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
그 부름이 신호처럼 관병들이 더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 또 한 발.
당장이라도 목함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이것을 빼앗긴다고? 주상에게?
‘안 돼.’
상식적으로 주상이 이것을 가져가겠다고 관병까지 동원한 이상 자신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생각만으로 발밑이 꺼지는 듯한데 어찌 그 명을 따르랴.
이 파편을 잃으면 이제 다시 얻을 수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실뿐이었다.
잔병치레 한번 없이 건강하던 이도 당장 내일의 명을 장담할 수 없었고, 살고 죽는 것은 오직 하늘의 손에 달린 것이라 떠나는 데에도 순서가 없었다.
이 파편만이.
자신의 몸을 과거의 시간으로 돌려놓고 있는 이 귀보만이 오직 그 순리에서 자유로웠다.
그런 것을 뺴앗겨야 하다니. 이것만 있으면 영원히 사는 것도 가능할 것을.
자신은 이미 노쇠하였다. 이것을 잃는다면 당장 내년의 생도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절대 그럴 순 없어.’
빼앗길 수 없고, 넘겨줄 수도 없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다. 저 주상도. 영현군도. 다른 그 누구도.
함을 부둥켜안고 몸을 떨던 이판이 천천히 품안의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검은 조각을 꺼내 손에 쥐었다.
어지러웠던 시야가 맑아지고 몸의 떨림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땅을 밟고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마치 공중에 떠오르기라도 한 듯 몸이 가벼웠다.
‘천수를 누린다 한들 내게 남은 생이 몇 년이나 될까. 천명대로 살아야만 한다면 내 호시절은 떠올리기도 힘들게 멀리 떠나버린 것을.’
이판이 검은 기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듬으면 보듬을수록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듯 하던 검은 기운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들끓었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먹이를 달라고.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저놈들을 다 죽이자고 그렇게 속살거리는 듯 했다.
저도 모르게 이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를 잃고 고작 몇 년의 생을 버느니, 차라리 그 외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어떻게든 달아나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리라!’
이윽고 정면을 응시하는 이판의 입꼬리는 야트막한 곡선을 그리며 꺾여있었다.
그가 성익권을 향해 물었다.
“이것의 본래 주인이던 흑룡이 수천의 사람을 집어삼켜 힘을 키웠다지요?”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목숨을 더하면 얼마나 더 힘이 늘어나게 될까. 심지어 임금의 목숨까지 더해진다면.’
“제가 이것을 손에 넣은 후 계속 궁금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이판은 들고 있던 조각으로 제 팔을 그어내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피에 조각을 가져다댔자 붉은 혈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디 전하께서 제 궁금증의 답이 되어 주십시오.”
자, 입맛을 달궈 주었으니 마음껏 배를 채워 보거라.
그와 동시에 조각이 이판의 생각에 곧장 반응했다.
마치 스스로를 태우듯, 한 뼘 높이로 일렁이던 검은 연무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태양처럼 뜨거운 불꽃을 뒤덮을 정도로 자라나며 저택을 뒤덮었다. 주변의 푸릇한 풀들은 계절을 되돌리기라도 한 듯 누렇게 말라 죽었다.
마치 바로 얼마전 겪었던 그 가뭄 때처럼.
“안돼! 모두 막아라! 이판을 당장 포박해!!!!”
이판이 하려는 짓을 눈치챈 성익권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이판!”
그때였다.
-……!!!!
“!!”
갑자기 귀를 찢어 낼 듯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위압적으로 덮쳐들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 그들을 향해 몰아닥쳤다.
“읏!”
바람은 조각이 만들어 내는 연무를 가르며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은 연기를 삽시간에 날려버렸다.
절대로 꺼지지 않을 듯 하던 붉은 화마가 강풍에 실린 기운을 견디지 못하며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읏!”
그렇게 돌풍을 간신히 버티다 눈을 떴을 때였다.
연무가 지워지고 드러난 달빛 아래엔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눈처럼 새하얀 털이 있었따.
“!!!”
“히익!!”
차디찬 밤공기 사이에서 날카로운 형태의 새파란 눈과 마주친 이들이 두려움에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너른 용마루를 소박하게 만드는 거대한 백호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실신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 성익권을 향해 백호가 말을 걸었다.
“미안하네. 이렇게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여인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너무 미안한데. 내가 뭔가를 깨트린 모양이야.”
“……예?”
그제야 성익권의 눈에 백호의 등에 타고 있는 붉은 옷의 여인이 보였다.
찌푸린 여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성익권의 시선 또한 자연히 아래로 내려갔다.
비장한 얼굴로 모두를 죽일 살기를 뿜어내던 이판과, 이판이 들고 있던 조각이 백호의 발 아래 밟혀있었다.
조각은 신수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후 한줌 먼지로 화해 흩어져버렸다.
성익권은 멍한 얼굴로 그 먼지를 한 번. 여인을 한 번. 다시 먼지를 한 번. 여인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세화가 제법 곤란하고 미안한 얼굴을 하며 덧붙였다.
“산산조각이 나 다시 붙일 수도 없겠군. 보상하겠네.”
“…….”
……맙소사. 천인이 또 왔다.
