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화 (243/254)

천인이 내린 신비한 비를 맞은 조각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이전에 몰래 주워 숨긴 것들은 아직 이리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판이 가진 파편은 처음엔 손바닥만한 함에도 들어가는 작은 크기였다.

하지만 이것을 주워간 이들이 또 없는지 수소문해 닥치는 대로 파편을 사 모은 끝에 지금은 이리 품에 안기는 크기를 만들 수 있었다.

목함 위에 손을 올리자 비정상적인 고양감과 함께 몸 깊은 곳부터 기력이 차올랐다.

“하.”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런 감각이 있을 수 있는가.

처음 이 파편을 접했을 땐 온 몸이 돌처럼 굳어져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은 파편이 그의 몸을 변화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는지, 그 이후 이판은 날로 주름이 옅어져가는 제 피부를 확인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만 있다면 영원히 사는 일조차 꿈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제 제 목숨이었다.

허나 이 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초반에는 목함을 터뜨릴 듯 기세를 보였으나 이제 고작 뚜껑 한 뼘 범위에서 검은 기운을 뿌릴 뿐이고, 그조차도 형태가 선명하지 않았다.

어떻게 유지하여야 할까. 이 귀한 것을 이대로 잃을 수는 없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러다 흑룡이 원했던 혈호가 떠올랐다.

이 파편은 그 흑룡에게서 떨어져나온 것인데 보물의 본체인 흑룡은 사람들의 피와 진액을 먹고 사는 듯 하지 않았나.

‘그럼 이 파편도 사람의 피와 진액을 먹이로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몇 번 시험을 해보았다. 천한 놈들을 끌고와 난자한 후 피범벅이 된 시체 위에 목함을 얹어본 것이다.

검은 귀기가 시체를 집어삼키며 선명해지는 것을 보았을 때의 희열이란.

게다가 이 파편은 자주 보듬으면 보듬을수록 제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흑룡이 호수까지 파야 했을 정도이니. 웬만한 인간을 죽여서는 기별도 가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지금은 주상이 치안을 몹시 강화하는 시기였으니.

천민이라 할지라도 필요한 만큼 이 보물에게 먹이려 들다가는 분명 꼬리가 밟힐 터였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다가 천인의 친우라는 예판의 여식 정치화에게 생각이 미쳤다.

천인의 친우가 괜히 친우일까. 뭔가 특별한 부분이 있으니 그 천인들이 제 동무로 삼았겠지.

‘아니면 자신들이 가진 신비한 무언가를 선물로 주었을지도 모르고.’

이 안에 든 것도 천인과 동류인 상서로운 짐승이 남기고 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예판의 여식을 이 목함 안에 든 것에게 먹일 수 있다면 이 소중한 힘이 더 유지될지 모른다.

‘게다가 양녀로 삼으면 나는 죽은 친우의 딸을 보듬는다는 명성도 쌓을 수 있고. 집 안에서 죽이면 병이나 사고로 위장하기도 어렵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는 예판의 시선이 제 이득을 계산하며 허공을 잠시 맴돌았다.

그럴수록 그의 입꼬리가 거침없이 위로 휘었다.

* * *

방을 나서는 정치화의 낯빛은 제법 어둡고 파리했다.

요 며칠 침입자들의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계속 침입을 시도했다면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텐데.’

침입자들은 그날 이후로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으로 포기할 놈들이 아닌데 또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내가 방심하게 하려는 거겠지? 그때 들이닥치려고?

‘진짜 가지가지로 사람 열 받게 하네. 할거면 빨리 할 것이지 이리 굼벵이처럼 미적거리고.’

혀를 찬 그녀가 하늘이 어둑해질 때까지 마당을 서성이던 그때였다.

어느 순간 그녀의 기감을 자극하는 어떤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재빨리 달려간 정치화가 숨겨 두었던 몽둥이부터 꺼내 들었다.

‘드디어 왔구나. 너희들이 날 아주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그러다가 제대로 큰코다치지.’

발소리를 죽인 그녀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천천히 전진했다.

수상쩍은 소리는 또다시 담장 밑 구덩이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하. 거기 걸렸다 이거지?’

그저 구덩이를 드문드문 파는 것으로는 부족한 듯 해, 마치 해자처럼 함정의 범위를 넓히고 그 안에 기름을 아주 듬뿍 뿌려 두었던 터였다.

물과 달리 흙이 쉽게 마르도록 놔두지 않아 빠져나오려면 제법 애를 써야 할 것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바닥에서 돌들을 보이는 대로 집어 들었다.

‘아니야. 이런 건 너무 작아서 기별도 안 갈걸. 뭔가 큰 게 없나.’

그때 저 멀리 물동이를 들고 가는 하인이 보였다.

황급히 몽둥이를 놓고 다가간 치화가 그것을 가져왔다.

물동이가 좀 작긴 하지만 담긴 물의 무게가 있으니, 이 정도면 저 함정에 빠진 놈의 뚝배기를 충분히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그것을 들고 조심히 걸어갔다.

신발마저 벗어던지고 소리가 나지 않게 접근중이었는데, 인기척을 읽었는지 함정 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은 점점 더 부산해지고 있었다.

‘놓칠 줄 알아?’

이를 악문 정치화는 거리가 충분해지자마자 누군가가 벌레처럼 버둥대고 있을 함정 안으로 단번에 물동이를 집어 던졌다.

촤악! 퍼억! 챙그랑!

“커억!”

“응?”

‘어? 이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치화가 함정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그녀가 며칠 전 만났던 낯선 남자가 황당하고 화가 난 얼굴을 하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물동이에 머리를 맞지는 않은 듯했다.

