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화 (244/254)

* * *

이판의 심복은 제가 부리는 이들을 데리고 새벽부터 저택을 나섰다.

아직 도성이 어수선할 때 일을 완수하려면 대감의 명이 없어도 서두르긴 해야 했다.

그가 수하들을 두셋씩 나눠 명령했다.

“너희는 이대로 도성 곳곳을 돌며 다시 한번 소문을 퍼뜨리거라. 예판 대감의 죽음에 대해서도 흘리며 최대한 자극적으로 말을 만들어야 한다.”

“예, 나으리.”

“좋다. 미시(未時)까지는 일을 마쳐야 하고 늦어도 신시(申時)에는 돌아와서 오늘 밤 저택을…….”

“헌데 말입니다. 나으리.”

수하 중 하나가 번들거리는 눈을 하며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오래전 칼에 베였던 것인지 그의 왼쪽 귓불 끝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분부하신 일은 한치의 실수도 없이 수행하겠지만. 저희가 나으리를 위해 나선 일이 적지 않은데 어찌 이리 약조를 지키지 않으십니까. 이쯤에선 쌀 한톨 만한 귀기(貴氣)라도 저희에게 나누어 주셔죠.”

“뭐야?”

“그렇지 않습니까. 그 약조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귀기를 나으리께 순순히 내놓았겠습니까. 저희같은 무지렁이들도 그것이 얼마나 상서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

“대감께 여쭤주신다 하여놓고 여지껏 말씀이 없으시니. 저희가 오죽 답답하면 이런-,”

“거참 계집처럼 보채지 좀 말거라. 대감께서 원하시는 건 저 예판의 여식이 제발로 대감께 달려와 몸을 의탁하는 것인데.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 과정 몇가지 진행했다고 이리 뭐라도 한것마냥 굴면 앞으로 너희를 어떻게 믿고 큰일을 맡기겠느냐!”

“…….”

“대감께선 약조를 어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신다 하셨고 주실 것이니 기다리지 못하고 그리 불평만 일삼을 요량이면 너는 그만 여기서 빠지거라!”

“…….”

그 말에 수하가 고개를 숙이긴 하였다.

하나 표정엔 여전히 못마땅함이 가득이었다.

심복이 이번엔 적당히 그를 달랬다.

이놈을 죽이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손이 줄면 제 번거로움이 커질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아보거라. 대감께서도 곧-,”

그때였다. 관졸들이 멀리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판의 심복이 제 수하들에게 신호하며 서둘러 담 사이로 몸을 감췄다.

다행히 저희를 보고 달려온 것은 아니고 방을 붙이려는 듯싶었다.

혹 못 보는 자가 있을까 봐 염려한 것인지 관졸들은 이십 척 간격으로 이곳저곳에 꼼꼼히 종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팔안에 그득한 종이를 들고 사라졌다.

이판의 심복과 수하들이 관졸들이 완전히 떠나간 것인지를 잠시 살피고 있을 무렵, 어스름한 길을 이르게 오가던 누군가가 방 앞에 다가와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합동 천도재……?”

아침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엔 이미 도성 안 사람들 대부분이 그 희한한 단어를 한번씩 입밖으로 내뱉어본 후였다.

그중엔 그 단어에 감격하는 자도 있었다.

“헉. 돌아가신 중전마마와 세자 저하의 국장에 우리까지 끼워 주신다니.”

“근디 그래도 돼? 이런 일은 한 번도……, 게다가 여기 예판 대감의 이름자도 있어. 예판께서도 정말 돌아가셨나 봐.”

“……그러게. 소문이 그리 퍼져있었어도 그저 기우제가 두려워 달아나셨던 건 줄 알았는데.”

“헌데 갑자기 웬 합동 천도재래? 이미 우리 가족들의 시신은 혈호로 가져갔는데 이제 와 뭘 가지고 제를 지내라고?”

“뭐, 도성 바깥엔 아직 시신이 천지라고 하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것두 이미 비가 내린 이후 모두 정리했잖어.”

“아니. 다들 여기 끝까지 읽어야지. 고인이 생전에 자주 손에 잡고 사용하던 물건을 하나씩 가져오면 된다는데?”

“물건? 물건으로 시신을 대신하는 건가? 한번 찾아봐야겠구먼.”

모두가 방을 읽으며 웅성거릴 때 누군가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왼쪽 귓불 끝이 둘로 갈라진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다들 그걸 하게? 나는 어쩐지 곱게 보이지 않는구먼.”

“뭐가?”

“재앙이 무섭다고 시신들을 죄 강제로 뺏어 핏물 속에 집어 던질 땐 언제고. 이제 와 중전마마나 세자 저하와 함께 국장을 치러 주겠다 하면 우리가 감읍해 달려갈 줄 아는 그 생각머리 말이여. 예판 대감 일만 해도 그래. 죄인이라 부르며 당장에 목을 매달려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천도재는 무슨.”

“이 사람이 미쳤나. 궁문이 코앞인데 다 들리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여!”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어머니 시신도 강제로 뺏어 가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그래놓고 뭐? 천도재를 지내 줄 거니 생전 자주 쓰던 물건을 가져와? 국장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내 어머니 시신이나 도로 내놓으라고 해! 장례는 내가 알아서 양지바른 곳에서 치르려니까.”

“아니, 이 사람이 그래도.”

주변에 있는 이들도 혹시 지나가던 관졸이 있진 않나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염화같던 가뭄의 기억은 여전히 모두에게 아픔이었고, 그때 소중한 이들을 많이 잃어야했던 사람들은 씩씩대는 사내의 말을 굳이 말리고 싶지 않았다.

하여 결국 다들 기대 없는 표정으로 방 앞에서 흩어졌다.

