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9화 (246/254)

“이야. 또 만나네요. 다신 안 올것처럼 하고 달아나서는 왜 이렇게 맨날 잡혀있어요? 이쯤되면 일부러 몸을 던지는거 아닌가? 거기 안락해요? 너무 편안해서 매일 여기서 자는 거예요?”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이판 대감이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하려 하길래 그걸 알려 주러…….’

그렇게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건만, 재갈도 물려 있지 않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숨 막히는 단음절뿐이었다.

“읍읍!”

‘아니, 제발! 내 품이라도 뒤져 주구려! 내가 매우 수상해 보인다는 건 인정하리다. 그러니 제발 몸수색이라도 해 주시오! 상황을 적어 놓은 서신이 품속에 있소! 어젯밤 나는 그걸 이 댁 마당에 던져 넣으려 했던 것뿐이오!’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그는 목이 터져라 그리 외쳤다.

비록 결과가 같았다 하더라도.

“읍읍!”

그런 그를 보며 예판의 여식이 가차 없는 판결을 내렸다.

“또 무슨 연극을 하는 건지. 오늘은 당신의 충고를 따라 관병부터 부를 거니 괜한 힘 빼지 마시죠.”

‘안, 안 돼! 관병은 안 돼!’

“읍읍읍!!!!”

‘제발! 제발 내 품속을 한 번만 봐 달라고! 제발!’

“읍읍읍읍!!”

‘제발!’

“읍읍!!”

하늘이 야속하게도 그는 반전 없이 의금부로 끌려갔다.

그래도 그는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이렇게 끌려간다 한들 아버지를 마주치진 않을 거라고.

제 얼굴도 궁을 나갈 때와 비교해 몹시 달라졌고. 이 이상한 증상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분명 계속 이대로 있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몸이 자유로워지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혼자 무형의 족쇄라도 찬 것처럼 몸이 굳어진 죄수가 있다는 소식에 궁금해진 성익권이 소식을 듣고 나와 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

아니, 예판의 집을 침입한 자라는 보고만 아니었어도 그의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

허나 성익권은 예판의 여식을 신경 쓰고 있었고.

그래서 그 집을 습격한 놈이라는 말에 나와 보았고.

불행히도 제 아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뭐지? 홍 내관. 저기 저놈. 저놈 혹시, 영현군인가? 내가 눈이 어두워진 것인지,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두 번 세 번 보아도 영현군 같지?”

“……전하. 소인의 눈도 잘못된 것인지 저 또한 아무리 보아도 저분이…… 에구머니나. 영현군! 영현군이 아니십니까! 아니 왜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계십니까! 여봐라! 어서 이분을 꺼내 모시거라!”

“예?! 영현군이요?!”

“헉! 영현군? 영현군이 여기 계시다고요?”

“이 무엄한 놈들. 영현군을 뵙고도 이분을 이리 두다니. 너희들이 정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영현군!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영현군!”

홍 내관이 그리 소리를 지르며 온 사방에 영현군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그에 화답하듯 당황한 관병들도 영현군의 이름을 부르며 어쩔줄 몰라 쩔쩔맸다.

차마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던 영현군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의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온몸과 목소리를 결박한 상태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기실 그는 슬슬 이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을 했다. 헌데 도무지 그 원인을 다른 이에게 알릴 방도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제 품 안쪽을 눈짓으로 가리켰지만, 그 의미는 당연히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 죄 없는 어의는 맥만 수십 번을 짚었다가, 침을 들었다가 놓고, 다시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읍읍!”

시간이 갈수록 어의의 얼굴이 당황으로 퍼렇게 질렸다.

맥은 너무나도 정상인데. 정상이다 못해 백 살까지 사실 수 있는 것처럼 아주 힘차게 맥동하고 있는데.

‘그런 분이 대체 왜 이런 꼴로 누워 계신 것이냐.’

차마 원인을 조금도 모르겠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어의가 입술만 떨었다.

