울음소리가 눈처럼 쌓여갔다.
담장 밑 어둠 사이에 가만히 선 남자가 언제까지고 주저앉아있을 것 같은 치화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함께 했다는 건 끝까지 알 수 없었다.
* * *
두 번째 천도재가 진행되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하늘이 몹시 청명했다.
이미 이번 천도재는 다시 강림하신 천인이 주도할 것이라 저자에 뺴곡히 방이 붙은 이후였다.
파격적인 그 결정에 성익권뿐 아니라 도성민들도 완전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격하게 환영했다.
천인이 주도하는 천도재라니.
말만 들어도 먼저 보낸 가족과 친지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는 느낌이었다.
거의 모든 이가 참가하고 싶어 몰려들었고, 미리 그것을 예상한 성익권 덕에 천도재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런 일에 결코 세화를 혼자 보내지 않는 백기하까지 백호의 모습으로 참여했다.
하여 사람들은 그날 거대한 백호가 신비롭게 하늘을 걷는 모습이나 성스러운 빛이 은혜롭게 제단 위로 쏟아지는 장면 등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정치화와 영현군도 있었다.
제식을 마친 세화의 시선이 종종 그들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백기하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건넸다.
“그녀가 신경 쓰여?”
“좀, 그렇긴 해요. 후회가 많이 남은 것 같아서.”
“음.”
“저 아이가 너무 오래 슬퍼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친우에게 그대가 옆에 있을 거라는 걸 알려주었으니,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을 거라고. 그러니 필요할 때면 언제든 부르라고. 그대가 그렇게 얘기했잖아.”
고개를 끄덕인 세화가 백기하의 어깨에 제 몸을 기댔다.
준비되지 않은 헤어짐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이전 생에서 그녀도 많은 이들을 잃어 본 적 있지 않은가.
세화는 저 친구가 홀로 너무 후회를 곱씹진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헌데 내가 볼 때는 말이야. 그 친구한테 슬픔을 나눠 짊어져 줄 누군가가 곧 생길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어? 당신도 그렇게 느꼈어요?”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들에게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마침 또 영현군이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고, 정치화가 그에 대답하고 있었다.
둘의 표정은 가족을 잃은 이들답게 슬프고 가라앉아 있었으나 또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무어라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세화가 백기하를 잡고 조용히 돌아섰다.
분명 치화는 천도재가 끝나면 이제 두 번다시 저 남자와 엮일 일은 없을거라 말했건만.
어쩐지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전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