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저택을 뒤덮은 화마가 선명해졌다.
저택 마당은 불길을 잡으려 물동이를 쥐고 달려가는 이들과 귀중품들을 밖으로 꺼내는 하인들로 엉망이었다.
“대, 대감마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그, 그게 갑자기 전각에서부터 불이 붙었습니다. 어떻게든 불을 꺼 보려고 하였으나 쉬이 불길이 잡히지 않아서.”
“쓸모없는 것들! 비켜라!”
이판이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말리는 이들을 헤치며 제 거처를 향해 뛰었다.
“콜록콜록.”
불길이 얼마나 센지,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온통 달아올랐다. 제가 봐도 불길을 잡긴 그른 것 같았다.
도성민들의 불온한 시선부터 불이난 시점까지. 모든 게 다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체 갑자기 그 짧은 시간에 불이 왜!’
대청을 밟고 올라선 이판이 빠르게 방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절대 그것만은, 그 조각만은 포기할 수 없다.
온 벽을 둘러싼 불꽃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간 이판이 간신히 품안에서 열쇠를 꺼내 여러개의 자물쇠를 풀었다.
장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목함을 어렵게 꺼내 품에 넣자, 격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불꽃의 열기때문인지, 연기를 마셨기 때문인지 어지러워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내달렸다.
중문을 걷어차곤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콜록. 커억!”
몸을 둥그렇게 만 이판이 기침하며 숨을 몰아쉬는 사이 하인들이 달려와 그의 옷에 옮겨붙은 불꽃들을 두드려 껐다.
그걸 느낄 새도 없이 목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함이 열려졌던 흔적은 없었고, 검은 귀기가 흐릿하게 퍼져있는 것도 여전했다.
조금도 상처입지 않은 목함을 이판이 거세게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어디선가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떄였다.
웃음소리? 이런 때에?
이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택 대문께에 붙어 이쪽을 보고 있던 남루한 행색의 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을 봤나. 불길이 이리 큰데 화마를 제압하는데 손을 보태지도 않고 서있기만 해?’
게다가 저들끼리 뭐라 소근대며 웃기까지.
“저 천것들은 대체 누가 데려온 것이냐!! 전부 끌어내거라!”
혹, 품안의 목함에 다른 이의 손이 닿기라도 할까봐 하인의 부축마저 거절한 이판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며 호통쳤다.
하지만 그 호령을 들으면서도 남루한 몰골을 하고 있는 자들은 겁을 먹은 기색조차 없었다.
아주 간을 배 밖에 둔 것이 분명했다. 죄다 잡아 파편의 먹이로 삼으리라.
이판이 저를 부축하려는 하인들의 팔을 거세게 뿌리치며 다시한번 호통쳤다.
“빨리 저놈들부터 모조리 문밖으로 던져버리래도!”
그 순간이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그러지 말아주게.”
남루한 이들을 헤치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옥색장포를 입은 미남자였다. 화사한 색감의 장포가 그의 외양에 잘 어울렸으나 그걸 보는 이판은 이상함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국장이 있는 날이고, 그것도 그냥 국장이 아니라 전 도성민이 참가하는 합동천도재였다. 저런 화려한 의복을 걸치는 날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뭐지 이놈은?’
입은 행색을 보아하니 양반가의 자제이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이조판서 김흥수였다.
어디 감히 주제도 모르는 이런 젊은 놈이 하대한단 말인가.
“니놈은 대체 누구길래 겁도 없이 내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느냐. 게다가 어찌 이리 무례하게 지껄여?!”
“그건 뭐 대감이 알바 아니고.”
“뭐라?”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대감 품속의 그 목함이거든. 대체 거기 뭐가 들어있는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나서게 되었지.”
“!!”
“공손히 물으면 알려주시려나요. 이판 대감.”
어느새 이판에게 바짝 다가온 남자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 목함을 쥔 이판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난 불도 그렇고. 주변을 둘러싼 저 천것들도 그렇고.
식솔이 몇인데 저택을 둘러싼 불이 저리 진압되지 못하고 번져간 것도 이상하고.
갑자기 나타나 대뜸 하대하는, 정체를 모르는 눈앞의 젊은 놈도 그렇고.
‘게다가 호위가 오지 않는다.’
그래. 아무리 빠르게 말을 달려 제일 먼저 도착했다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늘 달고 다니던 호위들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저택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서 모두 제압된 거야.’
……그렇다면 저택이 포위된건가? 하지만 누가?
‘뭐가 됐든 일단 몸을 피하는게 낫겠어.’
“여봐라!”
그가 불길을 잡고 있던 하인들을 불렀다.
“이미 불길을 잡긴 틀렸다! 그러니 너희는 가서 저기 서 있는 것들부터 전부 포박해라. 당장!”
“그냥 서있었을 뿐인데 포박이라고? 정말 너무 하는데.”
다시금 들려온 건방진 하대에 이판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판이 죽은 지금, 이 도성에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는 많지 않았다. 헌데 어찌 이런 젊은 놈 따위가 감히 방자하게 군단 말인가.
그럼에도 이판이 이만큼 참고 있는 것은 이 기이한 불에 혹 눈앞의 발칙한 놈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인들을 그리 다그쳤음에도 명에 따르는 놈이 없었다.
마치, 주인보다 우선시하여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나서지 말라 미리 언질 받기라도 한 것처럼.
“재해 앞에서 손을 보탤 생각은 않고 남의 집 귀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보니 필시 제정신으로 사는 놈이 아니겠구나. 네놈은 대체 누구길래 주상께서 보듬으시는 도성안에서 이리 당당히 도적질을 하려 드느냐?”