어쨌거나 불려 온 이상 뭐라도 해야 했다.

하여 하는 수 없이 일단 안전한 혈을 중심으로 침을 먼저 쓰기로 했다.

“마, 마비 증상이신 것 같으니 일단 침을 놓겠습니다.”

침을 놓겠다는 말에 영현군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침을 놓기 위해선 탈의를 먼저 해야 하니 품 안에 넣어 둔 그 목함이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굳어진 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던 어의는 그의 손발과 머리에 먼저 침을 놓았다. 길다란 바늘이 그의 몸에 다닥다닥 꽂혀들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읍읍!!”

어의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의 눈에는 영현군이 갑자기 경련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 같았던 어의가 결국 생사의 결단을 내렸다.

“몸에도 침을 놓겠습니다.”

“읍읍!”

‘바로 그거야!’

그리고 영현군의 추측은 정확했다. 벗겨낸 그의 의복과 소지품을 궁인들이 한쪽으로 치운 순간 결박이 풀렸다. 온 몸에 바늘이 꽂힌 채로 영현군이 벌떡 일어섰다.

“에구머니.”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어의를 손짓으로 내보내며 그가 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바마마.”

“뭐, 뭐냐. 너 괜찮을 것이야? 어떻게 이렇게 마비가 단숨에 풀린 것이냐? 혹시 꾀병이었더냐? 관병들을 피하려 수를 쓴 거냐,이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헌데 저 스스로가 봐도 제 몸이 조금, 아니 대단히 이상하긴 했다.

물러가기 전 어의가 다급하게 침을 빼내긴 했는데, 침술로 인한 효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에 생명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마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고,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개운했다.

온몸의 조각 하나하나가 일제히 깨어나 시간을 거슬러 가는 듯했다.

‘……이래서 이판이 이것을 모으는 거였구나.’

깨달음이 왔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일단 침입자로 오해받고 있는 제 억울함부터 풀어야 했다.

“저는 절대 침입자가 아닙니다. 이걸 봐 주십시오. 저는 그저 어쩌다 알게 된 계획을 그 댁 아가씨에게 서신으로 알려주고자 했을 뿐입니다.”

가져온 서신을 제 아버지의 앞에 펼쳐놓은 영현군이 이번엔 멀찍이 놓여있는 목함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제가 알게 된 계획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러느라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색한 대화가 오가지 않아 오히려 조금 다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껜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

한참 열심히 설명하다가 제 아버지가 한마디 대답도 없이 자신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는 걸 자각한 영현군이 제법 뻘쭘하게 화제를 마무리했다.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판의 계획도 계획이지만, 너야말로 용케 그 가뭄에 목숨을 부지했구나. 도성 밖의 치안은 흉흉한 정도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저도 그것 때문에 아바마마께서는 무사하신지, 옥체가 상하시진 않으셨는지 걱정되어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궁에는 발을 디디지 않겠다며 뛰쳐나간 놈이 내 건강은 뭐 하러 챙기느냐.”

“그때는 소자가 너무 철이 없고 어리석어……. 하지만 그렇다고 딴맘을 먹고 돌아온 것은 아니고, 그저 무탈하시며 잘 계신 것인지 그것만 확인하려 했-.”

“그나저나 홍 내관이 그러더구나. 예판의 여식에 대한 헛소문이 돌기 무섭게, 지금은 이판에 대한 이상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고.”

“!”

“홍 내관은 그 소문을 퍼뜨린 이가 예판의 여식이 아닌가 추측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그 여식의 성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증좌를 모아 판결대에 세우면 세웠지 소문에 소문으로 받아칠 아이 같지는 않았거든.”

“…….”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있는 아들을 보며 성익권이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대체 누가 뒤에서 그런 일들을 꾸미는 건가 싶었었는데, 설마 이 녀석이 나타날 줄이야.

성익권이 오래간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뒤 입을 열었다.