* * *
그 난리통을 수습하느라 합동 천도재는 일주일 뒤로 연기되었다.
사람들은 아쉬워하였으나 본래부터 이판을 잡을 덫으로 가짜 예식을 계획했었던 성익권과 영현군은 더욱 정성스럽게 진짜 천도재를 준비했다.
비록 영현군의 짓이긴 했지만, 이판의 창고 안에서는 소문을 입증할 만한 인질들이 아주 많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가뭄의 원인이 이판이었다는 말을 모두 믿게 되었다.
더불어 치화를 둘러싼 여러 소문도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고.
저를 둘러싸고 있던 문제들이 해결된데다 아주 오랫동안 못 볼 줄 알았던 친구까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았나.
그것이 분명 기쁘기만 해야 할텐데.
“…….”
식사도 거른 채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있던 그녀는 어느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목숨을 위협하는 이도 없어 하인들도 모두 일찍 쉬라고 들여보낸 탓에 저택은 온통 고요하기만 했다.
그 고요를 참지 못해, 결국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 밤에 어딜 가겠는가.
딱히 갈데가 없어 저택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함정을 파느라 난장판이 된 담장을 따라 걸어서는, 온통 흙을 들쑤셔 놓은 어머니의 정원을 돌아보았다.
침입자를 막겠다며 구덩이를 팔 때는 아무생각도 없었는데 뒤늦게 이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수습을 어떻게 하면 될지 생각하며 걷다가, 그냥 주변의 나무둥치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았다.
그 난리통에 제가 한 일이라고는 함정을 점검한 정도밖에 없으니 딱히 끝나고 뭐고 따질 일도 없는데.
‘그간 너무 긴장하고 있던 탓인가.’
뭐가 이리 진이 쭉 빠진 것처럼 정신이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화도 그것을 배려했는지 짧은 인사와 함께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오늘은 쉬라고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치화는 늘어뜨린 손 끝에 닿는 돌 하나를 주워 아무렇게나 던지다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상하게 좀 우울하네.’
그래도 방안에 있는 것보단 좀 나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할 의욕이 나지 않아 멍하니 땅 위를 지나는 개미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지런히 땅굴을 파내는 모습이 얼마전 제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같은 자세로 있었을까. 조용히 다가온 누군가가 대뜸 치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합니까.”
“깜짝이야! 뭐, 뭐예요?”
어느새 처음 만난 날과 똑같은 잿빛 장포를 걸친 남자가 제 옆에 와 있었다.
“당신, 왜 또…… 가 아니라. 영현군께서 이 시각에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오늘도 그냥 들어왔는데 이제는 관병을 부르니 어쩌느니 하지 않나 봅니다.”
“그때는 ……몹시 실례하였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막 여의고 경황이 없어 도통 예의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됐습니다. 그냥 잘 있는지 확인은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온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조금 이러고 있다가 알아서 가려니까.”
당신이 나를 왜 신경쓰냐고 물으려다가 성익권에 생각이 미쳤다.
‘뭐 전하가 아니어도 굳이 알 바인가. 어차피 이후엔 볼 일 없을 사람인데.’
괜히 이 작자와 얽혀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치화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헌데 함정에 빠뜨린 채 머리통을 깨느니 어쩌니 하는 대화를 나누던 상대와 나란히 앉아있으려니 그게 얼마나 어색하던지.
“그럼 계시다 가십시오. 저는 날이 찬 것 같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참다 못한 치화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내가 빚이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합니까?”
“예?”
“왜 그때. 밧줄을 내려달라 했을 때. 빚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뭐지? 그런적이 있었었나?
“지금 사람을 자꾸 무도하게 매도하는데 나는 무슨 짓을 하러 온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빚이 좀 있어서.”
“아. 네. 생각이 나긴 나네요.”
그게 뭐?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 아니었어?
“헌데. 저는 영현군을 이전엔 한번도 뵌 적이 없었는데, 대체 제게 무슨 빚이 있다고 하시는…….”
“당신이 아니고요.”
정치화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영현군이 피식 웃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상대에겐 별것 아니고 특별할 것 없는 일인데, 들은 사람만 오래도록 곱씹고 생각하게 하는 얘기 같은 것들.”
“…….”
“내 출생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여전히 반쯤 몸을 일으킨 자세를 하고 있던 정치화가 엉거주춤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앉았다.
“……아니요.”
출생……. 아직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못내 어색한 것이. 이후 얼마나 숨 막히는 내용이 나올지 조금 염려가 되었다.
“왕후께선 몸이 약해 아이를 가지실 수 없을 거란 말을 자주 들으셨지요. 하여 어미를 잃고 태어난 불쌍한 저를 당신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아, 네.”
“제 세자 직위도 어마마마께서 원하셔서 받은 것인데. 그분께선 그때까지 까맣게 모르시고 계셨지요. 그 이후 팔 년이 지나면 그토록 원하는 당신 소생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걸.”
“…….”
“헌데 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제게 얼마나 잘해 주시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동생에게 갔어야 할 그 자리를 계속 갖고 있지는 못하겠더군요. 하여 아예 궁을 나가 버리기로 했습니다.”
좋은 기억은 아닐 텐데. 그날의 일을 생각하는 영현군의 표정은 그리 어둡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