그래. 저놈 말이 맞네. 천도재를 지내려면 지내라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면면들이 선명했다.

먼 곳에서 모습을 감춘 채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던 이판의 심복은 제 생각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도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헌데 갑자기 웬 천도재지? 방에 부러 예판의 이름자를 넣으신것도 뭔가 껄끄러운데. 이거……혹시 전하가 개입하시기로 하신건가?’

예판의 여식을 향한 불온한 소문이야 이미 전하도 아실테고. 직접 그 저택에 걸음하시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영 엉뚱한 추측은 아닌 듯 했다.

아니라면 한 달여쯤 이후 진행하기로 했던 국장을 갑자기 천도재라는 형식으로 끌고와 굳이 예판을 끼워넣진 않으셨을테니 말이다.

‘일단 빨리 보고드려야 겠군.’

그 사이 귓불이 갈라진 수하가 또 다른 사람들 틈에 스며들어 한번 더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심복이 조용히 길 안쪽으로 꺾어져들어갔다. 주인을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이 제법 황급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또다른 그늘 아래에서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발 빠른 걸음들이 심복의 뒤로 조용히 따라붙었다.

* * *

주막은 비가 내리고 땅이 살아난 이후 제일 먼저 붐비는 곳이었다.

빛나는 비를 맞고 무르익은 곡식들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었지만, 그것을 잘 수확해 돌아가 술부터 빚은 이들도 있었다.

이 주막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의 것이었다.

하여 이제야 가족들의 죽음을 추모할 수 있게 된 이들이나 긴 가뭄 속에서 목숨은 건졌으나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이들이 주로 몰려들었다.

원망할 곳이 간절히 필요했던 그들에게 성익권과 정치화는 좋은 표적이었다.

그리고 그 주막 한켠에 잿빛 장포를 입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남자의 목표는 임금을 향한 성난 원성을 한잔 술 안으로 쏟아붓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에게 접근해 말끝마다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거나 언사를 더 극단으로 몰아가는 이들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다 때때로 정도가 심한 놈을 골라 주막 뒤편으로 데려가보면 열에 아홉은 어김없이 이판의 수하들이었다.

“아까 그 놈도 그냥 그 자리에서 목을 따버리면 좋았을 것을. 그리 몸 성히 보내주시다니요.”

그리 말하는 이는 이판의 행적을 고해바치던 백정 사내중 하나였다. 덕길이라 하는 이 사내는 아주 오랫동안 납치된 이들의 뒤를 쫓아왔었다.

“그 몰골로는 당분간 제 주인에게 고자질을 못할터이니 적당히 만족하거라. 우리 목적을 생각해야지. 그러다 잡아야 하는 놈들을 놓치면 네놈이 책임질 것이냐?”

“끌려간 이들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져서 그렇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마음 먹지 말거라. 그러면 꼭 실수가 생긴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리 대답하며, 바로 얼마 전 치화의 앞에서 아주 모양새 빠지는 형태로 달아났던 남자는 조용히 술을 마셨다.

“헌데 저ㅎ…….”

“씁.”

“어흠흠. 저, 저희라고 하려고 했습니다요.”

남자의 눈치를 본 사내가 피식 웃었다.

“헌데 나으리. 제가 계속 이리 당당히 앉아 있어도 됩니까? 백정은 원래 이런 곳에 오면 안 되는데.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저는 처음처럼 주막 뒤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괜찮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야.”

“팔봉 형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시킨 일을 다 하면 오겠지.”

“…….”

“왜 그러느냐.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백정과 어울리는 양반 나리라고 생각했을 때도 신기했는데 다름 아닌 영현군이셨다니.”

“꺼내지 말라니까.”

덕길이 감탄할 때마다 남자는 번번이 만류했으나 사실 그 목소리에 성의라곤 없었다.

‘언제 써먹어도 잘 먹힌단 말야.’

그는 제가 상대해야 하는 이가 지체 높은 자일 때.

하여 함께 행동하는 이들의 두려움을 없애고 의욕을 북돋을 필요가 있을 때마다 오래전 버린 이름을 도로 주워와 실수로 정체를 들켜버린 척, 잘도 써먹었다. 그 작위적인 연기에 부끄럼도 없었다.

영현군이라는 이름을 꺼내들때마다 일이 수월해짐은 물론이요, 저런 높으신 분이 우리 일을 도와주신다는 감탄과 존경과 경외의 시선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런 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궁에서 제 발로 도망친 탓에 이미 죽은 사람 취급 받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할수 있는 짓이지만. 뭐. 들키지만 않으면 장땡이지.’

그때였다. 원망의 소리를 높이던 이들 사이로, 불현듯 누군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는 모습이 영현군의 눈에 들었다.

“그런데 지난번 그것 말이여. 그거 얼마나 쳐준다고 했지?”

“응? 뭐를, 헉. 자네한테 그게 있었어?”

“아, 얼마 쳐줄 건지나 얘기해 보라니까.”

대답하는 이의 목소리가 한층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그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보이는대로 가져오라고. 아주 후하게 셈해주시겠다 하셨거든. 나만 해도 지난번에 이정도를 받았-,”

“뭐, 뭐야? 이렇게나 많이? 이렇게 많이 값을 쳐준다고?”

“그래. 제일 작은 게 이 정도니까 일단 가져와 봐.”

“그래야겠구먼. 오늘 밤 갖다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눈앞에 놓인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누군가가 즐거운 낯빛으로 일어났다. 상대를 하던 이도 병에 남았던 술만 털어마신 뒤 곧 자리를 비웠다.

점점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주막 밖 누군가에게 눈짓한 백정이 소리 낮춰 물었다.

“지금 저놈들이 얘기한 게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그 흑룡의 파편이란 것이지요? 유독 이판의 수하들을 따라다닐 때 많이 듣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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