“네 짓이었구나.”

“아, 아닙니다. 아바마마.”

“아니야?”

“……아닌게, 아니라, ……아니지 ……않습니다. 송구합니다.”

영현군이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감추려 한 것은 아닙니다. 아바마마의 말씀처럼 제가 사람을 시켜 헛소문을 조금 퍼뜨리긴 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퍼질 말들이었는 것을요. 진실을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정확히 무어라 퍼트린 것인데.”

“…….”

“이미 네 입으로 했다고 인정했는데 더 감출 게 뭐가 있느냐. 털어놔 보거라.”

“…….”

“어서 고하라는 데도.”

“……정말 하찮고 별것 아니라서. ……딱히 아바마마께서 들어 보실 만한 이야기가 아니실 텐데. ……일단 ……‘도성 밖 고을마다 기우상이 죄 깨지고 부서진 것은 알고 있느냐. 도대체 누가 이런 무도한 짓을 하였나 했는데, 가뭄을 바라 그런 짓을 저지른 이가 알고보니 이판이더라. 가뭄이 올거란 씰을 예판에게 흘려 미리 대비하게 해 놓고 이후에는 예판이 대비한 사실만 퍼뜨림으로써 그 부녀를 화살받이로 이용했다. 곡식이 씨가 말라 갈 때 제일 먼저 앞장서서 가격을 올린 곳이 어디냐. 바로 황서상단이다. 황서상단의 뒷배가 이판인 것을 모르는 이가 있느냐? 염화같은 가뭄 덕에 이판의 곳간엔 쌀 대신 금전이 가득찼다. 가뭄을 만들기 위해 제물로 납치되어 희생된 수백의 망령만 도처에서 피눈물을 흘리더라’라고 정말 소소하게만 흘려본 것이라 아바마마께선 정말 조금도 신경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 도성 밖 기우상이 전부 부서져있었다고? 게다가 제일 먼저 가격을 올린 곳이 황서상단이었어? 조금 이상하구나. 내가 알기론-,”

“예? 그건 저도 모르는데요.”

“……뭐?”

“제가 알 턱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그때 저 아래쪽 땅끝 마을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을요. 하지만 그 지옥 같은 나날의 시작을 지금 와서 누가 기억할까요. 그럴 땐 그냥 먼저 갖다 붙이는 놈이 임자 아니겠습니까. 하하.”

“…….”

“다만, ‘연옥같은 가뭄에 산천이 죽어 갔다 한들 그 더위가 이판의 분노보다 두렵겠느냐. 저 깊은 혜류강이 바짝 말라비틀어졌다 한들, 이판의 자애보단 깊고 넓지 않겠느냐.’”

“그건?”

“이판의 손에 명을 달리한 이들의 한탄입니다. 희생자는 수십이 넘었고, 그의 뒤를 쫓으며 알게된 피해자들의 수는 수백이 넘어갔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만 센 것으로 그들의 가족까지 하면 가히 셀 수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처음부터 솔직히 고하고 아바마마께서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시도록 진행했으면 좋았을 터이나, 근심이 많으실 아바마마께 짐을 더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처리하려 한 것입니다.”

“또.”

“예?”

“아예 작정하고 이판을 뒤엎기로 결심한 놈이 고작 그 정도 소문만 퍼뜨렸겠느냐. 또 뭘 했느냐. 무슨 내용을 더 퍼뜨렸어.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아니, 정말 없습니다. 아바마마.”

“정말 없을 리가 있어? 뭐든 바른대로 고하라는 데도.”

“…….”

성익권의 윽박에 망설이던 영현군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라 들어 보실 만한 일까지는 아니실 텐데…….”

“아비 숨넘어가겠다. 뭐냐. 어서 털어놓거라.”

“이판이 얼마나 교묘하게 일을 처리하는지 기껏 증좌를 손에 넣어봐야 이판의 하수인만 쫓을 뿐. 좀처럼 그를 잡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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