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정말 모으고 있기라도 한걸까요? 그 지옥을 겪고 나오고도 그딴 걸 모으다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러게.”
“혈호든 가뭄이든, 또다시 재앙이 닥치면 우리 백정촌민들부터 죽어 나갈 텐데…….”
백정이 불안한 듯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이들이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도움의 손길은커녕 하나라도 더 빼앗으려 달려드는 놈들만 천지였다.
“만일 또 이판이 그런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면 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사지를 찍어 버릴라니까요.”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얘기하는 백정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비슷한 얘기를 하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때로는 소중한 이를 위해 악역이 되어야 하는 때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악역?”
“그렇습니다. 스스로가 적군이 되는 것이지요.”
왜 하필 그 목소리가 갑자기 지금 떠오르나. 남자가 제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가자. 이판으로도 모자라 그놈의 흑룡의 뭐시긴지까지 찾아 없애려면 일정이 바쁘구나.”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남자가 입을 닦고 일어섰다.
“악역이고 나발이고. 뭐 나도 이젠 익숙해졌으니 점점 더 잘하겠지.”
“네?”
뜬금없는 말에 사내가 반문하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길거리에 비밀리에 새겨진 표식을 따라가는 발걸음들이 분주했다.
* * *
퍽! 퍼억. 퍽!
“그러,게. 달랄 때 곱게, 내놓을, 것이지. 꼭. 사람이. 이리. 힘을 써야만 말을. 듣는 것들이 있다니.까. 곱게, 주었어도, 너같은, 놈은 살려두지, 않았겠,지만.”
“……컥. ……살, 살려……제발.”
퍽! 퍼억!
“나머, 지는 어디에, 두었느냐. 어?”
퍼억! 퍽! 퍽!
“응? 어디에 두었냐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귓구멍을, 다시 뚫어, 주랴.”
“헉……제, 제발……살, 살려만…….”
아래 깔린 덩치큰 사내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빌고 있음에도 눈이 돌아간 영현군의 손은 쉼없이 앞으로 뻗어갔다. 그때마다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낡은 창고안에 울려퍼졌다.
쓰러져가는 창고 안엔 덩치큰 사내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지만 아무도 영현군을 말리는 이가 없었다.
아니, 한명 있긴 있었다.
“나으리.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이 육시할 놈은 제가 찢어죽이려니까요.”
주막에서 뭔가를 거래하는 이들의 뒤로 덕길의 신호를 받은 백정마을 사내들이 따라붙었었다.
거래 현장을 직접 덥치기 위해 영현군과 덕길은 백정촌민들이 남겨놓은 표식을 따라갔는데, 그러다 마주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목적지인 낡은 창고 안엔 갈라진 나무틈 사이마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흘러나왔고, 넝마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는 두구의 시신은 사람의 몰골도 아니었다.
너무 잔인하게 난자된 탓에 시신의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모양으로 영현군은 저 두구의 시신이 주막에서 보았던 두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범인인듯한 놈은 그중 한사람이 팔기 위해 가져왔던 검은 악기(惡氣)가 든 목함을 도륙된 시체 위에 올려두는 중이었다.
그러자 영현군의 앞에서 피범벅이던 두 시신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지금껏 백정마을에서 납치된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것을 보고도 모를순 없었다.
분노한 영현군이 곧장 범인에게 달려들었다.
“어딨어. 지금껏, 사간, 이 악기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가져갔느냐.”
퍼억!! 퍼억!!!
손톱을 뽑든 이빨을 뽑든. 심문을 하려면 차분한 마음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지를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이놈을 당장 여기서 때려 죽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으, 흐.”
곤죽이 되어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게 된 범인은 곧 의식을 잃어버렸다.
속편히 기절한 놈을 자신들 차례만 기다리고 있는 백정촌민들에게 넘겨준 후에도 좀처럼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낡은 창고벽을 거칠게 걷어차는 그에게로 덕길이 다가왔다.
“사람을 잡아먹는 이딴 것이 더 퍼지면 앞으로 납치되는 이들은 백정 촌민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 허니 당장이라도 일을 벌이자꾸나. 그놈을 한시진도 더 살려두어서는 안되겠다.”
“그놈이요?”
“이판 말이다. 저놈 기억 안나느냐? 이판의 심복이 데리고 다니던 귓불 갈라진 그놈이지 않느냐.”
“어떻게 그리 오체분시해도 시원치 않을 간악한 놈이 다 있답니까. 저만 살겠다고 식량을 죄 강탈해 간 탓에 우리는 거의 다 굶어 죽었는데. 그러고도 모자라 사람을 납치해 귀기(鬼氣)를 먹이는데 써?”
“아무튼 저놈도 하던대로 창고에 처박던지 그냥 여기서 찢어죽이던지, 그건 너희들 마음대로 하거라. 창고에 처박을 거면 닭피든 돼지피든 상관없으니 꼭 칠갑해두고. 아참. 방금 본 광경도 꼭 소문에 추가하는 것 잊으면 안된다.”
“걱정 마십시오. 그 호로자식이 한 짓을 낱낱이 까발려줄 것입니다.”
“그래. 시간이 없으니 나는 이대로 마지막 준비를 좀 하러 다녀오마.”
