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래서 기회만 보고 있던 중 마침 이판이 저 흑룡의 파편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람같지 않은 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얼마나 아끼는지, 다른건 몰라도 저것으로는 덜미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증거는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아 몇 개 직접 만들어 보태보았습니다. 작은 물건 몇 개를 보탠 것 뿐이라 아바마마께서 아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증거라니? 작은 물건이 뭔데.”
“…….”
조용히 눈을 내리깐 영현군이 바ᄍᆞᆨ 마른 입술을 조금 핥았다.
“뭐냐고 묻지 않느냐.”
“……그게 그러니까. 그냥 작은 물건입니다.”
“정확히 대답하거라.”
“그게……정확히는, 그러니까 조그마한 포대인데.”
“포대?”
“예. ……마침 소자가 잡은 이판의 수하가 몇 명 있어서 끌고 다니던 중이었는데, 그것도 조금 하다보니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지던 참이라.”
“참, 이라?”
“……하여 놈들 주인의 창고에 잘 돌려주고 온 것입니다. 포대 자루에 잘 쑤셔 박아 둔 터라 쉬이 들키진 않을터인데다가 말씀드렸다시피 그 파편이 혈액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까. 닭피든 돼지피든 칠갑을 해두라 하였으니 만인의 앞에서 직접 먹히면서 증거 역할을 톡톡히 할 것입니다.”
“…….”
성익권이 멍하니 저를 보기만 하자 영현군이 황급히 변명했다.
“일반 백성이 아닙니다. 백정 촌민들을 계속 납치해 잔혹하게 난자한 후 파편의 먹이로 삼은 천인공노할 놈들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공포를 직접 경험하게 해주어야-,”
“아니, 아니. 잠깐. 그래. 그 수하라는 놈들이 신인공분할 놈들이라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너, 내게 작은 물건 몇 개라고 하지 않았어?”
“사람은 접으면 작아집니다. 아바마마.”
“…….”
“고작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것만으로도 요만한 포대에도 넣을 수 있는걸요.”
“…….”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해서 잠깐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던 성익권이 벌떡 일어나 달려와 체통도 잊고 그의 등짝을 퍽퍽 때렸다.
“제정신이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들을 해!”
“무슨 생각이라니요? 아바마마. 제가 죄 없고 착실한 이를 괴롭히고 있는게 아닙니다. 이판의 행실에 대해선 아까 다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넌 떳떳하다 이거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고. 그가 정도를 아는 선에서 일을 벌였다면 저도 그저 눈을 감고 넘겼을지 모릅니다. 헌데 그의 수하들을 족치다가 알게되는 갖가지 일들이 이건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지경인지라.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익권이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놈은 이런 놈이었지.’
어려서부터 이러해 크면 변할까 했더니 똑같은 짓을 하는 놈으로 자랐구나.
영현군은 등짝을 얻어맞던 자세 그대로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듣자 하니 예판의 여식이 가뭄에 무료로 사람들에게 곡식과 약초를 풀었다지요? 거기서부터 이미 이판은 예판의 여식을 가만둘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누구라도 곡식을 그리 나눠 주어 인망을 챙기거나 곡식값을 낮출 수 없도록이요.”
성익권의 손이 멈칫했다.
“거기까지만이었어도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헌데 지금은 수하들을 무장시켜 밤중에 남의 집 담장을 넘게 하지 않았습니까. 혼인도 하지 않은 그 어린 아가씨를 위협하여 양녀로 삼아 결국 그 파편에게 먹이로 주기 위해서요. 그걸 생각하니 저도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
아버지의 침묵에서 그가 어느 정도 제 말에 긍정하고 있음을 알아챈 영현군이 조금 더 덧붙였다.
“어쨌든 이 소동은 소자가 떠나기 전 모두 처리할 터이니 아바마마께선 옥체 보중하십시오. 많이 마르셨습니다.”
그때 홍 내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궁인들이 조반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성익권은 아들의 얘기를 듣고 입맛 따윈 사라진 지 오래라 상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었다.
“허면. 일이 끝나면 또 떠날 것이냐.”
“이대로 남으면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 자리 차지하겠다고 달려온 미친놈 같지 않겠습니까. 그저 건강은 어떠신지, 궁 내 상황은 어떠신지, 돌아올 수 밖에 없게 된 김에 멀리서 확인만 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가면 계속 그 백정 놈들과 어울릴 거고?”
“아바마마.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는 그들만큼 적임자가 없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한마디 하면 착착 알아서 일이 진행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만하면 되었다.”
“예?”
“그만큼 나돌았으면 됐다는 말이다.”
“아바마마. 하지만 소자는-.”
“홍 내관. 이놈 조반부터 먹이고, 충분히 먹었다 하면 그대로 연서각에 데려가거라.”
“아바마마. 아직 이판의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나서야 합니다.”
“누가 나서지 말라 했느냐. 조반부터 든든히 먹고 기다리랬지.”
“!?”
“이번엔 백정이 아니라 이 아비와 좀 어울려 줘야겠다.”
당황해 저를 올려다 보는 영현군의 어깨를 조금 두드린 성익권이 미소지었다.
어깨를 감싼 근육이 몹시 단단했다.
아픈 곳도 없고 제가 하고 싶은 무예도 열심히 갈고 닦으며 산 것 같았다.
그것을 안 것만으로도 어쩐지 오늘은 아주 달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의 일은 아들의 일이고, 이판의 일은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큰 일이었다.
무리 자신이 그간 나라를 지배한 괴물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들, 이런 무도한 일들이 이렇게나 자행되고 있었다고?