“난 그냥 그게 무엇인지 물었을 뿐이지 않나. 그런데 이판이 먼저 이리 내 속을 살펴주다니.”
벼린 날처럼 스산하게 꺼내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남자는 그닥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헌데 어쩌겠나. 품에 그리 소중히 안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엄청 대단한 것이 들어있을 듯 한데. 그런걸 보면 도대체 안에 든 것이 무얼지 정체가 궁금해지는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피식 웃은 남자가 목함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저를 보며 칼을 들이대는 것보다 목함에 직선으로 닿는 저 시선을 더한 위협으로 느낀 이판이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났다.
남자가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판이 한발 다시 뒤로 물러났다.
혹여 이 목함을 정말 빼앗기기라도 할까봐 목 안이 바짝 말랐다.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대놓고 이 지랄을 벌인 것을 보면 네 뒷배가 꽤 좋은 듯싶지만 그게 누구라 한들 나 김흥수와 대적할 순 없을 것이다. 네 아비가 누구건 간에 반드시 내 발아래 기는 꼴을 보여줄 것이다.”
“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위험할텐데.”
“위험? 너야말로 도무지 네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구나! 여봐라! 아직도 명을 시행하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냐! 반은 나를 지키고 반은 어서가서 저 무도한 놈들을 내집에서 끌어내거라!!”
그 순간이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
그 말과 동시에 어쩔줄 모르고 서있던 하인들을 포함해 그곳에 있는 모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이판만이 움직이지 못하고 선 채 그를 불렀다.
“전, 하?”
천도재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주상이 왜 지금 여기에?
“저, 전하. 어찌 이런 곳까지 행차하셨나이까.”
“왜 굳이 묻는가. 자네 스스로가 이미 알텐데.”
“소신, 아둔하여 잘 모르겠나이다. ……화마 진압을 살피러 와주신 겁니까.”
“그것 참 이상하군. 조금 전 내 아들이 귀띔하는 것을 내가 분명 들었는데.”
“예?”
아들이라니? 세자는 분명 가뭄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그래서 오늘 국장이 열리는 것인……,
생각을 이어가다 말고 이판이 눈을 크게 떴다.
‘영현군이 돌아왔다고? 저 자가 영현군이었어?’
경악한 이판의 시선과 마주하며 옥색 도포를 차려입은 남자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감.”
“영현……군이셨습니까. 제가 몰라뵙고 실례를 했군요.”
하지만 아무리 영현군이라 하여도 그래봤자 고작 무수리의 아들 아닌가.
제 동생이 죽자마자 그 빈자리를 꿰차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돌아온 듯 한데.
‘귀궁할 때 면목이 있어야 하니 날 제물로 삼았다, 이건가? 헌데 무슨 죄목으로. 설마 저자에 떠도는 헛소문을 믿고 이 짓을 벌이기라도 한거야?’
너무 기가 막히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넘쳐 나는 살의를 애써 갈무리하고 있는데, 영현군이 그런 그에게 불쑥 다가왔다.
“뭐. 내게 한 실례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목함을 가져가야겠습니다.”
“!”
“그리 궁금해하던 내 뒷배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짐작하신대로 오늘 당당히 도적질을 좀 해보려 하니 목함부터 내놓으십시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이판이 목함을 터뜨릴 듯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것은 제 생명수였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었다.
서늘한 낯빛을 한 성익권이 그런 이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판. 그 함을 내놓게.”
“……전하.”
“어서.”
“전하. 이것은 제 부모의 유품입니다. 어찌 유품을 내놓으라 하십니까?”
“불필요한 시간을 끄는 구나.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은가. 이리 주게.”
“갑자기 나타나 어찌 제것을 이리 당당히 내놓으라 하십니까. 아무래도 오늘 일들중 우연은 하나도 없는 듯 한데 이 불은 뭡니까. 이 불도 전하께서 하신 일입니까? 그 다음은 뭡니까. 이걸 바치지 않으면 저를 역모죄로 다스리기라도 하실 참이십니까?”
“이판.”
“제가 이 나라 조정에 충성을 바쳐 온 세월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제 헌신을 조금이라도 기억하신다면 갑자기 나타나 막무가내로 유품을 내놓으라는 이런 참담한 일은 결코 하셔선-,”
“이판! 그것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물건이야! 자네야말로 그런 삿된 것을 탐해 놓고, 뭐가 어째?!!!”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익권이 성큼 다가섰다.
“내 분명 말했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고. 그것 뿐이냐! 자네가 그것의 힘을 키우기 위해 내 백성의 피와 살을 발라 먹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깟 재앙의 파편을 위해! 결코 존재해선 안될 악의의 편린을 위해! 이 나라를 위하고 조정에 충성을 바쳐야 할 정이품 육판서란 자가 끔찍했던 가뭄에 도성민들을 살릴 생각은 없이 갖가지 방법으로 제 배를 채웠다는 사실도 황당한데, 당장 없애야 할 재앙을 보물로 여기며 간직해?”
“……전하.”
“두말하지 않겠다. 당장 그것을 이리 내놓거라!”
“싫습, 아니, 그리할 순 없습니다.”
“이판!”
“안됩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이판이 고개를 저었다.
“전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 목함 안에 든 것은 말씀하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힘을 주고 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아주 귀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불온한 자들이 저희를 이간 붙이려 퍼뜨린 말만 들으시고-.”
“이판!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내놓아라!”
“…….”
“내놓아!”
성익권의 그런 외침에 관병들이 그를 둥글게 둘러쌌다.
이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