“하, ……진짜 황당하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갓을 거칠게 벗어내며 하는 말에, 치화 역시 지금 누가 지어야 할 표정을 먼저 짓고 있냐는 투로 거칠게 물었다.

“남의 집에 또 멋대로 기어들어 와놓고 황당하긴 뭐가 황당해요? 황당한 건 당연히 집주인이지!”

“……됐고. 일단 밧줄이나 좀 내려 줘 보시죠.”

“뭔 당당하게 밧줄을 달래. 맡겨놨어요?”

“뭐요?”

“무슨 의도를 갖고 숨어든 건지 모를 침입자 주제에 태도가 너무 발칙하니까 하는 말이죠. 개소리 말고 거기 얌전히 있기나 해요. 내가 지금 물동이 하나 더 가져와서 당신 머리통을 깨버리려니까.”

“당신 말투가 대체……. 아니 게다가 고작 며칠 전 일인데 기억 안 납니까? 내가 구해줬잖아요. 이 함정도 내가 조언한 것이고.”

“뭔가 착각한 건 아니에요? 본인이 조언한 함정에 지금 얌전히 기어들어가 계시다고 하면 당신이 너무 등신천치같잖아요. 그러니 본인 조언 아닌 척 그냥 있어요.”

“…….”

“게다가 조언은 조언이고 어제는 습격도 없었는데 남의 집엔 또 왜 숨어든 거예요?”

“…….”

“말해 봐요. 답변을 듣고 나면 밧줄을 내려 주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러 또 두더지처럼 기어 들어온 건데요?”

“지금 사람을 자꾸 무도하게 매도하는데 나는 무슨 짓을 하러 온게 아니라…….”

“아니라?”

“…….”

“…….”

“……그러니까.”

“…….”

“……그러니까 그게. 빚이 좀 있어서.”

“네?”

“아니. 뭐 그런 게 있으니 아무튼 좀 꺼내 주시죠.”

“됐고. 물동이나 가지러 가겠습니다.”

“제가 구해 준 거 잊었습니까? 저, 생명의 은인이라구요!”

“침입자주제에 터진 입이라고 말이 많네.”

“…….”

할 말이 없는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윽!”

조금씩 몸을 떨던 남자가 무너지듯 몸을 웅크렸다.

“저기, 그럼 약이라도 조금 나눠 주십시오. 아까 당신이 던진 물동이의 파편에 찔린 데가…….”

“…….”

“……정말입니다. 통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원하시는 대로 이 함정안에 얌전히 들어앉아있을테니 약이라도 조금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

“……부탁합니다.”

실제로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도, 치화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내가 자기 같은 등신인줄 아나. 저딴 비루한 연기로 누굴 속이려고.

헌데 그때 치화의 시선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이미 기름을 먹여 짙어진 흙이었건만, 그 덕에 단번에 스미지 못하고 퍼져가는 붉은 액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잿빛 장포도 마찬가지였다. 옆구리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얼룩이 삽시간에 아래로 크게 번져갔다.

맙소사.

“정말 찔렸어요?!”

거동을 못 하게 해 관병들에게 넘길 생각은 있었지만 죽일 생각까진 없었던 치화가 대단히 당황했다.

황급히 약초와 약을 가져와서는 깊은 그 함정 안쪽으로 일단 밧줄에 약을 달아 먼저 내려보냈다.

만에 하나 지금 상황 역시 연기였다 하더라도, 아래에서 끌어당겨 빠져나가려는 기색을 보인다면 곧장 밧줄을 놓아 버릴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헌데 그건 남자의 운동신경을 너무 과소평가한 이야기였다.

밧줄이 내려가자마자 매듭을 푸는 것처럼 줄이 슬쩍 팽팽해지더니 싶더니 미처 놓기도 전에 한 번에 확 당겨졌다.

짧은 반동 후, 사내는 벌써 함정을 빠져나와 있었다.

“!”

“앞으론 누가 이 안에 빠졌다 싶으면 뭘 할 생각 말고 관병부터 불러요.”

“이, 이게 무슨!”

“침입자 머리통을 깨놓겠다고 물동이 같은 거 들고 다닐 시간 있으면 어리석게 속지 않는 법이나 좀 공부하던지요.”

그 상태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담을 넘어 두 번 다시 접근하지 않을 것처럼 부리나케 달아났다.

황망하게 그 꼴을 바라보던 치화가 짜증스럽게 입술을 물었다.

“……아이씨. 내가 제일 등신천치네.”

젠장. 저런 무뢰배가 죽든 말든 뭔 상관이라고 오지랖을 부렸담.

게다가 약초 따위 그냥 기름에 젖든 흙에 범벅되든 알아서 쓰라고 던져 넣으면 되는 거였는데.

뭐 깨끗하게 주겠다고 밧줄에 묶었다가 다 잡은 습격범을 놓치고.

“바보같이.”

그가 빠졌던 함정을 살펴보니 기름 먹은 미끄러운 흙벽을 다 긁어냈는지 다시 기름을 뿌려야 할 듯싶었다.

“설마 또 오는 건 아니겠지?”

보통이라면 안 오겠지만, 어쩐지 끝이 아닐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다른 함정들도 좀 생각해 봐야겠어.”

혹시 또 찾아온다면 그땐 절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함정을 파야지. 분에 차 바닥을 한 번 구른 치화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아가씨!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저 멀리서 하인이 손님의 존재를 알리며 달려왔다.

궁에서?

놀란 치화가 황급히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치화를 기다리던 궁인이 고개를 숙이곤 고급 종이로 감싼 편지를 건네었다.

“전하께서 아가씨께 의사를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내 의사?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내 의사가 뭐가 중요해서?

정치화가 의아한 얼굴로 종이의 끈을 풀고서는 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저도 모르게 한 단어를 읊조렸다.

“합동 ……천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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