마음이 괴로웠으나 지나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성익권이 두 눈을 매섭게 떴다.
“장 무관. 거기 있는가.”
“예, 전하. 하명하십시오.”
“은밀히 알아볼 일이 있다.”
그래. 지나간 일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변할수 있는 과거란 존재하지 않지.
하지만 틀어진 길을 바로 잡는 것은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 *
성익권이 천도재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그 정성을 도성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천도재라 하면 보통 오전 일찍부터 시작하곤 했는데, 성익권이 주도하는 합동 천도재는 특이하게도 자시(子時)부터 시작된다 했다.
하여 늦은 밤부터 궁에서는 분위기를 경건하게 만드는 음전한 북소리가 시간을 두고 이어지고 있었다.
요 며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이판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의복 시중을 받았다.
“허리끈을 그리 허술하게 묶어서야 되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대감마님.”
“쯧.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판의 짜증에 여종이 연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판에 대한 여러가지 소문이 저자에 퍼진 이후, 이 주인의 심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되었다. 꺼져라!”
결국 모든게 신경에 거슬린 이판이 호통으로 여종을 내보냈다.
예판이 살아 있을 때는 그에게 화살이 돌아가도록, 지금은 예판의 여식에게 책임이 넘어갈 수 있도록 상황을 잘 안배해두었는데.
‘가뭄을 위한 제물이 뭐가 어쩌고 어째? 감히 어떤 육시할 천 것이 그따위로 날 음해해!’
거기다 빠르게 해결될 줄 알았던 양녀건도 도통 진전이 없으니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파편에게 어서 좋은 먹이를 주어야 할텐데.’
허나 그 중 이판을 제일 초조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파편을 팔겠다고 나서는 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초반에는 이 검은 귀기(貴氣)를 추가로 구하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단 하나도 구할 수 없었다.
본래 수가 많지 않았던 것들 중, 주인이 먹이 주는 방법을 몰라 소멸시킨 것들도 있을테고.
아니면 귀기가 주는 생명력을 느끼며 저처럼 애지중지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지금 제게 남은 귀기가 사라질 경우 다시 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건 안돼. 그것만은 안돼.’
재앙이 사라진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성익권이 수습해야 할 일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예판의 여식에 관한 건 저에게 넘기고 주상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거라 생각했건만.
‘그깟 어린 계집의 일에 왜 그리 번번이 직접 끼어드는가. ……원인이야 뭐. 분명 그 천인들이겠지만.’
자신도 천인의 친우라는 이유때문에 그 아이를 데려오려 하는 것이었으니, 성익권이 같은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긴 했다.
‘소문은 파헤쳐봤자 딱히 찾아낼 수 있는 증좌가 없을 테니 그걸로 끝이겠고.’
어쨌거나 이 나라에 남은 귀기란 귀기는 모두 제 손에 가져와야 하는 중대한 때. 별 같잖은 추문 따위가 발목을 잡게 할 수는 없었다.
‘소문은 파헤쳐봤자 딱히 찾아낼 수 있는 증좌가 없을 테니 그걸로 끝이겠고.’
예판의 여식에 대해서도 그랬다. 자신이 뭔가를 시도하긴 했으나 전부 별것 아니었고. 결국 그 계집아이한테 해가 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럼 된 것이지. 합동이든 뭐든 예판의 천도재를 치러주고 나면 주상의 죄책감도 한층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관심도 식을터이니 그때 곧장 납치해 끌고와야겠어.’
소매의 매무새를 매만진 이판이 몸을 틀었다.
국장이 있는 날엔 평교자를 탈 수 없기에 마당엔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시종들을 뒤로하고 이판이 말을 탄 채 궁으로 출발했다.
“훠이, 길을 비켜라.”
그를 따르는 수하들이 길에 몰려나온 사람들을 가장자리로 비켜서게 했다.
하지만 평소라면 공손히 고개를 숙였을 이들이 오늘만큼은 어쩐지 불온한 시선으로 그를 흘끔거렸다.
누가 봐도 저자에 퍼진 헛소문을 그대로 믿는 듯한 모습이었다.
‘감히, 나를 향해 이딴 시건방진 눈들을 보이다니. 관병들만 아니었다면 죄 눈알을 뽑아 버렸을텐데.’
제 아래에서 버러지처럼 살아가는 것들이 내보이는 흐릿한 노기가 이판을 분노케 했다.
당장이라도 말에서 내려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으나, 지금 그는 천도재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괜한 소란을 만들 순 없었다.
하여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던 그때였다.
“이, 이판어른! 이판어른!”
“뭐냐.”
“이판 어른. 저, 저택 쪽에서 연기가 납니다.”
“뭐?”
천도재에 가다 말고 무슨 갑자기 연기 타령을……. 수하의 뜬금없는 보고에 이판이 뒤를 돌았다.
그러다가 어두운 밤하늘을 밀어낼 정도로 밝게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불꽃을 보며 깜짝 놀랐다.
눈을 씻고 보아도 자신의 저택이었다.
저택에 보관된 수많은 보물들을 염려할 새도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안 돼!’
그 어떤 금은보화도 다시 모을 수 있지만 그 조각은 아니었다.
파편도 불에 타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소실되어 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다!
급한 마음에 고삐를 마구잡이로 잡자, 흥분한 말이 앞다리를 크게 굴렀다.
“이랴!”
몇몇 사람들이 그런 말에 치여 비명을 질렀으나 아랑곳 않은 이판이 저택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