“어디로 가십니까? 위험하실지 모릅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너는 여기서 저 미친놈을 족쳐야지. 나는 곧 팔봉이와 합류할 것이니 염려말고, 나머지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니 미리 이른대로 때맞춰 불만 잘 지르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그때 다시 보자꾸나.”
“다녀오십시오.”
덕길의 인사에 대충 고갯짓한 남자가 들고 있는 함을 품안에 쑤셔 넣었다.
목적지는 예판의 저택이었다.
주막 뒤로 끌고 갔던 이판의 수하 중 한 명에게서 뜻밖의 말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 ……예판의 여식이 꼭 ……필요하다고. 동, 동향을 ……아주 잘 감시하라 하셨습니다. 절대 ……도성에서 도망칠 수 없도록.”
이 말은 양녀로 삼거나 재산을 노리는 것과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으로 비쳤다.
양녀는 그녀가 출가한 이후에도 삼을 수 있는 것인데.
‘왜 도성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거지? 예판의 여식이 꼭 필요할 일이 예판의 재산을 얻기 위한 것 말고 또 뭐가 있는 거야?’
그 연유가 지금껏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으나 조금 전 창고 안의 광경을 보고 나니 깨달아 지는 바가 있었다.
혈호를 만들었던 흑룡. 그 흑룡의 파편을 모으는 이판. 천인의 동무라는 예판의 여식. 그 예판의 여식이 꼭 필요하다는 이판.
‘이 새끼. 이거 진짜 그 재앙을 다시 재현하려는 것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자 속에서 열화가 치솟았다.
‘어쨌거나 예판의 여식이 그 놈의 손을 잘 빠져나갈수록 내게도 도움이 되겠어.’
그런 이유에서 어두운 밤, 장신의 그림자가 담장 앞에서 서성였다.
평소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휙 뛰어들어 가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구덩이를 내가 파라고 하긴 했지만 그걸 그렇게 담장을 따라 빈틈없이 파 버렸을 줄은.’
그 때문에 어제 그는 마치 우물에 빠진 개구리처럼 푸드덕거리며 간신히 구덩이를 탈출해야 했다.
제 우스꽝스러웠던 꼴을 떠올린 그림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담장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적어 온 것만 던져 넣고 가자. 이판이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던가. 흑룡의 파편을 사용해 재앙을 되풀이할 속셈이라던가.’
아직 추측에 불과한 것들을 다 알려 주는 게 맞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그녀는 천인의 동무라지 않나. 이 정도로 적어 두면 제 목숨에 대한 경각심은 생기겠지.’
그런 이유로 서신을 꺼내려 품안에 손을 집어넣은채 마땅한 곳을 찾아 담 위에서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헌데 그때였다. 손끝이 목함에 스치던 그 순간, 흑룡의 파편을 넣어 둔 그의 가슴께가 조금 달아올랐다.
감각이 예민한 그는 즉시 이변을 감지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뭘 해볼 사이도 없이 이상한 공기가 그를 감싸안았다.
‘?!’
깜짝 놀란 그의 몸이 삽시간에 균형을 잃고 담장 아래로 추락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기름 먹인 구덩이 안으로 다시.
‘!!!’
그랬음에도 공기는 여전히 그의 몸을 족쇄처럼 휘감고 있었다.
당황한 그가 손을 휘젓거나 발버둥칠수록 더욱 몸을 세차게 압박해 올 뿐.
결국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결박되고야 말았다.
‘뭐, 뭐지. 대체 이게 뭐야?’
사실 결박이라는 말은 맞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제 몸속에 강제로 파고들며 근육 경련이 일었다는 말이 맞을테니까.
헌데 그럴수록 마치 환각이라도 보는 것처럼 이상한 고양감이 들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기분이 좋아져 계속해서 이렇게 있고만 싶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남자가 혀끝을 깨물었다.
정체 모를 힘도 막지 못한 고통이 찾아오자 눈앞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제 몸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궁금했으나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연유 따위가 아니었다.
‘큰일이다. 이러다 또 잡히면 그땐 진짜 변명의 여지가 없어. 어떻게 해서든 발각되기 전에 몰래 나가지 않으면!’
“으응. 끙.”
아무리 그래도 관병들에게는 절대로 잡혀갈 순 없는 그가 더욱 세차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몸은 물을 먹은 솜처럼 늘어져 종래엔 숨을 쉬고 눈을 껌뻑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당황한 그를 두고 시간은 잘도 흘러가, 새벽닭이 울고 얼마 되지 않아 구덩이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헉. 저거 보여? 흙이 꺼진 걸 보니 오늘도 뭔가 잡혔나봐. 다른 함정도 많이 만들어뒀는데 여전히 구덩이가 제일 쓸모있네. 좀 더 크게 해두길 잘했어. 호황이네 호황이야.”
“그러게요. 밤새 긴장하며 보초를 서느니 낮에 땅이나 더 깊이 파두는게 효과가 더 좋은 것 같아요.”
‘!!’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그가 다시금 세차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빌어먹을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빠져나갈 곳도, 이 상황을 타개할 계책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해자처럼 파여 있는 구덩이 안쪽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도착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